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아닌 무궁화(無窮花)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무궁화는 현재 대한민국의 국화(國花)이며, 나라를 상징하는 국장(國章)이기도 하다. 대통령 휘장(徽章)부터 국회의원 배지, 법원 휘장, 경찰관과 교도관의 계급장 등 나라의 거의 모든 상징은 무궁화이다.
하지만 강효백은 자신의 저서 ‘두 얼굴의 무궁화’에서 이런 무궁화의 위상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배척한다. 무궁화가 우리 고서(古書)에서 거의 ‘피어본 적이 없는’ 꽃이며 오히려 ‘일본의 꽃’이라고 주장한다. 강효백의 주장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상식을 뒤집어엎는 것이어서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조현래(필명)는 강효백의 주장에 대해 친일파 또는 친일 잔재의 척결이라는 과잉 목적의식이 현실과 실제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비판한다. 그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무궁화를 권위주의와 국가의 상징으로 과도하게 선전한 것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지만, 그것이 사실을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어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비판한다.
강효백만 나라꽃으로서 무궁화의 부적격성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1956년 당시 일간지에 화훼연구가 조동화와 식물학자 이민재가 나라꽃으로서 무궁화의 부적격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요즘도 사회 일각에서 애국가와 국화를 다시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애국가는 작곡자가 친일파이고, 가사도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국화도 무궁화가 국민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조현래-강효백 두 사람의 논쟁이 국민들로 하여금 무궁화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林 山>
■ '두 얼굴의 무궁화' 비판(38) 『동의보감』을 왜곡하여 우리 역사에서 '무궁화'를 제거하다
[두 얼굴의 무궁화] 허준의 1613년 『東醫寶鑑』(국보 제319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은 전부 한자로 기록되어 있으며 한글은 단 한 글자도 없는 한자전용 한의학 서적이다. 즉 구한말 윤치호가 '무궁화 無窮花'로 쓰기 전 '근(槿), '목근(木槿), '근화(槿花)'말고 한글로나 한자로나 '무궁화', '無窮花'로 쓴 문헌은 단 한건도 없다(동아일보 10월 21일 2면 "근화가 무궁화로 변해 국화가 되기까지' 참조). 국기를 제외한 한국의 거의 모든 국가상징을 지배하는 무궁화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허위사실을 게재 유포하는 행위는 근절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p.212) |
《fact check(1)》『동의보감』에 한글은 단 한 글자도 없다고?- 전혀 사실이 아니다.
▶『동의보감』의 의의
-『동의보감』은 25권 25책으로, 원래 1596년(선조 29)에 태의(太醫) 허준(許浚, 1546~1615)이 왕명을 받아 정작(鄭碏) 등과 함께 찬집하였는데, 정유재란으로 일시 중단되었다. 그 뒤 선조가 허준에게 다시 명하여 내장고(內藏庫)의 의서 500권을 주어 계속 편집하도록 하였으며, 1610년(광해군 2년)에 허준이 단독으로 집필하여 완성하였다.
- 의학 내용은 5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경편(內景篇)」(6권)·「외형편(外形篇)」(4권)·「잡병편(雜病篇)」(11권)·「탕액편(湯液篇)」(3권)·「침구편(鍼灸篇)」(1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의보감』은 국내에서도 내의원 개주갑인자(改鑄甲寅字) 목활자로 첫 간행되었으며, 초간본(1613), 호남관찰영 전주장본(全州藏本), 영남관찰영 대구장본, 갑술 내의원 교정 영영개간본(嶺營改刊本, 순조 14, 1814), 갑술 내의원 교정 완영중간본(完營重刊本) 등이 남아 있다.
-『동의보감』은 국내에서 수차례 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동의보감』은 출간 이후 현재까지 중국에서 대략 30여 차례 출간되었고, 일본에서도 두 차례 출간(1724년 초간본과 1799년 재간본)되었다.
- 2015년에 보존상태가 뛰어난 초간본 4종 국립도서관 소장본,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본, 서울대 규장각 소장품(2종)을 각각 국보 제319-1호, 국보 제319-2호, 국보 제319-3호로 승격 지정되었으며, 2009년 7월 제9차 유네스코 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바베이도스)에서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동의보감』의「탕액편」무궁화에 대한 기록
木槿 무궁화 性平 無毒 止腸風瀉血 及痢後渴 ○ 處處有之 作飮服 令人得睡 採無時《本草》花 性涼 無毒 治赤白痢 及腸風瀉血 宜炒用作湯代茶喫 治風《本草》
목근 무궁화 성질이 평(平)하고 독이 없다. 장풍으로 피를 쏟는 것, 이질 후에 목마른 것을 멎게 한다. ○ 곳곳에 있다. 미음을 만들어 마시면 잠을 잘 자게 한다. 아무 때나 채취한다.《본초》꽃 성질이 서늘하고 독이 없다. 적백리 및 장풍으로 피를 쏟는 것을 치료한다. 볶아서 써야 한다. 달여서 차 대신 마시면 풍을 치료한다. 《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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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의「탕액편」중 권3 목부(券三 木部)에는 '木槿'(목근)을 표제로 하여 향명(鄕名)을 한글 '무궁화'로 하여 수피와 뿌리의 껍질 및 꽃을 약재로 사용하는 방법을 기록하였다.
-『동의보감』의「탕액편」에 <本草>로 인용된 문헌은 중국 송대(宋代)에 저술된『증류비급본초(證類備用本草)』(1082, 소위 '증류본초')를 뜻한다.
▶『동의보감』의 탕액편에 한글명이 기록된 이유는?
(1) 약재의 향약화(鄕藥化)의 필요성과 전통
-『동의보감』의 표기 방법은 한글로 번역한 언해본도 국문과 한문을 함께 쓰는 국한문혼용체도 아니며 한자전용의 한의학 서적이 맞다.
- 그런데 한글 이름이 왜 있냐고? 12세기 중국의 송나라가 몽고족의 침입으로 남쪽으로 이동하는 등 국제 정세가 복잡해지자 당시 고려는 중국으로부터 약재를 수입하는 것이 불안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로 하여금 왕실부터 민간인에 이르기까지 사용할 주요 한약재를 한반도에서 나는 향약으로 대체하는 것이 절실했다. 현재의 표현을 쓰자면 약재의 '국산화'였다.
- 13세기 고려 시대에 편찬된『향약구급방』(1236년 추정)은 한자 전용 한의서였음에도 불구하고 약재의 채집과 유통의 편리를 위해 한약명(식물명 포함) 중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사용할 때는 당시 고려에서 사용하는 명칭(향명)을 한자 명칭과 함께 병기하였다.
- 원명(元明) 교체기에 성립한 조선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는데, 이러한 전통은 조선 초기의『향약채취월령』(1431)과『향약집성방』(1433)에서도 유지되었고, 조선 중기의『동의보감』(1613)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조선 시대에 편찬된 주요 한의서인『촌가구급방』(1538),『주촌신방』(1687),『사의경험방』(17세기),『광제비급』(1790),『제중신편』(1799),『의종손익』(1868),『의휘』(1871),『방약합편』(1884) 및『의방합편』(19세기) 등이 모두 그러하다.
- 문헌마다 차이가 있는 것은 한글 창제(1446) 이전에 간행된 문헌의 경우 향명이 이두식 차자(借字)로 표기되었던 반면에 한글 창제 이후에는 한글로 표기되었고, 문헌이 편찬된 시대별로 그 고유 명칭도 변화가 있어 왔다는 것이다.
東醫寶鑑序 我宣宗大王 以理身之法 推濟衆之仁 留心醫學 軫念民瘼 嘗於丙申年間 召太醫臣許浚敎曰 近見中朝方書 皆是抄集庸? 不足觀爾 宜裒聚諸方 輯成一書 且人之疾病 皆生於不善調攝 修養爲先 藥石次之 諸方浩繁 務擇其要 窮村僻巷無醫藥 而夭折者多 我國鄕藥多産 而人不能知爾 宜分類並書鄕名 使民易知 浚退與儒醫鄭碏 太醫楊禮壽 金應鐸 李命源 鄭禮男等 設局撰集 略成肯綮 値丁酉之亂 諸醫星散 事遂寢 厥後
동의보감 서 우리 선종대왕(선조)은 몸을 다스리는 법도를 대중을 구제하는 어진 마음으로 확장시켜 의학에 마음을 두시고 백성의 병을 걱정하셨습니다. 병신년(1596)에 태의(太醫) 허준을 불러 하교(下敎)하시기를, "근래에 중국의 의서를 보니 모두 조잡한 것을 초록하고 모은 것이어서 별로 볼 만한 것이 없으니 여러 의서들을 모아 책을 편찬해야겠다. 사람의 질병은 모두 섭생을 잘 조절하지 못한 데서 생기는 것이니 수양이 최선이고 약물은 그 다음이다. 여러 의서들은 번다하니 요점을 가리는데 힘쓰라. 궁벽한 고을에 치료할 의사와 약이 없어 요절하는 자가 많은데, 우리나라에서는 약재가 많이 산출되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니 종류별로 나누고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명칭을 병기하여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고 하셨다. 허준이 물러나와 유의(儒醫) 정작(鄭碏)ㆍ태의 양예수(楊禮壽)ㆍ김응탁(金應鐸)ㆍ이명원(李命源)ㆍ정예남(鄭禮男)과 관청을 설치하고 책을 편찬하여 대략 중요한 골격을 이루었는데, 정유재란을 만나 여러 의사들이 뿔뿔이 흩어져 일이 마침내 중단되었습니다. 그후…(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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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의보감』의 저술 목적
-『동의보감』은 머리(序)에서 책을 저술하게 된 경위를 적고 있는데, 선조가 1596년에 최초 책 저술을 명할 때 어명(御命)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약재가 많이 산출되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니 종류별로 나누고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명칭을 병기하여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를 한 것이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약재명을 한글로 함께 병기한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동의보감』은 왕가에서 사용하기 위한 의학서였을 뿐만 아니라 전 백성이 이용하도록 할 목적으로 국내에서 산출되는 약재에 대해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명을 약재명과 함께 병기한 것이다.
- 그러한 이유 때문에『동의보감』의「탕액편」'木槿' 항에는 한글명 '무궁화'를 함께 기록한 것이다.
-『동의보감』의「탕액편」'木槿' 항에 한글명 '무궁화'가 함께 병기된 것은 당시 국내 토착화가 이루어져 약재의 국산화가 가능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fact check(2)》 우리의 옛 문헌에 한글로나 한자로나 '무궁화' 및 '無窮花'로 쓴 문헌은 단 한건도 없다고?-전혀 사실이 아니다.
▶ 구한말 이전의 우리 옛 문헌에 한글로나 한자로나 '무궁화' 및 '無窮花'로 쓴 문헌이 단 한건도 없다고?
- 전혀 사실이 아니며, 1241년의『동국이상국집』을 필두로『향약집성방』에서는 '無窮', '無宮', '無窮花'가 기록되었고, 한글 창제(1446) 이후인『사성통해』(1517)에서는 한글로 '무궁화'가 기록되었다.
- 그 이후 여러 종류의 문헌에서도 '무궁화'와 '無窮花'라는 이름은 무수히 등장했다는 점은 앞서 살펴 본 바와 같다.
-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바로잡기(1) ['두 얼굴의 무궁화'에 대한 비판(2)] 참조. ==>https://blog.naver.com/hayun21c/222050092284
《fact check(3)》『동의보감』에 기록된 한글명이 후대에 가필된 것이라고?-전혀 사실이 아니다.
▶『동의보감』의 「탕액편」에 기록된 한글명 '무궁화'가 후대에 가필된 것이라고?
- 필자가 위 <사진1>에 제시된『동의보감』의 두 가지 판본을 근거로 17세기에 저술된『동의보감』에 이미 '무궁화'라는 이름이 기록되었으므로 윤치호에 의해 처음 '무궁화'로 불리게 되었다는『두 얼굴의 무궁화』의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 그러자『두 얼굴의 무궁화』저자는 여러 경로로『동의보감』에 기록된 '무궁화'라는 한글명은 후대에 가필된 것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의보감』판본을 통해 살펴보는 한글명 '무궁화'의 가필 여부
- 국립중앙도서관에서는『동의보감 』의 여러 판본을 데이터베이스로 열람이 가능하도록 제공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1613년(광해군 5년)에 최초로 간행된 초간본『동의보감』도 있으며 그 내용은 <사진4>와 같다.
- 이 판본에 대한 열람은 아래 '국립중앙도서관' 자료 참조.
- 초간본에 木槿(목근)을 '무궁화'로 기록했는데 어떻게 가필이 발생할 수 있는가?
▶『동의보감』에 한글명이 있는 이유를 통해 살펴 보는 한글명 '무궁화'의 가필 여부
-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우리의 옛 의학서는 『향약구급방』(1236) 이래 약재의 鄕藥化(향약화)를 과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구할 수 있는 약재에 대해서는 향약명을 이두표기 또는 한글로 함께 기록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동의보감』은 그 저술을 명한 선조가 1596년에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명칭을 함께 병기하도록 어명으로 지시한 것이어서 한반도에서 구할 수 있고 백성들이 그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한글명이 함께 병기되었다.
- 비단 木槿(목근)을 '무궁화'로 병기한 것뿐만 아니라, 丁公藤(정공등)에 대해서는 '마가목'(지금도 '마가목'이라고 함)이라는 이름을 병기하였고, 樺木皮(화목피)에 대해서는 '봇'(현대어로 '벚나무'라고 함)이라는 이름을 병기하였으며, 楸木皮(추목피)에 대해서는 'ㄱ.래나못겁질'(현대어로 '가래나무껍질'이라고 함)을 병기하였다.
- 의학서에 대한 옛 전통과 헌조의 어명에 의하여 한글명이 병기된 것인데 어떻게 후대에 가필될 수 있는가?
- 이제는 설마 우리의 옛 전통마저 일본의 문화가 이식된 것이거나 선조마저 종일 매국노였다고 우기기라도 할 셈인가?
《fact check(4)》 동아일보 기사에 대한 왜곡
"근화를 훈화(薰花)라고도 하고 혹은 목근화(木槿花)라고도 하엿스니 목근화를 그 당시 무궁화 비슷이 발음하여 오든 모양이람니다. 이는 지금 일본에서 무궁화 즉 근화를 'ムクゲ'로 부르는 것을 보아도 그 당시 발음이 '무궁화' 비슷이 혹은 화뎐되여 '무궁화'라고 속향에서 불러 내려 왓는지도 모른다고 학자들은 말함니다. 現代에 無窮花
그러나 근화 즉 무궁화를 지금과 가치 (無窮花)라고 쓰게 되기는 극히 짧은 근대의 일이라 함니다. 아마 지금부터 이십오륙전 조선에도 개화풍이 불게 되여 양인의 출입이 빈번하게 되자 그 때의 선진이라고 하든 윤치호(尹致昊)씨 등의 발의로 '우리 대한에도 국가(國歌)가 잇어야 된다고' 한편으로 양약대도 세우고 한편으로 국가도 창작(?)할 때 태여난 上帝가 우리 皇上도으사 海屋籌를 山가치 싸흐소서 權이 環瀛에 떨치사 億千萬歲에 永遠無窮하소서라는 노래의 부속되여 생겻다고 하는(?) '東海물과 白頭山이 마르고 달토록'이라는 애국가의 후렴인 '無窮花三千里華麗江山'이라는 구절이 끼일 때에 비로소 근화 즉 무궁화를 '無窮花'라고 쓰기 시작한 듯 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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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 기사의 정확성은?
- 위『동아일보』 기사는 이제 과거의 것으로 하나의 사료(史料)이다.
- 그러한 기사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fact)이지만, 그 사료의 내용이 진실하거나 타당성이 있는지 문제는 별개의 것으로 별도의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한다.
- 신문기사는 지금도 오류가 많은데 취재 방법이 매우 제한적이었던 1925년에는 오죽했겠는가?
- 한자어 '無窮花'가 개항기에 비로소 생겨났다는 위 기사 내용은 옛 문헌의 기록 즉, 이미 『동국이상국집』(1241)에서 '無窮' 및 '無宮'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고『향약집성상』(1433)에서 '無窮花木'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에서 확인되듯이 사실이 아니다.
▶ 1925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 기사의 왜곡
- 그런데 위『동아일보』기사를 자세히 보면, (i) '무궁화'라는 한글 명칭은 한자어 木槿花(목근화)의 옛 발음(그 당시)에서 유래한 듯하고, (ii) 그것을 한자로 '無窮花'로 쓰기 시작한 것은 개항기인 듯하다는 것이며, 개항기에 쓰기 시작한 것은 한자 표기라는 것이고 그것도 "듯 하답니다"라는 추정이다.
- 그런데『두 얼굴의 무궁화』는 "즉 구한말 윤치호가 '무궁화(無窮花)'를 쓰기 전 '근(槿)', '목근(木槿)', '근화(槿花)'말고 한글로나 한자로나 '무궁화', '無窮花'로 쓴 문헌은 단 한건도 없다"면서 한글 명칭도 구한말에 등장했다는 것으로 비약하고, 추정은 확신으로 도약한다.
- 잘못된 기사의 내용이 확대 왜곡되어 제시된 것이며, 이미 정해진 결론을 위해 논리 비약과 왜곡조차 감내하고자 함으로써 생긴 일이 아닌가?
《결론》 다시 한번 역사 왜곡에 대하여
▶ 진정으로『동의보감』에 한글명이 없고 '무궁화'와 '無窮花'가 구한말에 비로소 등장하였다고 믿는가?
-『동의보감』에 한글로 '무궁화'가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국립국어원이 제공하는「우리말샘」만 찾아 보아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 국립국어원의「우리말샘」은 네이버(Naver)의 국어사전에도 연동되어 무료 서비스로 제공되고 있기도 하다.
- '주제가 주제인 만큼 학술논문보다 깊고 정확하게 쓰려고 애썼다'('두 얼굴의 무궁화' p.20)는 것이 이러한가?
-『동의보감』에 한글로 '무궁화'가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 역사에서 '무궁화'를 제거하고 일본의 꽃으로 만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은 아닌가?
- 동아일보 1925년 10월 21일자 기사 인용은 '동아일보'에 언급조차 되지 않은 한글명 '무궁화'라는 우리말마저 일본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왜곡하여 인용한 것은 아닌가?
▶ 어떻게 그리고 도대체 왜?
-『동의보감』은 당대 최고의 의학서이자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의 국보이자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동의보감』이 후대에 가필되었다는 주장은 자신의 왜곡된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의학서와 역사 나아가 국보와 세계문화유산조차 폄훼·왜곡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 한국인으로서 정상적 사고를 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것인가? 도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인가?
- '어처구니없는 허위사실을 게재 유포하는 행위는 근절되어야 한다'면 도대체 무엇이 '어처구니없는 허위사실'이고 무엇이 '근절'되어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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