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아다치 미술관(足立美術館)을 찾아서 1 - 일본 근대 화가들을 만나다

林 山 2019. 2. 11. 14:15

마네 현(島根県) 이즈모 시(出雲市) 타이샤 정(大社町) 히시네(菱根)에 있는 시마네 와이너리(島根ワイナリ) 견학을 마치고 야스기 시(安来市) 후루카와 정(古川町)에 있는 아다치 미술관(足立美術館, Adachi Museum of Art, あだちびじゅつかん)으로 향했다. 비는 하루종일 오락가락 내렸다.


아다치 미술관


아다치 미술관은 1970년 실업가인 아다치 젠코(足立全康)가 개관한 개인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은 질과 양에서 일본 제일의 화가로 알려진 요코야마 다이칸(横山大観, 1868~1958)의 작품을 130여 점 가까이 소장하고 있다. 


요코야마 다이칸의 본명은 사카이 히데마로(酒井秀呂)다. 이바라키 현(茨城縣) 미토(水戶)에서 태어난 요코야마 다이칸은 도쿄미술학교에 제1회로 들어가 하시모토 가호(橋本雅邦)에게 일본화를 배우고, 근대 일본 미술에 큰 영향을 준 미술평론가 오카쿠라 가쿠조(岡倉覺三) 교장의 기대를 모았다. 졸업 후 다이칸은 1896년부터 2년 동안 모교에서 디자인을 가르쳤고, 1897년 제2회 일본회화협회전에 '무아(無我)'를 출품하여 동상을 받았다. 1898년 오카쿠라 가쿠조, 히시다 슌소(菱田春草), 시모무라 간잔(下村觀山) 등과 함께 일본미술원을 창립하였다. 하지만 일본미술원은 오카쿠라 가쿠조가 죽은 뒤 문을 닫고 말았다.  


요코야마 다이칸은 1914년에 일본미술원을 재건하고, 해마다 일본미술원전(日本美術院展, 원전)을 개최하였다. 초기에 그는 선(線)을 생략하고 색상에 무게를 두는 새로운 화풍을 일으켰지만 모로타이(朦朧體, 몽롱체)라는 혹평을 들었다. 중기 이후부터는 오카쿠라 가쿠조가 주창한 동양적 이상주의에 따라 참신한 구도와 생생한 필치로 정감이 넘치는 수묵화를 그려 일본 근대 회화의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다. 


요코야마 다이칸의 대표작에는 '무아(無我, 1897, 東京国立博物館)', '굴원(屈原, 1898, 厳島神社)', '유등(流燈, 1909, 茨城県近代美術館)', '산길(山路, 1912, 東京国立近代美術館)', '소상팔경(瀟湘八景, 1912, 東京国立博物館, 중요문화재)', '유인유여지(游刃有余地, 1914, 東京国立博物館)', '군죠후지(群青富士, 1917년경, 静岡県立美術館)', '생생유전(生々流転, 1923, 東京国立近代美術館, 중요문화재)', '밤 벚꽃(夜桜, 1929, 大倉集古館)', '오오쿠스공(大楠公, 1938, 湊川神社)', '해 뜨는 곳 일본(日出処日本, 1940, 宮内庁三の丸尚蔵館)', '어느 날의 태평양(或る日の太平洋, 1952, 東京国立近代美術館)' 등이 있다. 개인적으로 산을 좋아해서 그런지 요코야마 다이칸의 후지산(富士山) 그림이 좋았다. 


横山大観, '無我(무아, 1897)', 아다치 미술관 소장


요코야마 다이칸이 만 29살 때인 1897년에 그린 '無我(무아)'는 그의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다. '무아'는 우선 제목부터 기존의 일본화와는 다르다. 또 이 그림은 아름다운 경치를 그린 것도 아니고, 일본 역사상의 인물을 그린 것도 아니다. '무아'라는 제목의 그림은 아다치 미술관과 도쿄 국립박물관, 미즈노 미술관(水野美術館)이 각각 1점씩 소장하고 있다. 모두 같은 해에 그린 작품이지만, 분위기는 서로 상당히 다르다. 일본 우표의 도안으로 쓰인 것은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본이다. 아다치 미술관 소장본은 수수한 단채(単彩) 그림이다.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본은 일본의 어느 마을에서도 볼 수 있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를 그렸다면, 아다치 미술관 소장본은 눈과 눈썹 사이가 좁고, 전체적으로 어른스러운 모습이어서 그런지 순진하기보다는 다소 능글맞은 느낌을 준다. 바로 여기에 지금까지 일본에는 없던 새로움이 있었다. 


横山大観, '山路(산로, 1911)', 絹本彩色, 151.4×69.4cm,

横山大観 탄생 150年展


'山路(산길)'은 요코야마 다이칸이 1911년에 그린 작품이다. 이 그림의 나뭇잎은 인상파 회화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필치로 그려져 있다. 기존의 일본화는 광물(진사, 공작석, 남동석, 청금석 등)을 깨뜨려 곱게 갈아서 안료로 사용해왔다. 하지만 다이칸의 '山路(산길)'에서 사용한 파란색과 녹색 물감은 광물성 안료가 아니라 서양 물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작품은 일본화의 참신한 표현을 몽롱체와는 다른 방법으로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横山大観, '游刃有余地(유인유여지, 1914)', 横山大観 탄생 150年展


'游刃有余地(유인유여지, 1914)'는 '장자(莊子)'의 <양생주(養生主)>편에 나오는 '목무전우(目無全牛) 또는 '포정해우(庖丁解牛)' 고사를 내용으로 한 그림이다. 포정(庖丁)은 소를 잡는 달인이었다. 포정이 소를 잡는 모습은 은(殷)나라 탕왕(湯王) 때의 무악인 '상림의 춤(桑林之舞)'과 같았으며, 요(堯)임금 때의 무악인 '경수의 합주(經首之會)'와도 잘 들어맞았다. 포정은 19년 동안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여전히 금방 숫돌에 간 것처럼 날카로웠다. 그림은 소문을 듣고 찾아온 양혜왕(梁惠王, 文惠君)이 포정에게 그 비결을 묻는 장면이다. 왕을 상징하는 노란색 옷을 입은 양나라 혜왕이 진청색 도포 차림에 칼을 잡은 포정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표하고 있다. 머리털과 눈썹, 수염이 하얀 도인 풍모의 포정은 양혜왕에게 도를 전수하고 있다. 포정은 기술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에 따라 소를를 잡았기 때문에 신기(神技)에 이를 수 있었으며, 마음으로 체득하였기 때문에 도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그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경지가 곧 도인의 경지다. 포정의 말을 듣고 양혜왕은 양생의 도(養生之道)를 얻었다. 





横山大観, '생생유전(生生流轉, 1923)', 55.3 × 4,070cm, MOMAT 컬렉션


'생생유전(生生流轉)'은 요코야마 다이칸이 1923년 제10회 원전(院展)에 출품했던 대단히 긴 작품이다. 그림은 안개가 맺혀 이슬이 되고, 그 이슬이 모여 물길을 이루어 시내가 되고 강물이 되어 마침내 바다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다이칸은 이 그림을 통해서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거치는 인생유전(人生流轉)이나 생장쇠멸(生長衰滅)의 길을 걷는 자연의 이치를 표현하고자 했다. '생생유전(生生流轉)'은 수묵화의 최고 경지에 이른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생생유전(生生流轉)'은 MOMAT 컬렉션이다. MOMAT는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rt Tokyo(東京國立近代美術館)의 약자다. 도쿄 국립근대미술관 소장품을 MOMAT 컬렉션이라고 부른다. 


横山大観, '夜櫻(야앵, 1929)', 오쿠라 슈코칸(大倉集古館) 소장


'夜櫻(야앵)'은 요코야마 다이칸이 1929년에 그려 1930년 일본의 전통미를 해외에 알리기 위해 로마 전시회에 출품한 대작이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 아래에는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동산에는 쟁반같은 보름달이 떠오르는 환상적인 야경이다. 땅에는 떨어진 벚꽃잎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연기가 똑바로 올라가고 있음을 볼 때 바람이 없는 달밤임을 알 수 있다. 고요한 밤에 모닥불 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冨田渓仙, '기온의 밤 벚꽃(祇園夜桜)'


요코야마 다이칸보다 먼저 1921년 토미타 케이센(冨田渓仙, 1879~1936)이 벚꽃과 모닥불, 보름달을 소재로 한 '기온노요자쿠라(祇園夜桜)'를 그려 표절 의혹이 일어나기도 했다. 다이칸이 케이센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표절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横山大観, '영봉불이산(靈峰不二山, 1933)', 메나드 미술관(メナード美術館) 소장


요코야마 다이칸은 후지산(富士山, 3,776m)을 소재로 평생 약 1,500점의 그림을 그렸다. 1933년에 그린 '영봉불이산(靈峰不二山)'도 그중 하나다. 까마득하게 솟아 있는 후지산을 매우 안정감 있게 그린 그림이다. 그림 전면에 배치된 소나무숲이 안개 속으로 우뚝 솟은 후지산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후지산은 일본의 상징이자 일본인들에게 매우 신성시되는 산이다. 후지산은 혼슈(本州) 중부 야마나시 현(山梨縣)과 시즈오카 현(靜岡縣)의 태평양 연안에 접해 있다. 아이누인의 전승에 따르면 이 산의 이름은 '영원한 삶'이라는 뜻으로 BC 286년에 일어난 지진 때문에 화산이 생겨났고, 이로 인해 비와 호(琵琶湖) 바닥이 더욱 가라앉았다고 한다. 1707년 마지막으로 폭발한 이후 현재는 휴화산 상태이다. 둘레가 125㎞에 이르는 후지산 기슭에는 5개의 작은 호수가 있다. 특히 가와구치 호(河口湖)는 잔잔한 수면에 후지산의 영상이 거꾸로 비치는 모습으로 유명하다. 예로부터 산꼭대기가 만년설로 덮여 있는 이 원뿔형의 후지산은 일본에서 많은 예술적 주제가 되어 왔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수천 명의 일본인들이 후지산 정상에 있는 신사에 참배하기 위해 등산을 한다. 


아다치 미술관 정원 입구


아다치 미술관에는 근대 일본 화단의 거장들인 다케우치 세이호(竹内栖鳳, 1864~1942), 가와이 교쿠도(川合玉堂, 1873~1957), 우에무라 쇼엔(上村松園, 1875~1949), 하시모토 간세쓰(橋本関雪, 1883~1945)의 작품도 다수 소장하고 있다. 또 기타오지 로산진(北大路魯山人), 가와이 간지로(河井寛次郎)의 도예 작품도 소장하고 있다.


다케우치 세이호(竹内栖鳳)는 교토화단(京都畵壇)을 대표하는 일본화가이다. '동 다이칸(大觀), 서 세이호(栖鳳)'라는 말이 있다. 일본에서 말하는 동쪽은 도쿄(東京)를 중심으로 한 간토(關東) 지역, 서쪽은 교토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關西) 지역을 말한다. 16살에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다케우치 세이호는 30대에 이미 교토화단을 대표하는 화가로 성장했다. 그가 그린 동물화, 풍경화, 인물화들은 세련되고 부드러우면서도 어떤 불가사의한 힘이 느껴진다. 


다케우치 세이호의 대표작으로는 '대사자도(大獅子図, 1902, 藤田美術館)', '로마 그림(羅馬之図, 1903, 海の見える杜美術館)', '비 갠 날(雨霽, 1907, 東京国立近代美術館)', '기르는 원숭이와 토끼(飼われたる猿と兎, 1908, 東京国立近代美術館)', '저 소나기에(アレ夕立に, 1909, 高島屋史料館)', '그림에서는 처음(絵になる最初, 1913, 京都市美術館, 重要文化財)', '가마우지 떼(群鵜, 1913, 霞中庵 竹内栖鳳記念館)', '반묘(班猫, 1924, 山種美術館, 重要文化財)', '헤이케 새소리를 듣고 달아나다(平家驚禽声逃亡, 東京国立博物館)', '가을의 흥취(秋興, 1927, 京都国立近代美術館)', '훈풍치작 한정백로(薫風稚雀・寒汀白鷺, 1928, 三の丸尚蔵館)' 등이 있다. 


竹内栖鳳, '저 소나기에(アレ夕立に, 1909)', 다카시마야 사료관(高島屋史料館) 소장


'저 소나기에(アレ夕立に)'는 1909년 다케우치 세이호가 일본 전통무용 야마우바(山姥)를 추고 있는 마이코(まいこ, 舞子, 舞妓)를 그린 작품이다. 영어 제목은 'Geisha girl dancing Yamanba(Yamauba, 山姥)'다. 제목 '저 소나기에(アレ夕立に)'는 무용곡의 가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마이코는 교토 기온(祇園, 유곽) 등의 연회석에서 춤을 추는 동기(童妓)를 말한다. 야마우바(山姥)는 일본의 전설과 설화에 나오는 마귀할멈이다. 깊은 산속에 살면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척하다가 잡아먹는다고 한다.


화면에서 마이코는 오른손으로 든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진청색 바탕에 흰색의 큰 꽃무늬가 들어 있는 기모노(着物)를 입고, 강변 풍경을 담은 오비(帶)를 맸다. 한껏 치장한 머리, 새하얗게 드러난 목덜미, 부채를 든 연약한 손은 마이코가 상당한 미인이 아닐까 하고 상상하게 된다. 이것은 작가가 의도한 것일 수도 있다. 

 

竹内栖鳳, '반묘(斑猫, 1924)', 야마타네 미술관(山種美術館) 소장


'반묘(斑猫)'는 다케우치 세이호가 1924년에 그린 그의 대표작이자 중요문화재이다. 모델이 된 얼룩무늬 고양이(斑猫)는 세이호가 시즈오카 현(靜岡縣) 누마즈(沼津)에 머물고 있을 때, 이웃 야채가게 여주인이 기르던 고양이였다. 이 고양이를 본 세이호는 중국 북송(北宋)의 휘종(徽宗)이 그린 고양이를 떠올렸다. 그는 야채가게 여주인에게 고양이를 빌려 교토로 데려와 그의 화실에서 자유롭게 뛰놀게 하면서 며칠 동안 정성껏 관찰한 뒤 이 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가와이 교쿠도(川合玉堂)의 본명은 가와이 요시사부로(川合芳三郞)다. 1887년 교토로 간 가와이 교쿠도는 사실주의 화파인 시조파(四條派)의 거장 고노 바이레이(幸野楳嶺, 1844~1895)에게 그림을 배웠다. 고노 바이레이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도쿄로 가서 중국적인 소재와 기법을 중시하는 화파인 가노파(狩野派)의 하시모토 가호(橋本雅邦, 1835~1908) 문하에 들어갔다. 그는 서양화도 공부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했으며, 특히 풍경화에 능했다. 가와이 교쿠도는 전통적인 일본화를 부흥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가와이 교쿠도의 대표작으로는 '후쓰카즈키(二日月, 1907, 東京国立近代美術館)', '가는 봄(行く春, 1916, 東京国立近代美術館, 重要文化財)', '유키스키 병풍(悠紀主基屏風, 山元春挙との合作, 1928, 六曲ニ双屏風, 東京国立博物館)', '보세쓰(暮雪, 1933, 水野美術館)', '산봉우리의 저녁(峰の夕, 1935, 개인 소장)', '계산사시도 병풍(溪山四時図屏風, 1939, 六曲一双屏風, 東京国立博物館)', '채우(彩雨, 1940, 東京国立近代美術館)' 등이 있다.


川合玉堂, '후쓰카즈키(二日月, 1907)', 86.4×139.0cm, 東京国立近代美術館 소장


'후쓰카즈키(二日月)'는 가와이 교쿠도가 1907년 도쿄 산업박람회(東京産業博覽會)에 출품하여 주목을 끌었던 작품이다. 후쓰카즈키(二日月)는 음력 8월 초이튿날의 달을 말한다. 안개를 처리함에 있어 몽롱체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시조파와 가노파 양자의 화풍과 묘법(描法)을 살려 음력 8월 초이튿날의 달이 뜬 풍경을 온화하면서도 정감 있게 표현한 그림이다. 


川合玉堂, '가는 봄(行く春, 1916)', MOMAT 컬렉션


'가는 봄(行く春)'은 가와이 교쿠도가 1916년에 그려 제10회 문전(文展)에 출품한 작품으로 MOMAT 컬렉션이다. 6폭 병풍에 그린 이 그림은 바람에 날린 벚꽃이 물결을 따라 흘러가는 늦봄의 낭만적인 정취를 담은 아름다운 그림이다.  


가와이 교쿠도는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시대인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조선에 건너온 적이 있다. 심사를 마친 교쿠도는 약 한달 동안 평양, 금강산 등 조선 각지를 여행한 뒤 그 경험을 '송도의 여름(1922)', '유음한화(柳陰閑話, 1922)' 등의 그림으로 남겼다.


川合玉堂, '유음한화(柳陰閑話, 1922)', 오쿠라 슈코칸(大倉集古館) 소장


'송도의 여름'과 '유음한화'는 당시 조선의 한적한 마을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림의 구도나 표현 방식으로 보아 같은 시기에 같은 지역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송도의 여름'은 숲이 우거진 마을의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여인 세 사람을 원경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이국적인 조선의 풍속에 대한 호기심과 작가의 시정(詩情)이 드러나 있다. '유음한화'는 좀더 마을 안으로 들어가 조선의 전통적인 기와집을 배경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양반 차림새의 남자 두 명을 근경으로 그렸다. 담장 구석의 나무 위로 까치 한 마리가 날아들고 있다. 두 작품 모두 명승지의 멋지고 아름다운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담았다.


川合玉堂, '보세쓰(暮雪, 1933)', 미즈노 미술관(水野美術館)


'보세쓰(暮雪)'는 가와이 교쿠도가 1933년에 시골 마을의 설경(雪景)을 그린 작품이다. 이 그림은 미즈노 미술관(水野美術館)이 소장하고 있다. 모설(暮雪)은 해가 질 무렵에 내리는 눈을 말한다. 눈에 폭 파묻힌 마을이 동화 속에 나오는 세상처럼 느껴진다. 


川合玉堂, '산봉우리의 저녁(峰の夕, 1935)', 개인 소장


가와이 교쿠도가 1935년에 그린 '산봉우리의 저녁(峰の夕)'은 매우 서정적인 작품이다. 산골짜기에는 눈이 쌓여 있고, 서쪽 산기슭에 붉은 기운이 서린 저녁노을이 내려앉은 풍경을 그렸다. 


아다치 미술관 정원


조선미술전람회가 끝난 후 일본으로 돌아간 가와이 교쿠도는 '유음한화'를 완성하여 그해 10월 열린 제국미술전람회(帝國美術展覽會, 제전)에 출품했다. 이후 1930년 로마에서 개최된 일본미술전람회에도 출품하면서 이 작품은 교쿠도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아다치 미술관


당대 일본 최고 화가 중 한 명이었던 가와이 교쿠도의 조선미술전람회 참여는 많은 일본의 수준 높은 화가들이 지속적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그가 심사 기준으로 내세운 품위(品位), 기술(技術), 고안(考案)은 이후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화가로 등단하려는 응모자들에게 대단히 큰 영향을 주었다. 


우에무라 쇼엔(上村松園)의 본명은 우에무라 쓰네(上村津禰)로 일본 근대 화단에서는 보기 드물게 성공한 여성화가다. 한국으로 말하면 천경자(千鏡子) 작가 정도에 해당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교토(京都)의 시모교(下京)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에무라 쇼엔은 교토 화단의 거장 타케우치 세이호(竹內栖鳳)에게 사사(師事)한 후 주로 일본 문부성이 주최하는 미술전람회인 문전(文展)을 통해 활동했다. 쇼엔은 특히 여성의 눈을 통해서 여성의 모습을 담은 비진가(美人画, 미인화)를 많이 그렸다. 쇼엔의 '비진가'는 에도시대 풍속화인 우키요에(浮世繪)의 구도를 차용하면서도 유녀(遊女)가 아닌 양갓집 규수나 일반 여성을 기품 있고 강인하게 묘사했다. 


우에무라 쇼엔은 인물뿐만 아니라 풍속이나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도 많이 남겼다. 고전(古典), 고사(故事)를 소재로 한 대표작에는 '세이쇼나곤(清少納言, 1892)', '무스메미유키(娘深雪, むすめみゆき, 1914)', '꽃바구니(花がたみ, 花筐, 1915)', '불꽃(焔, ほのお, 1918, 東京國立博物館)', '양귀비(楊貴妃, 1922)', '이세노 다이후(伊勢大輔, 1930)', '소시아라이코마치(草子洗い小町, そうしあらいこまち, 1937)', '세츠겟카(雪月花, 三幅対, 1937)', '다듬잇돌(砧, きぬた, 1938)', '고요(静, 1944)' 등이 있다. 미혼 여성(娘)이나 새댁(新妻)을 소재로 한 주요 작품에는 '조노마이(序の舞, 1936, 東京藝術大學, 重要文化財)'를 비롯해서 '인생의 꽃(人生の花, 1899)', '춤 준비(舞支度, 一対, 1914)', '맑은 날 저녁의 달맞이(待月, 良宵之図, 1926)', '발 그늘, 반딧불이(簾のかげ, 新蛍, 1929)', '춘추도(春秋図, 一対, 1930)' 등이 있다. 일반 여성(市井の女性)과 어머니의 모습(母の面影)을 그린 대표작에는 '모자(母子, 1934, 東京国立近代美術館, 重要文化財)', '푸른 눈썹(青眉, あおまゆ, 1934)', '맑은 날(晴日, 1941)', '해질녘(夕暮, 1941)', '만추(晩秋, 1943)' 등이 있다. 


上村松園, '두 미인의 독서(二美人觀書)'73.7×49.5cm


우에무라 쇼엔의 비진가(미인화) 중 '두 미인의 독서(二美人觀書)'는 2017년 일본에서 경매에 나온 작품이다. 곱게 치장한 두 미인이 편안하게 붙어 앉아서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두 여성을 클로즈업해서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책의 표지에는 '多賀羅冨根'(宝船, 보물선)이라고 쓰여져 있다. 


무로마치(室町時代, 1338~1573) 시대부터 일본에서는 무사의 신 비샤몬(毘沙門), 부와 상업의 신 다이코쿠(大黑), 어부와 상인의 신 에비스(惠比須), 행복과 부, 장수의 신 후쿠로쿠주(福祿壽), 지혜의 신 주로진(壽老人), 풍요와 건강의 신 호테이(布袋), 여성과 예술의 신 벤텐(辨天) 등 시치후쿠진(七福神, 칠복신)을 모시는 풍습이 생겨났다. 이 신들은 원래 일본의 토착신이 아니라 인도나 중국에서 들어와 현지화된 신들이다. 다이쇼 시대(大正時代, 1912~1926) 교토에서는 새해 전날 시치후쿠진을 태운 보물선 그림을 배개 밑에 깔고 자는 풍습이 유행했다. 새해 전날 시치후쿠진을 태운 보물선 그림을 베개 밑에 깔고 자면 길조(吉兆)의 새해 첫꿈을 꿀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림 속의 두 여성도 새해 행운을 바라면서 시치호쿠진을 태운 보물선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 여성이 가장 바라는 소망은 무엇이었을까? 두 여성의 얼굴에는 새해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표정이 역력하다.   


上村松園, '처녀애아도(處女愛児図, 1910년경)', 135.2×51.5cm


우에무라 쇼엔이 1910년 무렵 그린 '처녀애아도(處女愛児図)'도 2017년 일본에서 경매에 나온 작품이다. 후리소데(振袖)를 입은 젊은 여성은 어르고, 어린아이는 깔딸대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그림이다. 후리소데란 에도 시대(江戸時代, 1603~1867)에 성행한 소매가 긴 기모노인데, 미혼여성이 착용하는 매우 격조 높은 옷이다. 후리소데는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1868~1912)를 거쳐 다이쇼 시대에는 혼례의장으로 유행하였다. 


이 그림은 여성의 머리 장식과 옷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머리는 시마다마게(島田髷)로 결발(結髮)하고 쿠시(櫛), 코우가이(筓), 칸자시(簪) 등의 장식을 했다. 후리소데 안에는 붉은 꽃 무늬의 나가쥬반(長襦袢)을 입고, 검은색 오비(帶)를 맸다. 매우 뛰어난 패션 감각이다. 인물화를 그림에 있어 우에무라 쇼엔은 머리 모양과 의상을 매우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머리 모양과 의상을 통해서 그 시대의 풍속이나 인물의 특성, 계절 등을 유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쇼엔의 비진가들은 메이지 시대 여성 풍속의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왠지 섬뜩한 느낌을 주는 '불꽃(焰, ほのお)'은 우에무라 쇼엔이 1918년에 그린 대작이다. 이 그림은 도쿄 국립박물관 내 상점에서 판매하는 그림 엽서에도 등장할 정도로 유명하다. 화면에는 노란색과 보라색 등꽃무늬가 들어간 우치카케(打掛)를 입은 여성이 뒤를 살짝 돌아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눈은 게슴츠레하게 뜬 채 머리카락을 입에 물고 잘글잘근 씹고 있다. 머리카락은 머리 뒤에서 한번 묶은 뒤 등에서 허리를 타고 내려와 땅에 닿을 듯 길게 늘어졌고, 발밑은 흐릿하게 처리했다. 마치 유령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우치카케는 에도 시대 무관 부인의 예복이었는데, 지금은 결혼식 때 입는 혼례복이다. 혼례복은 소매가 길고 꽃무늬가 화려하며, 무사 부인의 예복은 소매가 짧다.


上村松園, '불꽃(焰, 1918)', 190.9×91.8cm,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


'불꽃(焰)'은 일본 고전문학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에 등장하는 고귀한 여성 로쿠조 미야스도코로(六條御息所)가 연적에 대한 질투심으로 생령(生霊)이 된 모습을 그린 것이다. 생령은 유령의 일종이지만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영혼이다. 미야스도코로의 생령은 일본화의 전통에 입각하여 그림자도 없이 단순화된 선과 형태로 그려져 있다. 생령이 금방이라도 화면 밖으로 튀어나와 다가올 것만 같은 느낌이다. 아름다운 여성이 어슴푸레한 배경 속에서 머리카락을 잘근잘근 씹으며 한이 서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심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불꽃(焰)'을 그리고 있는 우에무라 쇼엔


그런 점에서 우에무라 쇼엔의 '불꽃(焰)'은 다소 이색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평생 밝은 색채로 청초한 여성상을 그려 온 쇼엔은 연하의 남성에게 실연을 당하고 43살에 무서운 그림 '불꽃(焰)'을 그렸다.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에서 로쿠조 미야스도코로는 8살 연하의 애인 히카루 겐지(光源氏)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미야스도코로는 불타는 질투심으로 생령이 되어 히카루 겐지의 정실 부인 아오이노우에(葵上)을 죽여서 복수를 했다. 쇼엔도 자신을 버린 그 남성에게 미야스도코로처럼 불타는 복수심을 느꼈던 것일까? '불꽃(焰)'을 그리고 있는 쇼엔의 모습도 어딘가 미야스도코로를 닮은 듯하다. 


지금까지 우에무라 쇼엔의 청초한 비진가만을 보아 온 대중들은 '불꽃(焰)'을 보고 어리둥절했고, 작가 자신도 앞으로 3년 동안 전시회에 출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실연은 쇼엔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것 같다. '불꽃(焰)' 이후 쇼엔은 단순히 예쁜 그림만이 아니라 깊은 내면까지 작품으로 표현할 수 있는 대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역시 작가의 경험에서 우러난 작품은 사람들에게 더 큰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불꽃(焰)'을 그리면서 실연이라는 큰 고뇌를 극복한 쇼엔이 그 16년 뒤에 그린 그림이 '모자(母子)', 18년 뒤에 그린 작품이 '조노마이(序の舞)'다. '모자(母子)'와 '조노마이(序の舞)'는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 쇼엔의 선언과도 같은 그림이다.


上村松園, '모자(母子, 1934, 重要文化財)', 東京国立近代美術館 소장


'모자(母子)'는 우에무라 쇼엔이 1934년 제15회 제전(帝展)에 출품한 그림으로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화면에는 화려하고 정교한 당풍(唐風)의 발을 배경으로 백옥 같은 피부에 푸른 눈썹의 아름다운 여성이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를 안고 사랑스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젊은 엄마는 시원한 물색 바탕에 가느다란 세로 줄무늬의 기모노를 입고, 허리에는 검은색의 오비를 맸으며, 머리는 정갈하게 장식했다. 수수하지만 기품이 있는 모습이다. 당풍의 발은 화면의 주인공이 당시 메이지 시대 교토 상가에 살던 여성임을 말해준다. 


우에무라 쇼엔의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기 두 달 전에 세상을 떠났다. 쇼엔의 어머니는 혼자 힘으로 쇼엔과 그녀의 언니를 키웠다. 어머니의 이해와 격려로 우에무라 쇼엔은 메이지 시대에 여류 화가가 될 수 있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 여성들은 눈썹을 밀고 푸른색으로 칠하는 화장법이 유행했었다. 쇼엔의 어머니도 푸른 눈썹이었다. 쇼엔은 저서 '청미초(青眉抄)'에서 어머니를 회상하며 '나는 어머니 덕분에 생활의 어려움을 겪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나를 낳은 어머니는 내 예술까지 낳아준 것이다.'라고 말했다. '모자(母子)'는 바로 쇼엔이 그리운 어머니에게 바치는 헌화(獻畵)였던 것이다. 


우에무라 쇼엔이 1936년에 그린 '조노마이(序の舞)'는 격렬한 움직임 뒤의 고요함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조노마이(序の舞)'는 노가쿠(能楽) 중에서도 고급 분위기를 풍기는 격조 높은 무용의 하나다. 노가쿠는 나라 시대(奈良時代, 710~794)에 중국 당나라에서 들어온 산가쿠(散楽)에서 분화된 사루가쿠(猿楽)에서 발전한 무용이다. 노(能)와 교겐(狂言), 시키산반(式三番)를 아울러 노카쿠라고 하며, 전용 무대인 노부타이(能舞台)에서 공연된다. 노가쿠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上村松園, '조노마이(序の舞, 1936)', 300×209cm, 도쿄 예술대학 소장


우에무라 쇼엔은 자신의 대표작 '조노마이(序の舞)'에 대해 '그 무엇도 범할 수 없는 여성 속에 숨겨진 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싶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화면에 그려져 있는 여성 모델은 쇼엔의 아들 우에무라 쇼우코(上村松篁)의 부인 타네코(たね子)라고 한다. 이 작품은 그려진 지 80년 이상 지났기 때문에 물감층이 가루가 되어 떨어져 나가는 등 보존 상태가 악화되어 2015년부터 2018년까지 보수 작업을 거쳤다. 


하시모토 간세쓰(橋本関雪)는 1883년 혼슈(本州) 효고 현(兵庫県) 고베(神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하시모토 칸이치(橋本貫一)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1903년 다케우치 세이호(竹内栖鳳)의 치쿠죠카이(竹杖会)에 들어가 1913년~1914년의 문전(文展)에 출품하여 연속 2등상을 받았다. 1916년~1917년의 문전에서는 특선을 했다. 1934년에는 제전(帝展) 심사위원, 1935년에는 제국미술원(帝国美術院) 회원, 1937년에는 제국예술원(帝国藝術院) 회원이 되었다. 1940년에는 켄닌지(建仁寺)의 후스마에(襖絵)를 그렸다. 중국 고전에도 달통했던 간세쓰는 몇 차례 중국을 여행하기도 했다. 


하시모토 간세쓰의 대표작에는 '비파행(琵琶行, 1910, 川村記念美術館)'을 비롯해서 '봄날(遅日, 1913, 足立美術館)', '남국(南国, 1914, 姫路市立美術館)', '사냥(猟, 1915年, 白沙村荘 橋本関雪記念館)', '한산습득(寒山拾得, 1917, 林原美術館)', '목란(木蘭, 1918, 川村記念美術館)', '의마심원(意馬心猿, 1928, 京都国立近代美術館)', '장한가(長恨歌, 1929, 京都市美術館)', '겐엔(玄猿, 1933, 東京芸術大学大学美術館)', '모운(暮韻, 1934, 宮内庁三の丸尚蔵館)', '당견도(唐犬図, 1936, 大阪市立美術館)', '추앵노원(秋桜老猿, 1938, 白沙村荘 橋本関雪記念館)', '추포(秋圃, 1939, 足立美術館)', '방공호(防空壕, 1942, 東京国立近代美術館)', '향비융장(香妃戎装, 1944, 衆議院)' 등이 있다. 



橋本関雪, '봄날(遅日, 1913)', 아다치 미술관(足立美術館) 소장


'봄날(遅日)'은 하시모토 간세쓰가 1913년 제7회 문전(文展)에 출품했던 6폭 병풍그림이다. 두 점 모두 아다치 미술관(足立美術館)에서 소장하고 있다. '遅日(지일)'은 '봄날, 낮이 긴 날, 봄철 늦게 지는 긴긴 해' 등의 뜻이 있다. 화면 상단에는 등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계절적으로 5~6월임을 알 수 있다. 


윗그림은 백마가 흑마 등에 다정하게 머리를 올려놓고 있다.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을 맞아 춘정(春情)을 느끼는 말을 표현하고자 한 듯하다. 학동으로 보이는 젊은 사람이 왼손으로 백마의 등을 짚고, 오른발을 살짝 들어올린 모습이다. 말에 올라타려는 자세처럼 보인다. 아랫그림은 훈장처럼 보이는 사람이 말고삐를 잡고 뒷짐을 진 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갈색 말은 주인을 잘 따르는 순종적인 모습이다. 훈장과 학동이 봄나들이라도 나온 것일까?    

 

橋本関雪, '가을 벚나무와 늙은 원숭이(秋桜老猿, 1938)', 白沙村荘 橋本関雪記念館 소장


'추앵노원(秋桜老猿)'은 하시모토 간세쓰가 1938년에 그린 작품이다. 이 그림은 하쿠사손소 하시모토 간세쓰 기념관(白沙村荘 橋本関雪記念館)에서 소장하고 있다. 간세쓰는 제14회 제전(帝展)에 검은 털을 가진 긴팔원숭이를 그린 '검은 원숭이(玄猿, 현원)'를 출품했다. 쇼와 덴노(昭和天皇)가 '검은 원숭이(玄猿)'를 보고 칭찬하자 일본 문부성은 이 그림을 구입해서 도쿄 예술대학 미술관에 소장했다. 이후 간세쓰에게 원숭이 그림 주문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하시모토 간세쓰의 '원숭이 그림' 시대라고 한다. 원숭이 그림을 청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자 간세쓰는 마침내 이를 거절하기에 이른다. 


'추앵노원(秋桜老猿)'은 가을철 벚나무 고목 꼭대기에 검붉은 털을 가진 늙은 원숭이가 올라간 모습을 그린 것이다. 원숭이 뒤에는 벚나무 잎이 붉게 물들어 있다. 원숭이의 표정이 영락없는 노인이다. 하시모토 간세쓰가 말년에 그린 이 원숭이 그림에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듯하다. 이 작품은 '검은 원숭이(玄猿)', 백모(白毛)의 원숭이 그림인 '서리 맞은 원숭이(霜猿, 상원)'와 함께 간세쓰의 '삼원(三猿)'이라 불린다. '서리 맞은 원숭이(霜猿)'는 뉴욕 만국박람회 출품작이다.       


橋本関雪, '추포(秋圃, 1939)', 아다치 미술관(足立美術館) 소장


'추포(秋圃)'는 하시모토 간세쓰가 1939년에 그린 작품이다. 이 그림은 아다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秋圃(추포)'는 '가을의 밭이나 정원'을 말한다. 늦가을 정원에 족제비 한 마리가 나타나 먹을 것이라도 찾는지 잔뜩 긴장한 모습이다. 관목의 단풍에서 늦가을의 소슬한 정취가 느껴진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족제비를 순간적으로 포착해서 생생하게 묘사한 그림이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문사철(文史哲)을 겸비해야 온전한 지식인 나아가 지성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문사철(文史哲)은 곧 문학과 예술, 역사, 철학을 말한다. 영국의 존 러보크(John Lubbock)는 '태양이 꽃을 물들이듯 예술은 인생을 물들인다.'고 했다. 훌륭한 예술은 인간의 정신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한다는 말이다. 아다치 미술관에서 일본 근대 화단의 대가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내 인생의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2018. 1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