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연인들의 성지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를 찾아서

林 山 2019. 2. 19. 12:22

마네 현(島根県) 야스기 시(安来市) 후루카와 정(古川町)에 있는 아다치 미술관(足立美術館)을 떠날 때도 겨울비는 여전히 구죽구죽 내리고 있었다. 빗속을 뚫고 이즈모 시(出雲市) 타이샤 정(大社町) 기즈키히가시(杵築東)에 있는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로 향했다. 이즈모타이샤에 도착했을 때도 비는 계속 내리고 않았다. 눈이 내렸다면 축복이었을 것이다. 일본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이즈모타이샤는 한반도 도래인들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말을 들어서 한번 꼭 가보고 싶었다. 


오전에 들렀던 타이샤 정 히시네(菱根)의 시마네 와이너리(島根ワイナリ)와 이즈모타이샤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시마네 와이너리를 보고 먼저 이즈모타이샤에 들렀다가 숙소에서 가까운 아다치 미술관으로 갔다면 시간도 절약되고, 기름도 아낄 수 있었을 것이다. 제법 먼 거리를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왔다리 갔다리 한 것은 가이드의 깊은 뜻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이즈모타이샤 같은 중요한 곳을 방문할 때는 샛길이나 옆문으로 다닐 것이 아니라 초입부터 정식 순서를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 우가바시노오오도리이(宇迦橋の大鳥居), 출처 구글


이즈모타이샤로 들어가는 첫 관문은 다카하마가와(高浜川)에 놓인 우가바시(宇迦橋)에 세워진 우가바시노오오도리이(宇迦橋の大鳥居)다. 이 도리이는 다이쇼(大正) 4년인 1915년 규슈(州) 고쿠라(小倉)의 독지가(篤志家) 고바야시 도쿠이치로(小林徳一郎)가 소나무 280그루와 함께 시주한 것이다. 철근 골조 콘크리트 구조물로 세운 이 도리이는 높이 23m, 폭 14m, 기둥 직경 1.8m, 기둥 둘레 약 6m이다. 이 도리이는 헤이세이(平成) 27년인 2015년에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우가바시노오오도리이 뒤로 야쿠모야마(八雲山)가 솟아 있다. 이즈모타이샤를 세우기 전 이 진쟈(神社)의 신체(神體)는 야쿠모야마였다. 그래서 야쿠모야마는 신직(神職)들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성지라고 한다. 


이즈모타이샤 서쪽 가까이에는 동해((東海)-니혼카이(日本海)가 있다. 일본인들이 이 바다를 도카이(東海)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를 일본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일본에서 동해는 서쪽에 있다. 우리에게 동해는 일본인들에게 서해-사이카이(西海)인 것이다. 일본인들에게 도카이는 다이헤이요(太平洋)다. 반대로 우리는 또 니혼카이(일본해) 명칭을 인정할 수 없다. 한국의 동해-일본의 니혼카이 명칭에 대한 두 나라 사이의 의견 차이는 태평양 만큼이나 넓고 멀어 보인다.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 세이다마리노오오도리이(勢溜の大鳥居), 출처 구글


우가바시노오오도리이에서 북쪽으로 똑바로 난 도로를 따라 500~600m 정도 올라가면 세이다마리노오오도리이(勢溜の大鳥居)가 나타난다. 우가바시에서 세이다마리노오오도리이가 보인다. 도리이(鳥居)는 진쟈의 정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불교 사찰의 일주문(一柱門)과 비슷하다. 즉, 속계(俗界)와 신계(神界)의 경계 지점이다. 여기서부터 이즈모타이샤 경내에 해당한다. 


1968년에 세운 목제 도리이는 삭아서 철거되었다. 현재의 세이다마리노오오도리이 2018년에 철강으로 다시 만들고,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페인트칠을 했다. 세이다마리(勢溜)는 근처 광장의 이름이다. 세이다마리노오오도리이는 '이즈모 전일본 대학 선발 역전 경주(出雲全日本大学選抜駅伝競走)'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 테츠노도리이(鉄の鳥居), 출처 구글


소나무 숲길 중간쯤에는 철(鉄)로 만든 테츠노도리이(鉄の鳥居)가 세워져 있다. 수령 400년이 넘은 소나무 숲길은 에도 시대(江戶時代, 1603~1867) 초기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가운데로 난 길은 신(神)들이 다니는 길이라서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사람들은 양쪽 옆으로 난 길로 다녀야 한다. 


무스비신상(ムスビの御神像), 출처 구글


소나무숲 참배로를 지나면 양쪽에 신상(神像)이 있다. 무스비신상(ムスビの御神像)은 이즈모타이샤의 주신인 오오쿠니누시노오미카미(大国主大神, 오오쿠니누시)가 사키미타마(佐枳彌多摩, 幸魂)와 쿠시미타마(俱斯美拕磨, 奇魂)을 받는 모습이다. 사키미타마(幸魂)는 인간에게 사랑(愛)을 주는 신령, 쿠시미타마(奇魂)는 지혜(智)를 주는 신령이다. 


이나바노시로사기(因幡の白兎), 출처 구글 


고지아이노고신조(御慈愛の御神像)는 이나바노시로사기(因幡の白兎, 이나바의 흰토끼) 설화를 바탕으로 만든 상이다. 오오쿠니누시(大国主)는 보따리를 짊어지고 있다. 보따리 속에는 오오쿠니누시가 대신 짊어진 인간의 고민과 고난이 들어 있다고 한다. 오오쿠니누시는 흰토끼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고 하여 '의료의 신'으로도 불린다.


데미즈야(手水舎), 출처 구글


데미즈야(手水舎)는 입과 손을 씻는 곳이다. 입과 손을 씻는 것은 신을 맞이하기 전 몸과 마음을 깨끗이 정화한다는 의미가 있다. 먼저 오른손으로 국자를 들고 물을 떠서 왼손을 씻은 다음 국자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을 씻는다. 다시 국자를 오른손으로 들고 왼손으로 물을 받아 입을 헹구고 나서 다시 왼손을 씻는다. 절대로 국자를 입에 대서는 안된다. 손과 입을 다 씻었으면 남은 물로 국자를 세워서 손잡이를 깨끗이 씻는다. 일본인들은 습관이 들어서 그런지 아주 자연스럽게 잘한다. 한국인 관광객들 중에는 국자를 입에 대는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그런 모습이 일본인들의 눈에는 불경스럽고 몰상식하게 보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 가네노도리이(銅の鳥居), 출처 구글


벽동(碧銅, 청동)으로 만든 가네노도리이(銅の鳥居)는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이다. 가네노도리이는 칸분(寛文) 6년인 1666년 6월 조슈 번(長州藩)의 제2대 번주(主)인 모리 쓰나히로(毛利綱広)가 시주한 것이다. 높이는 6m, 기둥의 직경은 52cm이다. 2004년에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가네노도리이를 만지면 재물운이 좋다는 설이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반들반들하다. 


가네노도리이는 다른 세 개의 도리이와 함께 묘진도리이(明神鳥居) 양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묘진도리이는 기둥의 밑을 약간 밖으로 내어 안정감을 높이고, 카사기(笠木, 가로대)와 시마키(島木)는 양끝이 위로 휘어졌으며, 가쿠즈카(額束)와 쿠사비(楔, 쐐기)가 있는 양식이다. 도리이 양식 중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다. 


카사기는 도리의 맨 위에 대는 횡목(가로대)으로 두 기둥을 서로 연결한다. 시마키는 카사기 바로 아래에 있고, 기둥머리 위에 대는 긴 가로대를 말한다. 누키(貫)는 시마키에서 약간 사이를 두고 밑에 있는 가로대이다. 가쿠즈카는 도리이의 상부 중앙을 관통하는 동자기둥이다. 여기에 액자를 건다. 


신마상(神馬像)과 신우상(神牛像), 출처 구글


가네노도리이 바로 왼쪽에는 신마상(神馬像)과 신우상(神牛像)이 있다. 신마상을 만지면 자식운, 신우상을 만지면 학문운이 좋다는 믿음이 있다. 두 상 모두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반들반들하다. 자식들이 공부 잘해서 출세하는 것은 이 세상 모든 부모들의 소망이 아닐까!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 하이덴(拝殿)


옛날 이즈모타이샤는 아메노히스미노미야(天日隅宮), 기즈키노오야시로(杵築大社)로도 불렸다. 연희식(延喜式)에 기록된 묘진타이샤(名神大社)로 이즈모 국(出雲國)의 이치노미야(一宮)였으며, 구 사격(社格)은 칸페이타이샤(官幣大社)였다. 칸페이타이샤란 고대 율령제 일본에서는 제례를 담당하는 최고 중앙관청인 진기칸(神祇官),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이후에는 일본 황실에서 신에게 바치는 폐백(幣帛)을 지원하는 사격이 가장 높은 신사다.


일본 '고지키(古事記)'에 의하면 해신(海神) 스사노오(素戔嗚)의 후손 오오쿠니누시가 일본 건국신화의 주인공이자 태양신(太陽神)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 아마테라스)의 손자인 니니기노미코토(邇邇芸命, 니니기)에게 나라를 물려줄 때 천손(天孫)이 사는 곳과 똑같은 큰 궁전을 지어달라고 해서 세워준 것이 이즈모타이샤라고 한다. 이는 아마도 일본 고대의 야마토 정권(大和政權)이 다른 지역의 정권을 정복하면서 생겨난 설화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이즈모타이샤는 '고지키'와 '니혼쇼키(日本書記)'에 등장하는 국토 이양 신화의 주무대이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진쟈 하나를 만들어 준다고 해서 나라를 순순히 내놓을 권력자가 있을까? '고지키'와 '니혼쇼키'를 토대로 추론해보자. 아마테라스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하고, 천상계인 다카마가하라(高天が原, 高天原)에서 쫓겨난 스사노오는 신라의 소시모리(曾尸茂梨)로 건너가 아들 이타케루(五十猛)와 함께 잠시 머물렀다. 다시 바다를 건너 이즈모의 히노가와((日野川, 지금의 斐伊川, 히이카와) 상류로 들어간 스사노오는 도리카미야마(鳥髪山, 지금의 船通山, 센츄잔)에서 괴물 야마타노오로치(八岐大蛇)를 죽이고 쿠시나다히메(櫛名田比賣)를 구출하여 아내로 삼는다. 야마타노오로치는 스사노오의 정벌에 대항한 토착 세력으로 추정된다. 


스사노오의 아들(혹은 6대손) 오오아나모치(大穴牟遅神, 大穴持命) 또는 오호나무치(大己貴命)에게는 야소카미(八十神)라고 불리는 형들이 있었다. 어느 날 형들은 이나바(因幡)의 야카미히메(八上比賣)에게 청혼하기 위해 떠나면서 막내인 오호나무치를 짐꾼으로 데리고 갔다. 이나바는 지금의 돗토리 현(鳥取県) 동부 지방이다. 도중에 이들은 잔꾀를 부리다가 상어에 의해 살가죽이 몽땅 벗겨진 토끼를 만났다.


토끼가 도움을 청하자 심술궂은 형들은 바닷물로 몸을 씻으라고 일러 주었다. 그 말대로 하자 토끼의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하지만 오호나무치는 강물에 몸을 씻은 뒤 꽃가루 위에 뒹구르라고 알려 주었다. 그 말대로 하자 토끼는 곧 원래의 상태로 회복되었다. 그 보답으로 토끼는 형들 대신 오호나무치가 야카미히메를 아내로 맞이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예언대로 야카미히메는 형들의 청혼을 물리치고 오호나무치에게 시집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에 화가 난 형들은 두 번이나 오호나무치를 죽이고 말았다. 


어머니의 도움으로 부활한 오호나무치는 형들의 집요한 추적을 견디다 못해 스사노오가 통치하는 지하세계 네노쿠니(根國)로 도피했다. 거기서 오호나무치는 스사노오의 딸 스세리비메(須勢理比売)와 몰래 정을 통했다.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한 스사노오는 오호나무치를 죽이려고 했지만, 스세리비메의 도움으로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결국 오호나무치는 스사노오의 보물인 칼과 활, 거문고를 훔쳐 스세리비메와 함께 지하세계를 도망쳐 나온 뒤 아시하라노나카츠구니(葦原中国)로 돌아가 나라를 세웠다. 아시하라노나카츠구니는 지금의 이즈모이다. 스사노오는 하는 수 없이 이들의 결혼을 인정하고, 오호나무치에게 오오쿠니누시라는 새 이름을 주면서 지상의 통치권을 부여했다. 


지상계의 아시하라노나카츠구니를 탐낸 다카마가하라의 지배자 아마테라스는 사자를 파견하여 여러 차례 나라를 바치라고 압박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끝내는 다케미카즈치노오(健御雷之男)를 이나사노하마(稲佐の浜)에 파견하여 오오쿠니누시를 설득하는 데에 성공했다. 설득에 굴복한 오호쿠니누시는 나라를 넘겨주고 지하세계로 숨어 버렸으며, 아마테라스의 손자인 니니기가 이 지방에 내려와 일본 땅을 지배하는 통치자가 되었다. 이것이 국토 이양과 천손 강림 신화(天孫降臨神話)이다. 니니기의 자손이 바로 신화적인 일본 초대 덴노인 진무 덴노(神武天皇, BC 711~585)이다. 


역사학자들은 한반도계 이주민들의 신앙인 스사노오 계통의 신화가 야마토 정권의 정복 후 후대에 아마테라스의 남동생이라는 형태로 편입되었을 것이라는 학설을 제기하고 있다. 이 학설이 맞다면 오오쿠니누시는 한반도계였음이 틀림없다. 역사학자들도 이즈모 일대에 진한(辰韓)-신라(新羅) 계통의 이주민들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것이 이즈모 바닷가의 히노미사키 등대(日御碕灯台)와 히노미사키 진쟈(日御碕神社) 근처에 있는 가라카미시라기 진쟈(韓神新羅神社), 가라시마 진쟈(韓島神社), 가라쿠니 진쟈(韓國神社)이다. 히노미사키 진쟈의 제신 스사노오는 바로 일본 도래인의 신이기도 하다. 


733년에 나온 '이즈모후도키(出雲風土記)'의 오우 군(意宇郡) 조에 신라-히노미사키(日御碕)와 관련된 신화가 나온다. 거인신(巨人神) 야츠카미즈오미츠노노미코토(八束水臣津野命)는 이즈모가 작고 좁다고 생각했다. 거인신은 시마네 반도에 서서 큰 쟁기를 신라 땅에 꽂아 잘라낸 다음 굵은 어망줄로 끌어당겨 이즈모에 갖다 붙였다. 이 땅이 바로 지금의 히노미사키라는 것이다. 히노미사키를 고정하기 위해 세운 말뚝이 지금의 산베 산(三甁山, 1,126m)이라고 한다. '이즈모후도키'에는 산베 산이 사히메야마(佐比売山)로 되어 있다. 이때 사용한 어망줄은 지금의 나가하마 해안(長浜海岸)에 해당된다고 한다. 신라인들이 도래하면서 그 문화도 함께 들어온 역사적 사실이 거인신 야츠카미즈오미츠노노미코토가 신라 땅을 끌어다 이즈모에 붙였다는 신화로 변용된 것임을 시사한다. 이처럼 이즈모의 나가하마 해안과 그 바로 북쪽의 이나사노하마 해안(稲佐の浜)은 일본 국토 유인 신화의 주무대이다. 


이즈모타이샤는 역사적으로 2천여 년 전에 세워졌다고 한다. 1142년에 나온 '자이조칸진 해장(在庁官人解状)'에는 이즈모타이샤가 '天下無双之大廈, 国中第一之霊神(천하무쌍의 큰 신사, 국내 제일의 신령)'이라고 했다.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때 사격(社格) 제도가 실시되면서 일본에서 유일하게 타이샤(大社)라는 명칭을 쓴 신사가 되었다. 다이쇼 시대(大正時代, 1912~26)에는 제례를 즈음해 덴노(天皇)가 칙사를 보내는 초쿠사이샤(勅祭社)가 되었다. 주제신(主祭神)은 신중의 신이라고 하는 오오쿠니누시이다. 그 전에는 아마테라스의 후손 가무스사노오노미코토(神須佐能袁命)를 모셨다. 


이즈모타이샤의 경내 면적은 약 16만㎡이다. 이즈모타이샤는 주신을 모신 혼덴(本殿), 일반인들이 참배하는 하이덴(拝殿), 호모쓰덴(寶物殿)인 신코덴(神祜殿), 동서(東西) 쥬쿠샤(十九社)를 비롯해서 8개의 셋샤(攝社), 3개의 맛샤(末社)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셋샤는 경내 및 경외에 본사와 특별히 연고가 깊은 신을 모신 진쟈, 맛샤는 셋사에 모시지 않은 연고신을 모신 부속 진쟈이다.


이즈모타이샤 혼덴은 1744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진쟈 건축 양식인 타이샤즈쿠리(大社造) 양식을 따라 재건축된 것이다. 타이샤즈쿠리는 이세진구(伊勢神宮)의 신메이즈쿠리(神明造)와 더불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진쟈 건축 양식이다. 혼덴은 2008년 초부터 수리에 들어가 2013년 5월에 완료되었다. 혼덴은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이즈모타이샤는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가네노도리이를 지나면 처음 만나는 건물이 하이덴이다. 하이덴은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1338~1573) 에이쇼(永正) 16년(1519)에 이즈모슈고다이(出雲守護代) 아마고 쓰네히사(尼子経久)의 발원으로 창건되었다. 하이덴은 1953년 화재로 소실된 후 1959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하이덴을 오카리덴(御仮殿)이라고도 한다. 오카라덴은 혼덴을 다시 지을 때 제신의 신체를 임시로 모셔 놓는 건물이다. 이즈모타이샤 혼덴은 2008년부터 재건축에 들어가 2013년에 완공되었다. 그동안 제신 오오쿠니누시의 신체는 하이덴으로 옮겨져 봉안되었다.  


혼덴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참배객들은 하이덴에서 참배를 해야 한다. 이즈모타이샤는 연인들의 성지, 오오쿠니누시는 인연을 맺어주는 신으로도 유명하다. 에도 시대 이래 일본인들은 오호쿠니누시를 남녀 간의 사랑을 맺어주는 신으로 모셔왔다. 일본인들 사이에는 이즈모타이샤가 남녀 간의 애정과 인연에 효험이 있다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인지 연간 200만명 이상의 참배객들이 이즈모타이샤를 찾는다고 한다. 


하이덴에서 참배할 때는 두 번 절하고 네 번 박수를 친 다음 다시 한 번 절한다(2배-4박수-1배). 두 번의 박수는 자신, 나머지 두 번은 미래의 연인을 위한 것이다. 다른 진쟈의 참배 방식은 보통 두 번 절하고 두 번 박수를 친 다음 다시 한 번 절을 한다(2배-2박수-1배)


하이덴(拝殿)의 시메나와(注連縄)


하이덴의 처마에는 길이 8m, 둘레 3m, 무게 1.5톤의 거대한 시메나와(注連縄)가 걸려 있다. 시메나와는 액운(厄運)과 잡귀(雜鬼)의 출입을 막는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부정을 막기 위해 문이나 길 어귀, 신성한 대상물에 매는 새끼줄인 금줄(禁绳)과 같다. 


다른 진쟈들과는 달리 이즈모타이샤의 시메나와는 왼쪽으로 꼬아져 있다. 이즈모타이샤에서는 왼쪽을 상위(上位)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즈모타이샤 혼덴의 신단에는 주신의 신체가 가장 왼쪽에 모셔져 있다. 일본인들 사이에는 이즈모타이샤의 시메나와 밑둥에 동전을 던져서 꽂히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있다.  


야츠아시몬(八足門) 앞의 참배 행렬


하이덴 뒤편 일본의 국보 혼덴으로 들어가는 정문격인 야츠아시몬(八足門)에는 참배객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마침 12월 23일은 아키히토(明仁, 1933년 12월 23일~ ) 덴노의 탄신일이어서 이즈모타이샤 혼덴 참배가 특별히 허용되었다고 한다. 참배객들은 중문격인 로몬(楼門)까지만 들어가서 혼덴을 향해 참배할 수 있다고 한다. 


혼덴(本殿), 출처 구글


2001년 12월 아키히토 덴노는 기자회견에서 '칸무 덴노(桓武天皇)의 어머니가 백제(百濟) 무령왕(武寧王)의 자손이라고 쇼쿠니혼기(続日本紀)에 기록돼 있는 사실에 한국과 인연을 느낀다'고 공식적으로 발언했다. 아키히토 덴노의 발언을 들은 일본 관료들과 기자들은 모두 깜짝 놀라 뒤로 나가자빠졌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이튿날 일본 매스컴에는 아키히토 덴노의 발언은 단 한 마디도 보도되지 않았다. 천황가가 백제 왕실의 후예라면 일본이 조상의 나라를 침략하고 식민지 지배를 했다는 사실이 일본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본 덴노케(天皇家)가 백제 왕실의 후예라는 것은 이미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이 문제를 풀지 않는 한 한일관계는 더 이상 진전되기 어렵다고 본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솔직한 사죄와 반성, 배상을 하면 될 일이다.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위해서라도 결자해지(結者解之)하는 일본인들의 대승적인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혼덴의 지붕 위 양끝에는 X자형으로 교차시킨 기다란 목조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이것을 치기(千木)라고 한다. '고지키'에 치기의 유래가 나온다. 오호쿠니누시는 나라를 넘겨줄 때 한 가지 조건을 내세우면서 '아시하라노나카츠쿠니(葦原中國)는 천손의 명령대로 바치겠습니다. 다만 내가 거주할 곳만은 천손이 덴노의 지위를 계속 이어가는 훌륭한 궁전처럼 땅 속의 반석에다 두텁고 큰 기둥을 세우고 다카마가하라를 향해 치기(千木)를 높이 세운 신전을 만들어 준다면, 나는 멀고 먼 구석진 곳에 숨어 있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웅장한 신사를 세워 자신을 제사지내게 해 달라는 요구였다. 오호쿠니누시가 내건 조건을 수용한 아마테라스는 웅대한 신사를 세워 아들 아메노호히노미코토(天之穂日命)로 하여금 제사장을 맡아 봉사하도록 했다. 


이즈모타이샤의 제사장은 창건 이래 아메노호히노미코토의 후손인 이즈모고쿠소 가(出雲国造家)에서 대대로 세습하여 맡고 있다. 이즈모고쿠소 가는 고대에 이즈모 지방을 지배했던 대표적인 호족이었고, 중세 난보쿠초 시대(南北朝時代, 1336~1392)에 와서 센게 가(千家家)와 기타시마 가(北島家)로 갈라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즈모타이샤의 동쪽에는 기타시마 가문, 서쪽에는 센게 가문의 본부가 있다. 이즈모타이샤의 제사장은 현재 센게 가문에서 담당하고 있다.


혼덴 내부 중앙에는 신노미하시라(心御柱)라는 큰 기둥이 있고, 그 주위로 8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본래 혼덴은 매우 크고 아름다운 건물로 큰 기둥을 박아넣어 높이 100m에 가까운 계단 위에 세워졌다고 한다. 당시 이 기둥은 48m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지금의 건물은 1744년에 수리한 것으로 높이는 24m에 이른다.  

     

야츠아시몬(八足門)


1667년에 창건된 야츠아시몬은 2004년 7월 6일 중요문화재로 등록되었다. 티셔츠, 청바지, 반바지(남자), 민소매 시스루, 미니 스커트(여자)를 입거나 샌들을 신은 참배객들은 야츠아시몬을 들어갈 수 없다. 

 

야츠아시몬 바로 서쪽 곁에 붙어 있는 건물은 오마모리쇼(御守所)다. 오마모리(御守)는 부적(符籍)이다. 여기서 부적이나 호부(護符) 등을 판매한다. 오마모리에는 신(神), 불(佛)의 명칭이나 특수한 문자, 기호 등이 쓰여 있다. 나무 조각이나 나뭇잎 같은 것도 오마모리가 될 수 있다. 일본인들은 오마모리에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는 믿음이 있다.


칸사이로(観祭楼)


야츠아시몬 동쪽 바로 곁에는 2004년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칸사이로(観祭楼)가 있다. 칸사이로는 에도 시대 전기인 1667년 로몬(楼門)과 함께 세워졌다. 1774년 이즈모타이샤를 조영(造営)할 때 해체되어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칸사이로는 2층 건물로 되어 있다. 1층은 회랑(回廊)이고, 2층에는 위아래로 열리는 문과 난간이 설치된 2개의 다다미방이 있다. 옛날 쵸테이(朝廷)이나 바쿠후(幕府)의 인사, 한(藩)의 중신이 방문했을 때 칸사이로 2층에서 제례나 축제를 구경했다. 


칸사이로 남쪽 바로 앞에는 일본 전국 각지의 주조회사에서 보내온 사케(酒) 단지들이 쌓여 있다. 맥주를 보내온 주류회사도 있다. 이즈모타이샤에서 미키(祭酒)로 선택된 사케는 큰 영예일 뿐만 아니라 브랜드 가치도 많이 올라간다고 한다. 


덴노(天皇)의 하사금(下賜金)과 각 궁가(宮家)의 신센료(神饌料) 표지판, 출처 구글


칸사이로 앞에는 카시카시킨(下賜金)을 보낸 일본 덴노, 신센료(神饌料)를 보낸 각 미야케(宮家)와 가문의 명단을 적은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제사를 지낼 때 신에게 바치는 공물(供物)을 헤이하쿠(幣帛), 이 가운데 음식물을 신센(神饌), 신센 중에서 술을 미키 또는 신슈(神酒)라고 한다. 


현 덴노 헤이카(天皇陛下)는 1990년 11월 즉위한 일본 제125대 헤이세이 덴노(平成天皇) 아키히토다. 1989년 제124대 쇼와 덴노(昭和天皇) 히로히토(裕仁)의 죽음으로 황위를 계승하고 연호를 헤이세이(平成)로 고쳤다. 별칭은 쓰구노미야(繼宮)다. 1952년 가쿠슈인(學習院) 고등과를 졸업하고, 그해에 황태자가 되었다. 1953년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대관식 참석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을 순방하였다. 1956년 가쿠슈인 대학 정경학부를 수료하고, 1959년 쇼다 미치코(正田美智子)와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나루히토(徳仁, 1960~ ), 후미히토(文仁, 1965~ ), 딸 구로다 사야코(黑田淸子, 1969~ ) 등 2남 1녀를 두었다. 구로다 사야코의 결혼 전 이름은 노리노미야 사야코(紀宮清子)이다. 


아키히토 덴노는 2019년 4월 30일 퇴위하고, 그 다음날인 5월 1일 나루히토 황태자가 일본의 새로운 덴노로 즉위하게 된다. 덴노가 생전에 퇴위하는 것은 20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아키히토 덴노는 평화 헌법을 개정해 군대를 보유하고, 상징적인 존재인 덴노를 다시 신격화하려는 일본 정치권 내 극우보수화 움직임에 제동을 걸기 위해 퇴위를 결심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키히토 덴노는 정말 훌륭한 덴노다. 


다카마도노미야(高円宮)는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신노(三笠宮崇仁親王)의 제3남이자 제123대 다이쇼 덴노(大正天皇) 요시히토(嘉仁)의 코손(皇孫)인 노리히토 신노(憲仁親王)가 쇼와(昭和) 59년(1984년) 12월 6일에 창설한 미야케이다. 노리히토(憲仁)는 아키히토 덴노의 사촌동생으로 2002년에 세상을 떠났다. 신노는 덴노의 형제와 오지(皇子)를 일컫는 말이다. 다카마도노미야는 1947년(쇼와 22) 10월 15일 이후 첫 지키미야케(直宮家) 외에 창설된 미야케이다. 현재의 당주는 노리히토 신노우히 히사코(憲仁親王妃久子)이다. 다카마도노미야는 도쿄 도(東京都) 미나토 구(港区) 모토아카사카(元赤坂) 2-1-6번지 아카사카 어용지(赤坂御用地)에 있다.


2014년 10월 5일 이즈모타이샤에서 이 타이샤의 대신관 센게 다카마사(千家尊祐)의 장남이자 신관인 센게 구니마로(千家國麿, 40)와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신노의 차녀 다카마도노미야 노리코 죠오(高円宮典子女王, 25)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평민에게 시집간 노리코 죠오는 황실전범에 따라 황족의 지위를 잃고 평민 센게 노리코(千家典子)가 되었다. 센게 노리코는 일본 정부로부터 약 1억 675만 엔(약 10억 4,000만원)의 지참금을 받았으며, 시마네 현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하지만 2017년 12월 7일 잡지 슈칸신초(週刊新潮)에 두 사람의 부부관계가 이미 파탄났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구니마로는 신관 직책도 수행하지 못하고 1년 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며, 평민이 된 노리코는 친정인 도쿄의 다카마도노미야에 주로 머무르고 있다고 한다.


가쓰라노미야(桂宮)는 106대 오기마치 덴노(正親町天皇) 미치히토(方仁)의 장남 사네히토 신노(誠仁親王)의 6남 토시히토 신노(智仁親王)를 시조로 한다. 토시히토(智仁)는 애초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양자가 되었다. 하지만 히데요시에게 아들이 태어나자 토시히토는 히데요시로부터 저택 등을 받아 새로이 일가를 이루게 되었다. 토시히토가 세운 별장이 교토에 위치한 가쓰라리큐(桂離宮)이다. 본궁은 지금의 이마테가와(今出川) 거리에 있으나, 별궁인 가쓰라리큐가 교토 하치조(八条)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하치조노미야(八条宮)라는 궁호를 썼다.


5대 당주 나오히토 신노(尚仁親王)는 후계자가 없어서 112대 레이겐 덴노(霊元天皇) 사토히토(識仁)의 아들 사쿠노미야(作宮)가 계승하면서 궁호를 토키와이노미야(常磐井宮)로 개칭했다. 사쿠노미야가 어린 나이로 죽자 그의 형인 아야히토 신노(文仁親王)가 계승하여 궁호를 다시 쿄코쿠노미야(京極宮)로 개칭했다. 9대 당주 킨히토 신노(公仁親王)가 죽은 뒤 당주 자리는 한동안 공석이 되었다. 이후 제119대 고가쿠 덴노(光格天皇) 도모히토(兼仁) 또는 모로히토(師仁)의 아들 타케히토 신노(盛仁親王)가 10대 당주로서 이를 계승하여 궁호를 가쓰라노미야(桂宮)로 변경했다. 하지만 타케히토(盛仁)도 어린 나이에 죽어서 당주 자리는 또 공석이 되었다. 이에 타케히토의 형인 120대 닌코 덴노(仁孝天皇) 유타노미야 아야히토(寛宮恵仁)의 아들 미사히토 신노(節仁親王)가 당주 자리를 계승했으나 역시 어린 나이로 죽어서 또 공석이 되었다. 1862년에 미사히토(節仁)의 이복누나인 스미코 나이신노(淑子內親王)가 12대 당주가 되었고, 1881년 그녀의 사망과 함께 가쓰라노미야는 단절되고 말았다. 가쓰라노미야의 후손은 2대 당주 토시타다 신노(智忠親王)의 동생인 히로하타 타다유키(広幡忠幸)가 일으킨 히로하타(広幡) 가문으로 현존하고 있다. 하지만 히로타다 가문도 남계(男係) 후손은 단절된 상태이다.


일명 신 가쓰라노미야(新桂宮)가 있다. 1988년 다이쇼 덴노의 4남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신노(三笠宮崇仁親王)의 차남 요시히토 신노(宜仁親王)가 독신으로 가쓰라노미야케(桂宮家)를 창설했다. 다만 이것은 요시히토(宜仁)의 상징인 가쓰라(桂)에서 딴 것에 불과하여 옛 세습신노 가와는 이름만 같을 뿐 재산이나 제사를 이어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요시히토의 가쓰라노미야는 큰아버지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신노(高松宮宣仁親王)가 맡던 일을 이어받은 것이어서 굳이 따지자면 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 계통이라고 할 정도이다. 신 가쓰라노미야도 2014년 요시히토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단절되었다. 요시히토는 아키히토 덴노의 사촌동생으로 생전에는 덴노 계승서열 순위 7위였다. 


아키코 죠오(彬子女王)는 미카사노미야 아키코 죠오(三笠宮彬子女王, 1961~ )를 말한다.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신노의 장남이자 아키히토 덴노의 사촌동생 토모히토 신노(寬仁親王)의 장녀다. 그러니까 아키히토 덴노의 5촌 조카가 된다. 어머니는 노부코(信子) 비이다. 외삼촌은 아소 다로(麻生太郞, 1940~ ) 전 총리이며, 외숙모 아소 치카코(麻生ちか子)는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1911~2004) 전 총리의 딸이다. 외할머니 아소 카즈코(麻生和子)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1878~1967) 전 총리의 딸이다. 카즈코의 외할아버지는 화족(華族)으로 내대신(內大臣)을 지낸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顕, 1861~1949)이다. 노부아키는 황도파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로 일어난 2.26 사건 당시 외손녀 카즈코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 노부아키는 본래 메이지 시대 최고 권력자(사실상의 총리)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1830~1878)의 차남인데, 마키노(牧野) 가문에 양자로 입양되어서 마키노 노부아키가 된 것이다. 


친가는 황실, 외가는 일본 최고의 명문가이니 아키코는 그야말로 금수저 중 금수저라고 할 수 있다. 아키코는 가쿠슈인 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로 유학을 떠나 일본 미술사를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일본 황실 최초의 여성 박사인 아키코는 2016년 고쿠가쿠인(國學院) 대학의 특별초빙교수로 취임했다. 


아키코는 어머니 노부코 비와 상당히 소원한 관계라는 것이 알려졌다. 그동안 독자적인 미야케(宮家) 대우를 받던 토모히토 신노케(寬仁親王家)는 본가인 미카사노미야(三笠宮)로 복귀하는 형태로 사라졌다. 노부코 비가 미야케의 당주 대우를 받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아키코는 미카사노미야케(三笠宮家)를 지키기 위해 평생 독신으로 살 생각이라고 밝힌 바 있다. 남성 황손은 평민 여성과 결혼해도 황족 신분을 유지하여 황족 가문(미야케)을 계승하거나 창설할 수 있지만, 여성 황손은 남성 황족과 결혼하지 못하면 신분이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키코와 그녀의 여동생 요코 죠오(瑤子女王)가 결혼한다면 노부코 비가 사망하는 즉시 미카사노미야케는 폐문된다. 하지만, 두 자매가 결혼하지 않고 황실에 머물러 있으면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미카사노미야케는 유지될 수 있다. 


히타치노미야(常陸宮)의 당주는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신노(常陸宮正仁親王, 1935~ )이다. 쇼와 덴노의 2남, 아키히토 덴노의 친동생이다. 원래 궁호는 요시노미야(義宮)였다. 2018년 현재 황위 계승 순위 4위이다. 조지 워싱턴 대학 명예박사, 미네소타 대학 명예박사이며, 독일 암학회 명예회원이다.


마사히토(正仁)는 1958년에 가쿠슈인 대학 이학부 화학과를 졸업하고 도쿄 대학 대학원 이학연구과에 연구생으로 들어가 동물학을 전공했다. 1964년 쓰가루 하나코(津軽華子)와 결혼했으며, 결혼과 동시에 새로운 신노케인 히타치노미야를 열었다. 1969년부터 재단법인 일본 암연구회 암연구소 객원 연구원으로 있다가 2001년 1월 암연구회 명예총재가 되었다.


아키시노노미야(秋篠宮) 당주는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신노(秋篠宮文仁親王, 1965~ )이다.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코고(美智子皇后)의 차남이다. 아명은 아야노미야(礼宮), 궁호는 황실의 옛 땅인 야마토 북서부의 아키시노(秋篠)에서 유래했다. 후미히토(文仁)가 사용하는 도장의 문양은 매화나무이다.


후미히토는 1984년 가쿠슈인 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1996년에는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조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 가와시마 기코(川島紀子)와 결혼하여 장녀 마코 나이신노(眞子内親王), 차녀 가코 나이신노(佳子内親王), 장남 히사히토 신노(悠仁親王) 등 1남 2녀를 두었다. 후미히토는 현재 나루히토에 이어 황위 계승 2순위이다. 여동생인 구로다 사야코의 남편 구로다 요시키(黒田慶樹)와는 가쿠슈인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로 알려져 있다.


후미히토는 야마시나조류연구소(山階鳥類研究所) 총재, 일본동물원수족관협회(日本動物園水族館協会) 총재, 세계자연보호기금재팬(世界自然保護基金ジャパン) 명예총재, 일본테니스협회(日本テニス協会) 명예총재, 일란협회(日蘭協会) 명예총재이다. 방계 황족 가문인 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류 서도(書道)의 전승자이기도 하다. 아키시노노미야는 도쿄도 미나토 구 모토아카사카 2가의 아카사카 용무지 안에 있다. 1997년 3월부터는 구(舊) 지치부노미야(秩父宮)을 사용하고 있다.


다케다 가(竹田家)의 기원은 1903년(메이지 39)에 다케다노미야 쓰네히사 오(竹田宮恒久, 1882~1919)가 창설한 다케다노미야(竹田宮)이다. 쓰네히사(恒久)는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신노(北白川宮能久親王)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메이지 덴노의 황녀 마사코 나이신노(昌子内親王)와 결혼했다.   


기타시라카와 가(北白川家)의 기원은 메이지 시대 초기에 후시미노미야(伏見宮)의 사토나리 신노(智成親王)가 창설한 타시라카와노미야(北白川宮)이다.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신노(伏見宮邦家親王)의 13남 사토나리(智成)는 1866년에 출가했다가 메이지 유신 직후인 1868년에 다시 환속하여 기타시라카와노미야를 창설하였다. 5대 당주 기타시라카와 미치히사(北白川道久)의 여동생 하쓰코(肇子)는 당시 아키히토 황태자비 후보, 장녀는 나루히토 황태자비 후보에 오른 적이 있다.


히가시쿠니 가(東久邇家)의 기원은 메이지 시대 후기 구니노미야(久邇宮)의 나루히코 오(稔彦王)가 개창한 히가시쿠니노미야(東久邇宮)이다. 구니노미야 아사히코(久邇宮朝彦)의 9남 나루히코(稔彦)는 당시 황실 관례에 따라 일본 제국 육군에서 복무하여 대장까지 올랐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자 나루히코는 쇼와 덴노의 부탁으로 헌정 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황족 내각을 출범시켰다. 제43대 총리로 취임한 그는 전후처리에 주력하였다. 히가시쿠니노미야는 구황족 중에서 현재의 덴노 가와 가장 혈연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구황족 복귀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항상 유력한 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아사카 가(朝香家)의 기원은 메이지 시대 후기 구니노미야(久邇宮)의 야스히코 오(鳩彦王)가 창설한 아사카노미야(朝香宮)이다. 구니노미야 아사히코의 8남 야스히코(鳩彦)는 프랑스에 유학한 뒤 군인이 되어 육군 대장까지 올랐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망이 임박했음에도 강력하게 항전을 주장했다. 


구니 가(久邇家)의 기원은 메이지 시대 전기 후시미노미야(伏見宮)의 아사히코 오지(朝彦王子)가 창설한 구니노미야(久邇宮)이다.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신노의 4남 아사히코(朝彦)는 출가하였다가 1863년에 환속하였다. 원래 나카가와노미야(中川宮)라는 궁호를 받았으나, 1875년에 구니노미야로 바꿨다. 그는 에도 바쿠후 말기와 메이지 유신 사이의 격동기를 생생하게 증언한 '아사히코 신노 일기(朝彦親王日記)'를 썼다. 3대 당주 아사키라(朝融)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해군 중장까지 승진하였다. 구니노미야는 고준 코고(香淳皇后)를 배출한 가문이었지만, 가장 많은 수의 황족이 이탈당한 가문이기도 했다.


후시미 가(伏見家)의 기원은 난보쿠초 시대(南北朝時代) 보쿠초(北朝)의 스코 덴노(崇光天皇)의 제1황자 요시히토(栄仁)가 개창한 후시미노미야(伏見宮)이다. 요시히토는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의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의 반대로 황위를 계승하지 못하자 후시미노미야를 창설했다. 후시미노미야는 가쓰라노미야(桂宮), 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 간인노미야(閑院宮)와 더불어 4대 세습신노 가(世襲親王家) 중 하나이다. 이들은 오(王) 대신 신노(親王)의 호칭을 사용하고 황위 계승권에서도 우선권을 가졌으며, 현재의 일본 황실도 후시미노미야 계통이다.


3대 당주 사다후사(貞成)의 아들이 제102대 고하나조노 덴노(後花園天皇)로 즉위한 이후 후시미노미야는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계속 유지해 나갔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각종 황실 미야케들은 대부분 후시미노미야 가문의 계통이다. 23대 당주 히로야스(博恭)는 러일 전쟁 당시 일본 제국의 장군으로 출전하기도 하였다. 마지막 당주인 히로아키 오(博明王)는1947년(쇼와 22)의 신적강하로 황적을 이탈한 뒤 후시미 씨(伏見氏)를 자칭했다.


니시쥬쿠샤(西十九社)


혼덴의 동쪽에는 히가시쥬쿠샤(十九社), 서쪽에는 니시쥬쿠샤(西十九社)가 있다. 동서 각 건물에 문이 19개씩 달려 있다고 해서 쥬쿠샤(十九社)라는 이름이 붙었다. 동서 쥬쿠샤는 이즈모타이샤의 맛샤((末社)로 에도 시대 초기인 1661~1672년 무렵에 세워졌다. 지금의 니시쥬쿠샤는 1744년, 히가시쥬쿠샤는 1748년에 재건축된 것이다. 건축 양식은 나가레즈쿠리(流造)이다. 나가레즈쿠리는 지붕에 물매를 두어 앞면을 뒷면보다 길게 경사지게 한 진쟈 건축의 한 양식이다. 지붕은 노송나무 껍질을 이어서 만든 히와다부키(檜皮葺)이다. 두 쥬쿠샤는 2004년에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음력 10월이 되면 일본 전역에서 800만의 신들이 남녀의 인연을 맺어주기 위해 이즈모타이샤에 집결한다. 전국의 신들이 이즈모타이샤에 모이는 음력 10월을 이즈모에서는 '신이 있는 달'이라고 하여 '가미아리즈키(神在月)'라고 부른다. 다른 지방에서는 '이즈모타이샤에 모이느라 신이 없는 달'이라고 하여 '간나즈키(神無月)'라고 부른다.


음력 10월 10일 밤 오후 7시부터 800만의 신들을 영접하는 의식인 가미무카에신지(神迎神事)가 이즈모타이샤에서 서쪽으로 1km 떨어진 이나사노하마(佐の浜)에서 거행된다. '하마(浜)'는 해변의 모래밭을 말한다. 이때 800만의 신들을 영접하는 주인격 신이 바로 이즈모타이샤의 주제신인 오오쿠니누시이다. 가미무카에신지에 이어 이즈모타이샤 카구라덴(神楽殿)에서는 800만의 신들을 환영하는 가미무카에사이(神迎祭)가 봉행된다.    


이나사노하마를 통해 상륙한 800만의 신들은 이즈모타이샤에서 가미하카리(神議)를 연다. 가미하카리는 남녀의 인연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결연에 대해 누구와 누구를 맺어줄 것인가를 논의하는 신들의 회의이다. 가미하카리를 한 뒤 800만의 신들은 동서 쥬쿠샤에서 숙박한다. 이즈모타이샤가 일본 신들의 고향이라면, 동서 쥬쿠샤는 신들의 숙소인 셈이다. 


가미무카에사이 다음날인 음력 10월 11일부터 17일까지 이즈모타이샤에서는 가미아리사이(神在祭)가 열린다. 가미아리사이 기간 동안 이즈모 주민들은 결혼이나 건축, 토목공사, 재봉, 이발은 물론 심지어 노래를 부르거나 손톱을 깎는 것까지 삼가하면서 근신한다. 그래서 가미아리사이를 오이미마츠리(御忌祭)라고도 한다.


첫째 날 오전 9시에는 혼덴에서 가미아리사이를 거행한다. 가미아리사이 때 대접한 음식이 진자이모치(神在餅)라는 떡이었다. 진자이는 젠자이(ぜん-ざい)로 변해 교토로 전해졌고, 이후 일본 전국으로 퍼졌다고 한다. 오전 11시에는 카구라덴에서 류자진코타이사이(龍蛇神講大祭)가 열린다. 류자진코타이사이에 참여하려면 류자진코(龍蛇神)에 가입해야 한다. 입회비는 5,000엔, 연회비는 3,000원이다. 다섯째 날과 마지막 날 이틀은 오전 10시 혼덴에서 가미아리사이와 엔무스비타이사이(縁結大祭)가 동시에 거행된다. 엔무스비타이사이에 참여하려면 5,000엔의 기도 요금을 내야 한다. 마지막 날 오후 4시에는 하이덴에서 카라사데사이(神等去出祭)가 봉행된다. 카라사데사이는 회의를 마친 800만의 신들을 떠나보내는 송별제다. 첫째 날부터 6일 동안 매일 오후 7시에는 카구라덴에서 가미아리사이 요카구라키도(夜神樂祈禱)가 행해진다. 요카구라(夜神樂)는 무악(舞樂)을 올리며 신에게 지내는 밤제사이다.  


3월 28일 오전 9시에는 쥬쿠샤에서 키노에네마츠리(甲子祭)가 열린다. 키노에네마츠리는 갑자날 밤에 시키후쿠진(七福神) 중 하나인 다이코쿠텐(大黒天)을 제사 지내는 축제다. 불교에서 다이코쿠텐은 삼보(三寶)를 사랑하고 음식을 넉넉하게 하는 신이다. 신도(神道)에서 다이코쿠텐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쌀섬 위에 올라서 요술 방망이와 큰 자루를 가진 복덕(福德)의 신이다. 


다이코쿠텐의 기원은 원래 고대 인도의 무신(武神) 마하칼라(Mahakala, 摩訶迦羅, 莫訶哥羅)이다. 인도 신화에 나오는 시바(Shiva)의 한 부분인 칼라(Kala)가 불교에 도입되어 생긴 신이다. 티베트 불교에서 마하칼라는 사나운 여덟 수호신(八部神將, 八部神衆) 가운데 하나다. 불교에 수용된 마하칼라가 일본에 들어온 뒤 다이코쿠텐과 습합되어 행복을 가져다 주는 후쿠진으로서 일본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일본의 동요 가사에 나오는 '커다란 보따리를 어깨에 멘 다이코쿠텐님이 오시네/여기 이나바의 흰토끼/껍데기가 홀랑 벗겨진 벌거숭이라네'처럼 일본인들에게 오오쿠니누시는 다이코쿠텐과 동일한 신격으로 여겨지고 있다. 다이코쿠텐의 '다이코쿠(大黒)'와 오오쿠니누시의 '다이코쿠(大國)'가 한자식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신도의 신과 불교의 신을 동일시하는 것을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고 한다. 신불습합은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説)이 체계화된 것이다. 본지수적설은 부처나 보살이 중생구제를 위해 일시적인 신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난다는 설이다. 일본인들은 부처나 보살이 일본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일본의 신이 되었다고 본다. 


신보쿠(神木, しんぼく)


니시쥬쿠샤 뒤편에는 수백 년 묵었음직한 아름드리 스기나무(杉)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가장 굵은 스기에 둘러쳐진 대나무 발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단자쿠(短冊)들이 걸려 있었다. 인연의 신에게 소망이 전달되기를 바라면서 단자쿠를 신보쿠(神木)에 걸어 놓았을 것이다. 에도 시대 이래 일본인들 사이에 신들이 이즈모에 집결하는 음력 10월에 이즈모타이샤에서 기원을 하면 남녀의 사랑과 인연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널리 퍼졌다. 이즈모타이샤가 연인들의 성지가 된 것은 바로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예로부터 일본인들은 남녀의 결합과 인연은 신불(神佛)의 뜻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고 여겼다. 이후 불교가 전래되면서 일본인들 사이에 부부의 결합은 전생의 인연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진쟈에서도 신관이 남녀의 이름을 각각 쓴 종이를 서로 합쳐서 인연을 점치거나, 마음 속으로 사랑하는 이성의 이름을 단자쿠에 적어 진쟈 경내의 신보쿠에 매달아 기원하는 풍습이 전국적으로 행해졌다. 일본 전국의 진쟈에 가면 남녀의 인연이 맺어지기를 기원하는 단자쿠가 신보쿠에 걸려 있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 카구라덴(神楽殿)


니시쥬쿠샤에서 서쪽으로 통하는 문을 나서면 바로 카구라덴(神楽殿)이다. 카구라덴은 1981년에 키리즈마즈쿠리(切妻造), 츠마이리(妻入り)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키리즈마즈쿠리는 우리나라의 맞배지붕과 유사한 형태이고, 츠마이리는 건물의 짧은 면 혹은 지붕 용마루와 직각인 면에 정면 출입구가 배치되는 양식이다. 카구라덴은 카구라(神楽)를 연주하는 전각이다. 카구라는 신에게 바치는 일본의 전통 춤과 음악, 가면극 등을 말한다. 


카구라덴 처마에도 거대한 시메나와가 걸려 있다. 이 시메나와는 길이 13.5m, 가장 굵은 곳의 둘레 8m, 무게 5.2톤으로 일본 최대 규모이다. 시메나와는 5~6년마다 교체한다. 지금의 시메나와는 2018년 7월 17일에 바꾼 것이다. 시메나와 밑둥을 보면 많은 동전들이 꽂혀 있다. 행운을 바라는 일본인들이 꽂아 넣은 동전들이다. 이즈모타이샤의 신관들은 사람들이 동전 던지는 것을 보면 '시메나와가 아파해요'라면서 말린다.   


이즈모타이샤는 종교법인 이즈모타이샤교(出雲大社敎)의 종사(宗祠)이기도 하다. 이즈모타이샤교는 제8대 이즈모고쿠소 센게 타카토미(千家尊福, 1841~1918)가 창시한 신흥종교이다. 센게 타카토미는 남녀 간 인연에 대해 '인생의 가장 큰 중대사인 결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인 유사(幽事)에 속한 것이다. 유사를 관장하는 신은 오오쿠니누시다. 따라서 남녀 간 인연은 오오쿠니누시가 정해준다'는 교의를 체계화시켰다. 이 교의에 따라 이즈모타이샤 카구라덴은 결혼식장으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카구라덴에서 많은 결혼식이 열리면서 일본인들 사이에 오오쿠니누시는 남녀 간의 인연과 사랑의 신으로 더욱 친근한 존재로 자리잡았다. 이즈모타이샤 외에도 이즈모의 신을 모시는 진쟈에서는 대부분 경내에 결혼식장이 있다.


국기게양탑


카구라덴 앞에는 일본 최대의 국기게양탑(国旗掲揚塔)이 세워져 있다. 국기게양탑은 보주(寶珠)까지의 높이가 47m이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85) 이즈모타이샤 혼덴은 그 높이가 48m였다. 게양탑은 그보다 1m 낮은 47m 높이로 세운 것이다. 오오쿠니누시가 거하는 혼덴보다 게양탑이 높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게양탑 건립에 시용된 공법은 프리캐스트 콘크리트(precast concrete) 공법이다. 게양탑 밑에는 지름 0.5m, 길이 10m의 기초 말뚝이 8개나 묻혀 있다. 이 게양탑은 2003년 '시마네 현 삼림조합 연합회'에서 기증했다. 게양탑에 거는 닛쇼키(日章旗, 日の丸の旗)는 가로 13.6m, 세로 9m이다. 


참고로 지금의 이즈모타이샤 혼덴의 높이는 24m이다. 그래서 일본 전국 진쟈의 도리이(鳥居) 높이는 23m를 넘지 않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이즈모타이샤 4개의 도리 중 가장 크다는 우가바시노오오도리이도 높이가 23m이다. 이즈모타이샤 혼덴보다 도리이가 높으면 불경(不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와카야마 현(和歌山県) 다나베 시(田辺市) 나카스(中州)의 구마노혼구타이샤(熊野本宮大社) 옛터에 있는 오오유노하라(大齋原)라는 이름의 도리이는 그 높이가 무려 33.9m에 이른다. 이는 이즈모타이샤의 권위에 도전하는 높이다. 모시는 주신이 다르기 때문일까? 구마노혼구타이샤에서 모시는 주신은 중국 당나라 텐타이산(天台山)에서 날아왔다는 게쓰미미코노오카미(家都美御子大神)이다. 게쓰미미코노오카미의 별명이 스사노오다. 구마노혼구타이샤에서는 게쓰미미코노오카미가 미래불인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의 본지불(本地佛)이라고 본다. 신불습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쓰미미코노오카미는 태양의 사자로 불리는 야타가라스(八咫烏)를 부렸다는 것에서 태양신이라는 설도 있다. 이 신이 날아올 때 맨 처음 강 위에 진좌(鎭座)하였다는 것에서 수신(水神)이라는 설도 있다. 또 목신(木神)이라는 설도 있다. 신불습합 과정에서 신의 정체성이 모호해진 것이 아닌가 한다.  


구마노혼구타이샤, 구마노하야타마타이샤(熊野速玉大社), 구마노나치타이샤(熊野那智大社)를 구마노산잔(熊野三山)이라고 한다. 구마노산잔의 중심 구마노혼구타이샤는 중세부터 귀족과 서민 등의 참배자가 많아 아리노쿠마노모우데(蟻の熊野詣)라고도 했다. 2004년 코야산(高野山) 등과 함께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 ‘키이산치노레이죠우토산케이미치(紀伊山地の霊場と参詣道)’의 일부로 등록되었다.


이즈모타이샤에 와서 일본인들의 신앙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다. 다른 나라의 국민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들의 신앙 체계를 알아야 한다. 겨울비가 내리는 가운데 이즈모타이샤를 떠나다.


2018. 1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