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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日本) 규슈(九州) 여행 - 후쿠오카(福岡) 다자이후 덴만구(太宰府天満宮)

林 山 2018. 3. 16. 11:16

다자이후 덴만구(太宰府天満宮)는 후쿠오카 현(福岡県다자이후 시(太宰府市) 사이후(宰府)에 있다. 규슈(九州) 북쪽에 있는 후쿠오카 현은 예전에 지쿠고 국(筑後国), 지쿠젠 국(筑前国), 부젠 국(豊前国)에 속했던 지역이다. 북동쪽으로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북쪽으로 간몬 해협(關門海峽), 북서쪽으로 쓰시마 해협(對馬海峽), 남쪽으로 아리아케 해(有明海)와 접해 있는 후쿠오카는 한국과 현해탄(玄海灘) 건너 200km 정도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일본에서는 현해탄을 겐카이나다(玄界灘)라고 부른다. 


지리적 조건 때문에 일본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부터 한반도 등 대륙 문화를 접해 왔던 후쿠오카는 야요이 시대(彌生時代, BC 3세기~AD 3세기)에 벼농사가 최초로 전래된 이후 규슈 지방의 중심지로서 발전해왔다. 12세기에는 하카타(博多) 상인들이 일본 최초의 항구를 건설하고 송나라와 무역을 시작했다. 


다자이후 덴만구(太宰府天満宮) 지도(출처 네이버 장동현 블로그)


다자이후 시는 후쿠오카 현 후쿠오카 시에서 남동쪽으로 약 16km 떨어진 곳에 있다. 다자이후 시 북쪽에는 시오지 산(四王寺山), 동쪽에는 호만 산(宝満山), 서남부에는 덴파이 산(天拝山)이 있고, 시의 한가운데를 미카사 강(御笠川)이 흐른다. 


다자이후 시는 규슈 지역의 통치 조직인 다자이후(大宰府)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663년 백왜(百倭) 연합군과 나당(羅唐)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백강 전투(白江戰鬪, 금강 전투) 때 규슈 지방의 방위를 위해 다자이후를 이곳 내륙으로 옮겼다고 추정된다. 나라 시대(奈良時代, 710~794)에서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85),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1185~1333)까지 다자이후는 일본의 군사적, 행정적 중심지였다. 


다자이후는 또 한국과 중국의 외교 사신을 영접했던 곳이다. 외국인 사신을 맞이했던 영빈관인 고로칸(鴻臚館)도 이때 세워졌다. 다자이후 시는 다자이후가 설치되고 나서 급격한 발전을 하였다


헤이안 시대에 다자이후는 고위 관리의 유배지이기도 하였다. 인간에서 신의 반열에 오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 845~903)도 이곳에 유배되었다. 산기(参議) 스가와라노 고레요시(菅原是善)의 3남으로 태어난 미치자네(道真) 헤이안 시대 전기의 귀족으로 중국문학 전문가이자 학자, 시인, 정치가였다. 서도에도 능해 산세이(三聖) 가운데 한 사람으로도 손꼽힌다. 그는 '루쥬고꾸시(類聚国史)'를 편찬하고, '산다이지츠로쿠(三代実録)'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그의 시문(詩文)은 '간케분소(菅家文草)', '간케코슈(菅家後集)'에 수록되었다. 스가와라(菅原) 가문은 백제에서 건너온 왕인박사(王仁博士)의 후예라는 설도 있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초상(출처 위키피디아)


헤이안 시대는 후지와라씨(藤原氏)의 시대라고도 한다. 덴노(天皇)의 외척으로 정치적 실세로 떠오른 후지와라 가문이 덴노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섭정(攝政)을 통해서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우다 덴노(宇多天皇, 867~931, 재위 887~897)는 관백(關白)들을 견제하고자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중용했다. 우다 덴노의 신임으로 간표의 치(寛平の治)라 불리는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던 그 일본인들로부터도 많은 존경을 받았다. 미치자네는 다이고 덴노(醍醐天皇,  885~ 930, 재위 897~930) 때 종2위(従二位) 우다이진(右大臣)까지 올랐다. 


하지만 섭관정치(攝關政治)의 실세였던 사다이진(左大臣) 후지와라노 도키히라(藤原時平, 871∼909)의 참소로 901년 다자이곤노소치(大宰権帥)로 좌천되었고, 유배된 지 2년만인 903년에 이곳에서 죽었다. 제자들은 그의 시신을 혼슈(本州)의 교토(京都)로 보내기 위해 수레에 실었다. 그런데, 수레를 끌고 가던 소가 갑자기 멈추더니 그 자리에 엎드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가 멈춘 자리가 스승의 무덤을 암시한다고 생각한 제자들은 그를 이곳에 장사지냈다. 905년에는 그의 유해가 묻힌 자리에 안락사(安樂寺)를 지었다. 


미치자네의 사후 수도에서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났다. 909년 미치자네를 모함했던 후지와라노 도키히라가 죽었고, 923년에는 다이고 덴노의 황태자가 21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에 다이고 덴노는 미치자네를 원래의 우다이진으로 환원하는 등 명예를 회복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31년에는 궁궐 안의 세료덴(清涼殿)에 벼락이 떨어져 다이나곤(大納言) 후지와라 키요츠라(藤原淸貫) 등이 즉사했다. 다이고 덴노도 3개월 뒤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사람들은 미치자네의 원령(怨靈)이 저주를 내린다고 믿었다. 조정은 그를 덴만 덴진(天滿天神)으로 여기고, 991년 그의 원령을 달래기 위해 다자이후 덴만구를 세웠다. 또, 그에게 정1위 다이죠다이진(太政大臣)을 추증했다. 처음에는 미치자네를 벼락의 신으로 모셨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학문을 관장하는 신, 지성의 신이 되었다. 현재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다자이후 덴만구는 교토의 기타노 덴만구(北野天満宮)와 함께 전국 12,000여 덴만구의 총본산 역할을 하고 있다. 


미치자네가 학문을 관장하는 신, 지성의 신이기에 다자이후 덴만구에는 일본 전역에서 입학 시험 합격이나 학업 성취를 바라는 수많은 학생, 수험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 찾아와 기도를 올리고 있다. 다자이후 시에 대학, 단과 대학, 고등학교 등의 학교가 많은 것도 덴만구에 모셔진 미치자네가 학문의 신으로 숭배되고 있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다자이후 덴만구 오모테산도(太宰府天満宮表参道)를 오가는 참배객들


다자이후 덴만구 오모테산도(太宰府天満宮表参道)의 이시도리이(石鳥居)


사이후(宰府)의 다자이후 덴만구 오모테산도(太宰府天満宮表参道) 양쪽에는 음식점, 제과점, 소바 전문점, 기념품점, 생활용품점 등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다. 특히 ‘우메가에모치(梅ヶ枝餅)’라는 떡은 이곳의 명물이다. 이 떡을 먹으면 병에 걸리지 않고 정신이 맑아진다고 한다. 


우메가에모치에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전설이 담겨 있다. 미치자네가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지내고 있을 때 죠묘(淨妙)라는 노 비구니가 그를 위로하기 위해 구운 찹쌀떡을 공양했다. 미치자네는 이 찹쌀떡을 즐겨 먹었다. 미치자네가 죽었을 때 그의 관 위에는 구운 찹쌀떡과 매화나무 가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죠묘는 다자이후 남쪽 자신의 법명을 딴 죠묘인(淨妙院)이란 사원에서 다이묘진(大明神)으로 모셔지고 있다. 죠묘인은 팽나무가 많아서 에노키샤(榎社), 죠묘는 '에노키샤 할머니'로 불린다.   


평일에도 오모테산도 거리는 덴만구를 찾은 참배객들로 붐빈다. 이시도리이(石鳥居)는 덴만구로 통하는 거리 중간에도 세워져 있다. 거대한 석조 도리이로 보아 이곳이 국가적 차원에서 세워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다자이후 덴만구(太宰府天満宮) 표지석과 이시도리이


'太宰府天満宮(다자이후 덴만구)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이시도리이를 지나면 경내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부터 이제 본격적인 신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도리이는 말 그대로 '새가 머무는 곳'으로 꼭대기에 나무로 깎은 새를 올려놓은 우리나라의 솟대나 홍살문를 떠올리게 한다. 도리이는 원래 우리나라의 솟대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 도리이 바로 남쪽 곁에는 관광 안내소가 있다. 관광 안내소 남쪽에는 우키도노(浮殿)라는 목조 전각이 자리잡고 있다. 전각 주변을 수심이 얕은 연못이 둘러싸고 있어서 우키도노라고 한 것 같다.         


엔쥬오우인(延壽王院) 정문


엔쥬오우인(延壽王院)은 예전에 덴만구 참배객의 숙소로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신토(神道)의 세습 신관이 거주하는 곳이다. 세습 신관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후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엔쥬오우인 정문은 우리나라 사찰의 일주문과 그 형태가 매우 비슷하다. 엔쥬오우인은 외부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엔쥬오우인 정문 앞에는 미치자네의 시신을 실은 우마차를 끌고 장지로 가다가 갑자기 멈춰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고신규(御神牛) 동상을 세워놓았다. 이 고신규 와상은 1805년에 봉납했다는 설도 있고, 1984년에 히로히토(裕仁, 1901~1989) 일왕이 하사했다는 설도 있다.  


자신의 안 좋은 신체 부위와 같은 곳에 해당하는 고신규의 신체 부위를 만지면 아픈 곳이 낫는다는 속설이 있다. 또, 고신규의 코와 뿔을 만지면 대학에 합격하고, 머리를 쓰다듬으면 지혜가 생긴다는 속설도 있다. 미치자네가 소띠 해에 태어나서 소띠 해에 세상을 떠났다는 전설적인 요소도 그러한 속설을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고신규의 머리와 뿔, 몸통 등은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반들반들하다. 


이시도리이(石鳥居)


신지이케(心字池)


신지이케(心字池)


엔쥬오우인 앞에서 왼쪽으로 90도 꺾으면 또 하나의 이시도리이가 세워져 있다. 이 도리이는 약 700년 전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다자이후 덴만구 혼덴(太宰府天満宮本殿)으로 들어가려면 신지이케(心字池)에 놓인 다이코바시(太鼓橋)와 히라바시(平橋), 다이코바시 등 3개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 신지이케는 초서(草書) '心'자의 형상으로 만든 연못이라고 한다. 마음을 갈고 닦으라는 뜻이리라. 


바깥의 다이코바시는 과거, 히라바시는 현재, 안쪽의 다이코바시는 미래를 상징한다. 이는 불교의 윤회설에 근거한 것이다. 과거의 다리 다이코바시를 건넌 다음에는 뒤를 돌아보면 안된다는 속설이 있다. 아치형의 다이코바시는 북다리 또는 홍예교(虹霓橋)라고도 한다. 연못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는 아름드리 나무에는 이끼와 일엽초가 자라고 있어 신비한 분위기가 감돈다,  


신지이케 동쪽에는 또 하나의 연못 쇼부이케(菖蒲池, 아야마이케)가 있다. 쇼부이케에는 300여 개의 원통형 화분에 수집 종의 창포를 기르고 있다. 4~7월 쇼부이케에 노란색 창포꽃이 활짝 피면 장관을 연출하겠다. 쇼부이케에서 동쪽 작은 산줄기의 회랑을 가로지르면 규슈국립박물관(九州国立博物館)에 이르게 된다. 규슈국립박물관은 도쿄(東京), 교토(京都), 나라(奈良)에 이어 일본 제4위의 박물관이다.  


덴만구 말사 금왕사(今王社)


다이코바시를 건너 작은 섬에 이르면 작고 아담한 진쟈(神社) 금왕사(今王社)가 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금왕사는 다자이후 덴만구의 말사이다. 금왕사 지붕에는 한 떼의 비둘기들이 날아와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고 있다. 


신지이케(心字池)


덴만구 말사 시가샤(志賀社)


현재를 상징하는 가운데 히라바시를 건너면 서향으로 앉아 있는 시가샤(志賀社)를 만난다. 덴만구의 말사인 시가샤는 금왕사와 비슷한 규모지만 지붕의 형태가 다르다. 이 진쟈는 해상 안전을 담당하는 바다의 신 와다츠미(綿津見)를 모시고 있다. 와다츠미는 '와다(바다)'와 '미(신)'을 '츠(관형사)'로 연결한 합성어다. 문 위에는 시가다이묘진(志加大明神)이라고 쓴 판자가 걸려 있다. 시가샤는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 1336~1573) 시대인 1458년에 세워진 규슈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규모는 작지만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다자이후 덴만구 로몬(太宰府天満宮 楼門) 앞 이시도리이(石鳥居)


다자이후 덴만구 로몬(太宰府天満宮 楼門) 앞 이시도리이(石鳥居)


미래를 상징하는 다이코바시를 건너면 마지막 이시도리이가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다. 이시도리이를 지나면 왼쪽에 헌물(獻物)을 봉납하는 코사츠오사메쇼(古札納所)가 있고, 오른쪽에는 카에데샤(楓社)와 소호 시비(蘇峰詩碑)가 세워져 있다. 


소호(蘇峰)는 토쿠토미 소호(德富蘇峰)로 더 잘 알려진 역사가이자 언론인, 수필가 토쿠토미 이치로德富猪一郎, 1863~1957)다. 젊은 시절에는 자유민주주의자이자 평민주의자였다가 뒤에 군국주의자로 전향한 소호는 일제가 아시아 대륙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운 정치 슬로건인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단초를 제공했다. 1910년 일제의 식민지 조선에서 그는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의 요청으로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京城日報)의 고문을 맡기도 했다. 이후 소호는 일본의 군국주의를 선양하면서 귀족원(貴族院) 의원에 추대되고, 문화훈장을 받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끈난 뒤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소호 시비에는 소호가 92세 되던 해인 1954년에 썼다는 시가 새겨져 있다. 이 시 끝에 그는 소호 스가와라 마사토(蘇峰菅原正敏)라는 이름을 썼다. 서명으로 볼 때 소호가 스가와라씨의 후예임을 짐작할 수 있다.  


儒門出大器(유문출대기) 선비가에서 인재가 나시니

抜擢躋台司(발탁제태사) 발탁되어 태사에 오르셨네

感激恩過厚(감격은과후) 은혜의 도타움에 감격하여

不顧身安危(불고신안위) 안위도 돌아보지 않으셨네

一朝罹讒構(일조리참구) 하루아침에 참소에 걸려서

呑寃謫西涯(탄원적서애) 원통하게 서변에 유배됐네

傷時仰蒼碧(상시앙창벽) 근심으로 하늘을 우러르며

愛君向日葵(애군향일규) 향일규처럼 임금 사랑했네

祠堂遍天下(사당변천하) 사당이 온세상에 퍼져나가

純忠百世師(순충백세사) 영원토록 스승님이 되셨네


昭和二十九歲 蘇峰菅原正敏 敬頽齢九十二(소화 29년 소고 스가와라 마사토 퇴령 92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예찬하는 시다. 쇼와(昭和, 1926~1989) 29년은 히로히토 일왕 때인 1954년에 해당한다. 타이레이(頽齢)는 노년의 뜻이다.


1940년 5월 28일 소호회 조선지부(蘇峰會 朝鮮支部)는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소호 시비를 세우고 성대한 제막식을 가진 바 있다. 청운정(淸雲町) 작소거(鵲巢居)에서 있었던 제막식에서는 내장원(內藏院) 이사(理事) 곤도 시로스케(權藤四郞介)가 인삿말, 중앙조선협회 주사 나카지마 쓰카사(中島司)가 답사, 조선문인협회 명예총재이자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시오와라 도키사부로(鹽原時三郞) 등이 축사를 하였다. 소호는 고령으로 참석하지 못 했다. 친일파 문인 이광수(李光洙)도 소호에게 12통의 편지를 보낸 것으로 보아 소호회 조선지부에 가입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소호 시비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었다. 


淸風溪上白雲洞(청풍계상백운동) 청풍계 위에는 백운동 있거니

洞裡幽綠傍水去(동리유록방수거) 마을숲을 비껴 시내가 흐르네

老樹當門門擁石(노수당문문옹석) 문앞의 노거수는 바위를 안고

鵲巢高處是吾家(작소고처시오가) 까마득한 까치집이 내 집일세


소호 시비 뒤에는 기린상(麒麟像), 초즈야(手水舎)가 있다. 기린은 상상 속의 신성한 동물로 영웅이나 인재를 상징한다. 초즈야는 몸과 마음을 재계(齋戒)한다는 의미로 손을 씻는 곳이다.


다자이후 덴만구 로몬(太宰府天満宮 楼門)


다자이후 덴만구 혼덴(太宰府天満宮本殿)


다자이후 덴만구 혼덴(太宰府天満宮本殿)에서 제사를 올리는 신관


석등(石燈)이 줄줄이 늘어선 길을 따라 2층의 누문(楼門) 안으로 들어가면 다자이후 덴만구 혼덴(太宰府天満宮本殿) 영역이다. 혼덴은 1591년에 건립되어 1915년에 재건된 것이다. 1590년대는 다이묘(大名)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와 그의 후계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 아래에서 정치적 통합을 이룬 쇼쿠호 시대(織豊時代, 1568∼1603) 또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다. 혼덴 입구의 문은 흡사 사무라이(侍)의 투구를 연상케 한다. 이런 문을 카라몬(唐門)이라 하고, 지붕의 곡선 양식을 카라하후(唐破風)라고 한다. 카라하후는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1185~1333)부터 생겨났다고 한다. 


혼덴의 지붕은 노송나무(편백나무) 껍질을 이어 붙인 히와다부키(檜皮葺)다. 나라 시대에는 도성의 주요 건물 지붕은 기와, 부속 건물의 지붕은 히와다부키로 했다. 이후 히와다부키가 점차 귀족의 저택이나 진쟈의 지붕에 쓰이게 되었다.  


마침 혼덴 안에서는 신관이 덴만 덴진(天滿天神)에게 제사를 올리고 있었다. 혼덴 앞에는 덴만 덴진에게 소원을 비는 참배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참배하는 방법은 소원을 빌면서 합장 반배(合掌半拜)한 뒤 박수를 두 번 치면 된다. 진구(神宮)에서는 박수를 4번 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사 진구(宇佐神宮) 안내판에서 박수를 4번 치라고 한 것을 본 적이 있다. 


다자이후 덴만구 혼덴(太宰府天満宮本殿) 앞 도비우메(飛梅)


다자이후 덴만구 혼덴(太宰府天満宮本殿) 앞 코고노우메(皇后の梅)


덴만구 혼덴 앞마당 양쪽 보호 울타리 안에는 수령이 1,000년이 넘었다는 도비우메(飛梅)와 코고노우메(白王后の梅)라 불리는 매화나무가 있다. 도비우메는 백매(白梅), 코고노우메는 홍(紅梅)다. 코고노우메 옆에는 봉납(捧納) 귤나무도 있다. 다자이후 덴만구는 매화가 필 무렵에 오는 것이 좋겠다.


도비우메에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와 얽힌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미치자네는 누명을 쓰고 좌천되어 교토를 떠나오면서 자신의 정원에 있던 매화나무 앞에서 와카(和歌) 한 수를 읊었다. 이 와카는 엔쥬오우인 담장 곁에 있는 미치자네의 가비(歌碑)에 새겨져 있다.


東風吹かばにほひおこせよ梅の花! 봄바람 불면 향기를 날려 보내라 매화여!

あるじなしとしよて春な忘れそ。주인이 없다고 해서 봄마저 잊지는 말아라.


봄바람이 불 때 교토에 있는 덴노의 안부를 매화의 향기에 실어 규슈로 보내 달라는 미치자네의 충정과 매화에 대한 애정이 담긴 시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매화나무에게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을까!  


미치자네가 규슈로 떠난 이듬해 교토 자택의 정원에 있던 매화나무 한 그루가 바로 이곳으로 날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날아온 매화' 즉 도비우메(飛梅)라는 이름이 붙었다. 도비우메는 아직도 살아서 미치자네가 잠들어 있는 다자이후 덴만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다자이후 덴만구(太宰府天満宮) 입구의 매화나무 숲


다자이후 덴만구 정원에는 130여 종 6,000여 그루의 매화나무가 자라고 있다. 덴만구에서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뜨리는 매화는 도비우메다. 신기하게도 도비우메의 꽃이 지고 나면 이어서 나머지 매화들이 꽃을 피운다고 한다. 덴만구의 매화숲은 일본의 향기로운 풍경(かおり風景) 100선에 선정된 바 있다.


덴만구 양쪽 회랑에는 '受驗合格(수험합격)', '祈願接手(기원접수)', '神酒所(신주소)'라고 쓴 현수막이 걸려 있다. 회랑의 상점에서는 봉납물(捧納物)을 판매하고 있다. 마당가에는 오미쿠지(おみくじ)를 파는 자판대가 있다. 어미쿠지는 일본의 진쟈나 절에서 길흉을 위해 뽑는 운세 쪽지다. 100엔을 넣고 운세가 적힌 쪽지를 꺼내서 나쁜 운세가 나오면 지정된 장소에 매어 놓고, 좋은 운세가 나오면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이듬해 다시 올 때 두고 간다. 운세 쪽지의 유효 기간은 1년이다. 


덴만구에는 일본의 국보 등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호모쓰덴(宝物殿),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삶을 하카타 인형(博多人形)으로 전시하고 있는 스가코 역사관(营公歴史館), 문서를 보관한 분쇼칸(文書館)도 있다. 호모쓰덴과 스가코 역사관은 별도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덴만구 혼덴 뒤편에는 '부부장(夫婦樟)'이라는 이름의 아름드리 녹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수령이 1,000년을 넘었다는 이 녹나무는 뿌리 부분이 서로 붙어 있는 연리근(連理根)이다. 


댄만구 후원에는 후데즈카(筆塚)와 호쵸즈카(包丁塚)라는 특이한 무덤이 있다. 후데즈카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붓무덤이다. 그는 우다이진에 오르기까지 자신을 보필한 붓의 공이 컸다고 하여 자신이 쓰던 몽당붓들을 모아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미치자네의 제자들이 쓰던 붓들을 모아 무덤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중국에도 필총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있다. 당나라 때 장사(長沙)의 승려 회소(懷素)와 수나라 때의 승려 지영 선사(智榮禪師)가 바로 그들이다. 회소는 초서(草書), 특히 심하게 흘려 쓰는 광초(狂草) 쓰기를 매우 좋아하여 초성삼매(草聖三昧)를 얻었다고 하는 명필이다. 그는 만여 그루에 이르는 파초(芭蕉)를 심고, 그 잎을 따서 붓글씨 연습을 했다. 술을 좋아했던 그는 흥이 오르면 붓을 휘둘러 변화무쌍한 붓글씨를 썼다. 닳아서 못쓰게 된 붓이 쌓이자 그는 이 붓들을 산기슭에 묻어 주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필총이라 하였다. 


지영 선사는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의 7대손이자 명필 구양순(歐陽詢)의 스승이다. 지영 선사가 오흥(吳興) 영복사(永福寺)에 머물 때 오랜 세월 글씨를 써서 다 닳은 몽당붓이 큰 독 열 개에 가득찼다. 훗날 그는 그 붓들을 땅에 묻고 퇴필총(退筆塚)이라 하였다. 송나라 소식(蘇軾)은 그의 '석창서취묵당(石蒼舒醉墨堂)'에서 '군이 서예에도 지극히 공력을 들이니, 담장가에 쌓인 몽당붓이 산등성이 같아라.(君於此藝亦云至 堆牆敗筆如山邱)'라고 하였다.


호쵸즈카는 부엌칼 무덤이다. 일본의 요리사협회에서 붓무덤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한다. 미치자네 부부가 이곳에 살면서 먹거리가 되어준 동물들을 위해 부엌칼을 묻었다는 설도 있다. 



녹나무 천연기념물(大楠天然記念物)


다자이후 덴만구 서쪽 문으로 나오면 수령이 1000~1500년으로 추정되는 천연기념물 녹나무(大楠, おおくす)를 만난다. 밑둥 둘레 20m, 높이 39m에 이르는 거대한 녹나무다. 덴만구에는 이 녹나무 말고도 아름드리 녹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  


다자이후 덴만구 광장


줄을 지어 늘어선 아름드리 녹나무를 경계로 서쪽에는 넓은 광장이 있다. 광장에서는 한 일본인이 북을 두드리면서 노래인지 주문인지 모를 말을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다. 굿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에마도(絵馬堂)


광장과 신지이케 사이에는 에마도(絵馬堂)가 있다. 에마(絵馬)는 기원이나 감사의 표시로 말 대신 진쟈나 절에 봉납하는 말 그림 액자다. 에마를 걸어두는 건물이 에마도다. 일본인들은 말을 귀인이나 신이 타는 동물로 생각했다. 나아가 말은 신(神), 마굿간은 신이 머무는 곳으로 여겼다. 다자이후 덴만구 에마도에는 특히 '합격', '성취'를 기원하고, '감사'하는 에마가 많이 보인다.


다자이후 덴만구 이시도리이에서 필자


다자이후 덴만구를 나오면서 일본인들의 종교관은 매우 현세적이고 실용적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한양대 박규태 교수도 그의 저서 '일본의 신사'에서 일본인들의 종교관에 대해 '일본인들의 종교 관념은 반드시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신을 전제로 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신(神)을 더 선호하는 현세 중심적이고, 즉물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신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신사는 가시적인 대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쓰고 있다.  


2018. 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