세상사는 이야기

天上美人 어머니와 사랑에 빠지다 12

林 山 2012. 12. 5. 09:32

오늘은 일요일 오후 1시에 고등학교 동창생인 장사인 교감의 여식 결혼식이 있는 날이다. 12시 반쯤 식장인 마이웨딩홀 2층 사파이어홀로 올라갔다. 그런데 아니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장 교감도 안 보이고..... 안내판에는 생판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동창회 총무에게 전화를 했다.

 

"장 교감 딸래미 결혼식장이 마이웨딩홀 맞는가?"

"맞는데....."

"나 지금 결혼식장에 왔는데 장 교감도 안 보이고 안내판에 생판 모르는 사람 이름이 써 있는 걸."

"결혼식은 11시였는데..... 동창들은 국수 한 그릇씩 먹고 벌써 다들 집에 갔다네."

 

아차! 나는 11시를 1시로 잘못 알고 왔던 것이다. 이런 낭패가 있나!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너털웃음이 나왔다. 망할 놈의 건망증.....

 

장 교감에게 전화를 했더니 마침 웨딩홀 로비에 있단다. 로비에서 장 교감을 만나 축의금이 든 봉투를 전해 주고 축하인사를 건넸다. 식권을 한 장 받아들고 뷔페 식당으로 가서 류산슬과 죽, 잡채, 야채 등을 조금씩 맛본 뒤 마지막으로 국수 한 그릇을 먹었다.

 

결혼식장을 나와 바로 요양병원으로 어머니를 뵈러 갔다. 504호실로 들어서기 전 어머니에 대한 걱정으로 살짝 긴장이 되었다. 병실로 들어서자 어머니는 눈을 뜨고 계셨다. 어제와는 달리 얼굴에도 생기가 도는 듯했다. 나는반가운 마음에,

 

"제가 누구에요?"

"큰애."

"아버지는 예천 고향에 시제 지내러 가신 거 아세요?"

"안다."

"오늘은 누가 왔다 갔어요?"

"세째와 네째."  

 

어머니의 정신이 온전히 돌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어머니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나는 즉시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로 동생과 아이들에게 어머니의 소식을 알렸다. 옆 침상의 할머니들도 함께 기뻐하셨다. 6번 침상 할머니가,

 

"원장님의 효성이 지극해서 어머니의 정신이 돌아온 거라오."

 

칭찬을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도리어 부끄러웠다. 돌이켜 보면 나는 지극히 불효 자식이었다. 80년대 후반 내가 교육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민족, 민주, 인간화'를 부르짖으면서 떨쳐 일어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참여했을 때 어머니는 극구 말리셨다. 혹시라도 내가 다칠까봐 걱정이 되셨던 것이다.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교조 운동에 적극 가담하다가 마침내 나는 구속이 되어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어머니는 제발 전교조를 탈퇴하고 교사 생활만 열심히 하라고 눈물로 애원하셨다. 어머니를 저대로 놔두면 돌아가실 것만 같았다. 결국 나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전교조를 탈퇴하고 풀려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태우 독재정권의 공안당국은 나를 기소했다. 동시에 나는 학교에서 해직이 되었다. 사법부는 1심에서 나에게 징역 6월에 자격정지 6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그 후 이회창 전 대법원장이 주심을 맡은 대법원 상고심에서 결국 벌금 50만원의 확정 판결을 받았지만......  

 

해직이 되자 어머니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셨던가 보다. 식사도 잘 안하시고 눈물을 흘리곤 하셨다. 나는 옳은 일을 한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으셨다. 당시 나는 어머니를 많이도 원망했었다. 자식이 옳바른 길을 가고자 할 때 격려를 해주지는 못할 망정 뜻을 굽히라고 하시는 어머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세월이 많이 지나서야 나는 어머니가 조국의 민주화보다 자식의 안전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셨음을 깨달았다. 어머니에게는 그게 자식에 대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당시 정세로 보아 나는 복직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한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입수학능력고사를 다시 치르고 세명대 한의대에 들어갔다. 한의대에 다니던 중 1998년 정부의 특별임용조치로 나는 단양중학교에 복직 발령을 받았다. 해직이 된 뒤 10 년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2003년에는 정부의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도 받았다.  

 

해직 생활 10여 년 동안 어머니에게 늘어만 간 것은 주름살이요, 커져만 간 것은 한숨소리 뿐이었다. 그 긴 세월 나는 본의 아니게 어머니에게 불효를 한 셈이다. 세명대 한의대 본과 1학년 때던가 휴학을 하고 단양중학교에 부임하자 어머니도 아버지도 한의대를 그만두고 교직의 길을 가라고 권하셨다. 그러나 나는 이미 한의학을 공부하겠다는 결심을 한 터여서 부모님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복직 1년 뒤 이번에는 내 손으로 사표를 내고 단양중학교에서 퇴직을 했다. 그리고 다시 한의대로 돌아와 졸업하고 한의사가 되었다.

 

지난 날을 돌이켜 볼 때 부모님조차 설득하지 못하는 주제로 교육민주화운동이니 전교조니 뭐니 떠들고 다녔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곤 한다. 하지만 지난 일을 다시 돌이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앞으로나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아야겠다.

 

요즘은 사회 활동을 하려고 할 때 나는 반드시 가족들의 동의를 구한 뒤에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가족들의 동의를 받지 못하는 사회 활동은 그만큼 공감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족민주화가 곧 사회민주화의 첫 걸음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이제서야 깨닫다니 나이를 먹어도 헛먹었다.     

 

오늘따라 숨조차 쉬기 힘들 정도로 어머니의 목에서 가래가 끓었다. 가래를 스스로 뱉아낼 수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그것조차 하시지 못했다. 간호사와 간병사가 가래를 뽑아내는 기계를 끌고 와서 어머니의 목에 관을 꽂았다. 관을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어머니는 구역질을 하면서 고통스러워 하셨다. 어머니의 목에서는 가래가 거의 한 컵이나 나왔다. 어머니도 몹시 시원해 하셨다.

 

간호사에게 어머니의 정신이 돌아오셨으니 경관영양을 하지 말라고 일렀다. 간호사도 다행이라고 하면서 주치의에게 알리겠단다. 어머니는 지금 간병사가 식사를 먹여 드리고 있다. 내 목표는 어머니 스스로의 힘으로 식사를 하시게 하는 것이다. 숟가락을 손으로 쥐고 식사를 직접 하시면 운동도 될 것이다.    

 

어머니가 잠드시기를 기다렸다가 병실을 나선다. 오늘도 하루가 무사히 지나갔다는 느낌이다. 휴.....  

 

2012.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