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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무궁화' 비판(37) 그 많던 모곡학교의 무궁화는 어디로 다 사라졌을까? - 조현래

林 山 2020. 11. 19. 11:20

때아닌 무궁화(無窮花)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무궁화는 현재 대한민국의 국화(國花)이며, 나라를 상징하는 국장(國章)이기도 하다. 대통령 휘장(徽章)부터 국회의원 배지, 법원 휘장, 경찰관과 교도관의 계급장 등 나라의 거의 모든 상징은 무궁화이다. 

 

하지만 강효백은 자신의 저서 ‘두 얼굴의 무궁화’에서 이런 무궁화의 위상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배척한다. 무궁화가 우리 고서(古書)에서 거의 ‘피어본 적이 없는’ 꽃이며 오히려 ‘일본의 꽃’이라고 주장한다. 강효백의 주장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상식을 뒤집어엎는 것이어서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조현래(필명)는 강효백의 주장에 대해 친일파 또는 친일 잔재의 척결이라는 과잉 목적의식이 현실과 실제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비판한다. 그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무궁화를 권위주의와 국가의 상징으로 과도하게 선전한 것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지만, 그것이 사실을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어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비판한다. 

 

강효백만 나라꽃으로서 무궁화의 부적격성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1956년 당시 일간지에 화훼연구가 조동화와 식물학자 이민재가 나라꽃으로서 무궁화의 부적격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요즘도 사회 일각에서 애국가와 국화를 다시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애국가는 작곡자가 친일파이고, 가사도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국화도 무궁화가 국민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조현래-강효백 두 사람의 논쟁이 국민들로 하여금 무궁화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林 山>

 

<사진1> 무궁화(경기도 안산)

​ '두 얼굴의 무궁화' 비판(37) 그 많던 모곡학교의 무궁화는 어디로 다 사라졌을까?

 

 

[두 얼굴의 무궁화] 20. 일제 강점기 일제가 정말 한반도의 무궁화를 뿌리채 뽑고 불살라 버리는 등 탄압했더라면.(p.17)

 

남궁억 선생은 무궁화 보급을 탄압 당한 게 아니라 무궁화 보급을 내걸고 비밀 항일 애국활동을 펼치다가 일제에 탄압당한 것이다. 끝으로 한반도에 무궁화가 흔히 있었더라면 남궁억 선생이 굳이 무궁화 보급운동을 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p.398)

 

 

《fact check(1)》 남궁억 선생은 무궁화 보급을 내걸고 비밀 항일 애국활동을 펼치다가 일제에 탄압 당했다?-전혀 사실이 아니다.

 

▶ 남궁억 선생에 대한 왜곡과 조작

 

-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발생한 십자가당 사건에 따른 치안유지법 위반죄는 남궁억(1863~1939) 선생에게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무궁화 재배, 무궁화 창가 및 조선의 역사 교육을 통해 민족주의 사상을 주입했다는 이유로 보안법 위반죄로 투옥되고 처벌되었다는 사실은 앞선 바로잡기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두 얼굴의 무궁화』, p.195에서 주장된 것은 재판기록, 신문기사, 선생의 사상, 독립운동 등을 왜곡하거나 조작한 것이라는 점도 앞선 바로잡기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 이상의 내용은 바로잡기 ['두 얼굴의 무궁화'에 대한 비판(22)]~  ['두 얼굴의 무궁화'에 대한 비판(25)] 참조. 

 

▶ 겉으론 무궁화 보급, 속으론 비밀결사운동?

-『두 얼굴의 무궁화』는 마치 남궁억 선생의 독립운동을 인정하는 듯하지만, 1918년 이후 삶의 마지막까지 강원도 홍천에서 모곡학교를 설립하여 자라는 세대들에게 민족의식 함양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점을 고려하면, '겉으론 무궁화 보급'이라는 주장은 일본의 신화(神花), 일본의 혼네(本音)의 꽃, 그리고 일본의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무궁화를 재배하고 그 정신을 자라는 세대들에게 가르쳤다는 것이 된다.

- 1910~1918년까지 남감리회 선교사가 설립했던 배화학당(현 배화여고)의 교사였던 남궁억 선생은 무궁화로 삼천리 금수강산을 상징한 지도 자수를 고안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쳤는데, 그 때에는 비밀결사운동(?)에 대한 활동은 언급조차 없으므로,『두 얼굴의 무궁화』의 주장에 따르면 오로지 친일(종일) 활동만 했다는 논리가 된다.  

-『두 얼굴의 무궁화』의 주장을 실제 현실에 대입하면 주장 자체로 사자(死者)에 대한 명예훼손이 분명하지 않은가?

《fact check(2)》 무궁화는 전혀 탄압받지 않았을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사진2> 홍천경찰서 사법경찰관 작성, 「1933년 11월 4일자 수색조서」중 「차압목록」

 일제강점기인 1933년의 현실은?

 

​-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고 있는 남궁억 선생에 대한 기록 중 '경찰신문조서'에 편철된「1933년 11월 4일자 수색조서」(현재는 압수수색조서)의 '차압목록'(현재는 압수목록)에 따르면, 당시 일제는 남궁억 선생이 기거하던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 448번지에서 위와 같은 물품을 압수(차압)했다.

- 위 압수물품의 목록에는 '무궁화선전삐라'(무궁화 판매 광고문안), '무궁화 도안', '무궁화 시' 그리고 '무궁화가 든 액자'가 포함되어 있었고, 이 물품은 검찰국(청)으로 송치(송부)되어 재판에서 유죄에 대한 증거기록으로 사용되었다.

-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자료 참조: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hd&levelId=hd_047r_0020_0010_0030&types=r

 

 일제강점기에 무궁화가 탄압받지 않았다는 주장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두 얼굴의 무궁화』의 주장에 따르면 무궁화는 일본의 신화(神花)이자 혼네(本音)의 꽃이고, 천황 영토의 무궁한 확장을 뜻하는 천양무궁(天壤無窮)에서 유래한 것이며, 그 주장에 따르면 남궁억 선생은 일제로부터 표창을 받아도 시원치 않을 판이다.

- 그런데 왜 당시 일본 경찰은 남궁억 선생의 집에서 무궁화 관련 자료를 압수했고, 그것을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자료로 사용했을까?

- 남궁억 선생에 대한 경찰과 검찰의 기록을 전수 조사 했다는『두 얼굴의 무궁화』, p.200 및 p.207의 주장은 도대체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fact check(3)》  그 많던 모곡학교의 무궁화는 어디로 다 사라졌을까?

 

< 사진3> 동아일보, 「무궁화도 수난」, 동아일보사(1934. 5. 3.자), 3면

 남궁억 선생이 모곡학교에 식재한 무궁화의 그루는?

 

- 남궁억 선생에 대한 재판이 한참 진행 중이던 1934년 5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모곡학교에 식재된 무궁화의 처리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 이 당시 남궁억 선생이 모곡학교에 식재하여 재배하였던 무궁화는 무려 '칠(七)만 주'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제는 왜 사건 발생 후 무궁화를 전부 없애라고 했을까?

 

- 1934년 5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사건 발생 후 당국(홍천경찰서를 말함)에서는 그 무궁화나무를 전부 없애도록 하라"고 했다고 한다.

- 압수(차압)의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7만 주 모두를 모곡학교에서 없애도록 한 것이다.

-『두 얼굴의 무궁화』,p.182~p.184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헌병과 일본인 관리를 동원하여 암암리에 마을 입구마다 무궁화를 심고 재배가능 북방한계선을 확장하도록 품종을 개발했고, 문화통치 이후에는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무궁화를 심는 대신 한국인의 손으로 무궁화를 심도록 했다는데, 남궁억 선생은 7만 주 심어 묘목을 팔고 보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표창을 하지는 못할 망정 그 무궁화를 전부 없애도록 했을까?

- 당국(홍천경찰서를 말함)에서 모곡학교의 무궁화나무를 전부 없애도록 하라고 한 조치야말로 일제가 무궁화가 민족의식과 독립으로 연결되는 매개로 보고 무궁화를 탄압했다는 직접적 증거이다(이에 대한 또 다른 증거로서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1933년 12월 작성한『고등경찰용어사전』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편의 바로잡기에 살펴보기로 한다). 

-『두 얼굴의 무궁화』,p.182 및 p.183의 주장은 없는 자료로 허위의 내용을 사실인 양 인용하여 마치 근거가 있는 것처럼 왜곡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바로잡기 중 ['두 얼굴의 무궁화'에 대한 비판(4)], ['두 얼굴의 무궁화'에 대한 비판(9)] 및 ['두 얼굴의 무궁화'에 대한 비판(14)] 참조.    

 

 일제 당국은 왜 무궁화를 주문하고 분배받아 갔을까?

 

- 1934년 5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모곡학교에 있던 무궁화 전체 7만 그루를 없애는데 강원도 학무국에서 4천 그루, 춘산경부에서 2천 그루, 홍천군청에서 1만 그루, 홍천경찰서에서 1만 그루, 기타 주문이 1천 그루로 하여 분배를 받아 갔다는 것이다.

- 그중 홍천경찰서는 남궁억 선생을 구속·투옥한 당사자이며, '기타 1천 그루'를 제외하고 나머지 분배 받은 곳이 모두 일제강점기 식민지 체제를 유지하던 지배기관이었다.

- 주문하여 분배받아 간 무궁화를 보급하여 식재 및 재배할 목적이었다면, 모곡학교에서 이미 재배하여 판매하고 있었으므로 그냥 두어도 무방할 것이라는 점은 상식에 비추어도 분명하다.

모곡학교의 무궁화를 분배받아 간 기관들이 위 무궁화를 어떻게 했는지는 오리무중이고, 산하기관에 재분배하거나 이를 다시 식재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 외형적으로는 주문과 분배의 형식을 띠었지만 실질은 모곡학교에 식재된 무궁화를 제거하여 없애는 과정이었다.

- 1934년 5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나타나지 않은 남은 무궁화 4만 그루가 처리된 것을 살펴보면, 각 기관들이 분배 받아간 무궁화를 어떻게 처리했을지는 보다 분명해진다.

    

 

제2차 주문

 

강원도 경찰부에서 20,000주

강원도 학무과에서 10,000주

홍천 경찰서에서 10,000주

 

또한 관계 당국에서 제2차로 주문한 것은 무상으로 뽑아 들이라는 명령이었다. 이들은 많은 수의 묘목을 산하에 배부한 일이 없고 불 속에 태워버리는 동시에 춘천읍의 선교사들 주택 주위에 있는 무궁화를 경찰이 직접 와서 파내거나 동강을 내어 묶어 갔다.

  

♧ 김세한, 『한서 남궁억의 생애(불굴의 얼)』, 키아츠(2018), p.204 참조.

 

<참고1> [김세한,『한서 남궁억의 생애(불굴의 얼)』, 키아츠(2018)]은 [김세한,『한서 남궁억의 생애(불굴의 얼)』, 한서남궁억선생기념사업회(1960)]을 모본으로 하여 일부 표현을 현대적으로 개작하여 재출간한 책이다.  [김세한,『한서 남궁억의 생애(불굴의 얼)』, 한서남궁억선생기념사업회(1960)]은『두 얼굴의 무궁화』, p.197에서 말하는 1961년 5·16 박정희 군사구데타 이전에 작성되었고, 1933년 무궁화재배 사건을 직접 경험한 남궁억 선생의 자녀 남궁자경씨 등이 참여한 한서남궁억선생기념사업회가 편찬하여 그 내용을 검증한 문헌이었다.

<참고2> 당시 일제가 모곡학교의 무궁화를 직접 바로 뽑거나 불태우지 않고 주문과 분배라는 유상거래의 형식을 취했던 이유로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참고할 수 있다. 1930년을 기준으로 한반도에는 일본에서 이주한 일본인 거주자가 53만 명에 달하였고, 무궁화는 상당한 일본인들에게도 원예용 재배식물이나 약용식물로 알려져 있었으므로 꽃을 직접적으로 탄압하여 제거하는 방식은 자국민들에게도 이해되거나 설득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일제강점기 일본 거주자의 변동에 대해서는 이정, 「식민지 과학 협력을 위한 중립성의 정치」,『한국과학사학회지 제37권 1호』(2015), p.266 참조]. 또 다른 요인으로 조선총독부는 1932년에 발의되어 1936년까지 조선 농민의 민심을 달래기 위한 목적으로 대대적인 '약초재배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무궁화는 주요한 약재 중의 하나이므로 민심 악화를 우려하여 무궁화를 직접적으로 뽑거나 불태우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이다[일제강점기 약초재배운동에 대해서는 이정,「관료들의 천국 : 일제강점기 약초재배운동의 조화로운 동상이몽」,『역사학보 제238집』(2018.6.), p.299 이하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문과 분배는 형식이었고 실질은 모곡학교의 무궁화를 제거하는 것이었으며, 2차주문은 자라고 있는 현장에서 뽑히고 불태워졌다. 

<참고3> 당시 일제가 모곡학교의 무궁화에 대해 주문과 분배라는 유상거래의 형식을 취했지만 정당한 가격이 지불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1934년 5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가 기술하고 있듯이 보유한 토지를 매각했음에도 모곡학교의 경영난이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는 것에서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결론》 역사 왜곡에 대해서 묻다.

 

 

▶ 그 많던 모곡학교의 무궁화는 뿌리채 뽑히고 불살라 버리는 등 탄압당하여 사라진 것이다.

 

- 일제는 모곡학교의 무궁화를 뿌리채 뽑고 불살라 버리는 등 탄압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며, 그 외형을 주문과 분배라는 유상거래의 모양을 취한 것 뿐이다.

- 주문과 분배라는 외형을 이유로 탄압당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일제의 토지수탈과 공출에 대해 유상거래이기 때문에 강제수탈이 아니라거나 민간인 성매매업자가 개입되었기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강제성이 없었다고 말하는 일부 역사 왜곡자들의 주장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 아예 원천적으로 탄압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부인하고, 존재하지도 않았던 일본의 무궁화 식재를 허위의 인용문헌을 근거로 하는 것은 오히려 더한 왜곡이 아닌가?  

▶ 남궁억 선생이 무궁화 보급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한반도에 무궁화가 흔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논리는 말인가? 막걸리인가?

 

​- 무궁화가 흔한 지금도 무궁화 보급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고, 목적과 이유가 있으면 흔하더라도 식물에 대한 보급운동은 계속해서 있는 법이다.

- 1930년대 한반도에 무궁화가 어느 정도 존재했는지는 자연생태사 차원에서 여러 문헌과 자료를 종합하여 과학적으로 밝히면 될 일이며, 보급운동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무궁화가 흔하게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거나 논증되지는 않는다.

-『두 얼굴의 무궁화』의 저자이시여! 당신의 주장대로라면 조선총독부는 헌병과 관리를 동원해 무궁화를 심었고, 북방한계선을 넓히는 품종개량을 했으며, 심지어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의 기법으로 조선인으로 하여금 무궁화를 식재하도록 했다는데 왜 식민지 지배를 시작한지 20년이 넘은 1930년대에도 그들의 신화이자 혼네의 꽃이 한반도에 흔하지 않았는지 스스로 해명해야 하는게 아닌가?

 -『두 얼굴의 무궁화』의 저자이시여! 당신의 주장대로라면 한서 남궁억 선생은 모곡학교의 자라는 어린 세대들에게 일본인의 신화이자 혼네의 꽃을 재배하여 일본의 정신을 가르친 것이 아닌가? 주장 자체로 평생을 민족의 독립과 국권 회복에 헌신한 독립투사에 대한 명예를 훼손한 것이 아닌지 해명해야 하는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