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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무궁화' 비판(40) 일제의 무궁화 탄압 역사를 왜곡하다 - 조현래

林 山 2020. 11. 28. 19:46

때아닌 무궁화(無窮花)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무궁화는 현재 대한민국의 국화(國花)이며, 나라를 상징하는 국장(國章)이기도 하다. 대통령 휘장(徽章)부터 국회의원 배지, 법원 휘장, 경찰관과 교도관의 계급장 등 나라의 거의 모든 상징은 무궁화이다. 

 

하지만 강효백은 자신의 저서 ‘두 얼굴의 무궁화’에서 이런 무궁화의 위상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배척한다. 무궁화가 우리 고서(古書)에서 거의 ‘피어본 적이 없는’ 꽃이며 오히려 ‘일본의 꽃’이라고 주장한다. 강효백의 주장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상식을 뒤집어엎는 것이어서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조현래(필명)는 강효백의 주장에 대해 친일파 또는 친일 잔재의 척결이라는 과잉 목적의식이 현실과 실제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비판한다. 그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무궁화를 권위주의와 국가의 상징으로 과도하게 선전한 것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지만, 그것이 사실을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어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비판한다. 

 

강효백만 나라꽃으로서 무궁화의 부적격성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1956년 당시 일간지에 화훼연구가 조동화와 식물학자 이민재가 나라꽃으로서 무궁화의 부적격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요즘도 사회 일각에서 애국가와 국화를 다시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애국가는 작곡자가 친일파이고, 가사도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국화도 무궁화가 국민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조현래-강효백 두 사람의 논쟁이 국민들로 하여금 무궁화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林 山>

 

<사진1> 무궁화(경기도 안산)

​ '두 얼굴의 무궁화' 비판(40) 일제의 무궁화 탄압 역사를 왜곡하다

 

 

[두 얼굴의 무궁화] 20. 일제 강점기 일제가 정말 한반도의 무궁화를 뿌리채 뽑고 불살라 버리는 등 탄압했더라면(p.17)

지금도 그렇지만 한국에 이식된 무궁화는 일본에서의 무궁화와 달리 진딧물 등 온갖 곤충들이 잘 끼고 학질 안질 등 각종 병균을 옮기는 일종의 비위생 유해 식물이었다. 일제 관헌이 무궁화를 보면 눈병이 난다고 경고한 것은 무궁화 탄압이 아니라 고육책이자 계도 차원이었다.(p.184)

또한 1919년 3·1운동의 여파로 시작된 '문화통치' 이후 일제는 무궁화 이식 정책 역시 '문화적'으로 전환했다.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무궁화를 심는 대신 한국인의 손으로 무궁화를 심게 하는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고 남에게 시켜서 누굴 죽인다는 차도살인(借刀殺人) 책략을 구사했다.(p.184) 

이래저래 일제 군국주의 찬양무구의 상징꽃 무궁화(일본의 별칭 : 욱일화)는 평화와 통일이 아니라 전쟁과 분열을 데리고 오는 불길한 꽃이다. 하루라도 빨리 이 '트로이 왜화(倭花)'을 뽑아 버려야만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이 다가올 것이다.(p.193)

 

 

 

 

《fact check(1)》 조선총독부 경무국의고등경찰용어사전』은 무궁화를 '어떻게' 그리고 '왜' 기록했을까?

<사진2>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등경찰용어사전』, 조선총독부 경무국(1935. 6.) 중 pp.373~374

 

無窮花

 

無窮花は朝鮮の代表的花として今から二千百餘年前支那に於ても認められた文獻あり. 高麗朝時代には全國民より熱狂的に愛せられ文獻上, 醫學上にも珍重せられ恰も日本の櫻, 英國の薔薇の樣に國花とさられてゐあたが, 李朝に入つて王室の花が李花であつたが爲に無窮花は漸次勢力を失ひ朝鮮民族から疎んぜられてゐた.  然るにの二十世紀の新文明が朝鮮訪れるや有志等は民族思想の鼓吹, 國民精神の統一振作に努め口に筆に個 々の花は 一日にして萎るゝも 無窮花の花は 夏秋にかけ三四箇月每月續けて咲き 他の花に比して 花期長く その高潔と偉人的なるより讚美されるに至つたといふ.   槿花(その項目參照), 木槿 , 堇等異名多し.

 

무궁화

 

무궁화는 조선의 대표적 꽃으로서 지금으로부터 무려 2,100여년 전 중국(支那)에서도 인정된 문헌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전국민으로부터 열광적 사랑을 받았으며, 문학적·의학적으로 진중한 대우를 받았고 일본의 벚꽃, 영국의 장미와 같이 국화가 되었지만 조선에 들어와 왕실화가 오얏꽃으로 정해져 무궁화는 점차로 세력을 잃고 조선민족으로부터 소원해졌던 것이다. 20세기의 문명이 조선에 들어옴에 유지들은 민족사상의 고취와 국민정신의 통일진작에 노력하여, 말과 붓으로  모든 꽃은  하루만에 지는데 무궁화는 여름과 가을에 걸쳐 3, 4개월을 연속해 피고 다른 꽃에 비해 개화기가 길어 그 고결함과 위인적 모습을 찬미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근화(해당 항목 참조), 목근, 근 등의 이명(異名)이 다수 있다.

無窮花江山

 

自尊せる朝鮮の別稱. 他の稱呼と同樣に大正八年以來一般に使用ちれ主として不穩の意を偶する. 「無窮花」の項目參照.

 

무궁화강산

 

스스로​ 높이는 조선의 별칭.  다른 명칭과 마찬가지로 1919년 이래 일반적으로 사용하는데 주로는 불온한 뜻을 가지고 있다. 「무궁화」항목 참조.

無窮花東山

 

「無窮花江山」に同じ. その項目參照.

무궁화동산

 

「무궁화강산」과 같다. 해당 항목 참조.

 

 


▶ 고등경찰과 『고등경찰용어사전』은?

​- '고등경찰'은 프랑스와 독일 등의 경찰제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당, 사회단체 및 정치적 집회와 결사체 등에 대한 사찰과 수사 업무를 가리킨다.

- 일본을 거쳐 갑오경장 이후에 조선에도 도입되었다.
-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각급의 경찰기구에 고등경찰과나 보안과 등을 설치하여 국내외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색출 탄압하고 언론, 출판, 집회 및 결사 등을 단속하였다.
- ​『고등경찰용어사전』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1933년 12월에 처음 발행한 것으로 1935년 6월에 개정되었고, 이후에도 수차례로 보완 개정된 것으로 보인다.
- <사진2>는 국회도서관에 보관 중인 1935년 6월의 개정판으로, 일본국회도서관에 보관 중인 1933년 12월의 초판과 무궁화 관련 부분에서 그 표현과 내용이 동일하다.

▶ 일제는『고등경찰용어사전』에 무궁화를 어떻게 기록했을까?

- 무궁화와 관련한 항목에서 당시 조선총독부와 고등경찰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수사 당국이 무궁화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와 더불어 무궁화에 대한 정책의 단면을 살펴 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다.

○ 일제는 '무궁화'를 조선의 대표적 꽃으로 보고 고려시대부터 사랑을 받은 식물로 보았다.
○ 일제는 조선인들이 '무궁화'를 민족사상 고취와 단결의 매개물로 활용한다고 보았다.
○ 일제는 조선인들이 '무궁화'를 개화기간이 긴 것에 착안하여 무궁(無窮)하다고 하여 찬미한 것으로 보았다.
○ 일제는 '무궁화강산', '무궁화동산' 및,' 무궁화' 등의 관련 용어를 민족사상과 관련하여 사용한 것이 1919년(3·1운동) 이후에 본격화된 것으로 보았다.
○ 일제는 '무궁화강산'과 '무궁화동산'이라는 용어가 민족사상을 나타내는 불온한 것으로 보았고, '무궁화' 항목을 참조하도록 함으로써 무궁화도 곧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으로 연결되는 불온한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근화, 근화삼천리(무궁화삼천리) 및 근역도 무궁화를 참조하도록 함으로써 같은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사진3>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등경찰용어사전』, 조선총독부 경무국(1935. 6.) 중 pp.73~74

《참고(1)》고등경찰용어사전』에서 고려시대에 국화(國花)였던 무궁화가 조선시대에 오얏꽃으로 바뀌었다는 내용은 대한제국의 시기인 1900년에 무궁화가 문관대례복의 상징문양으로 정해졌다가 1910년 강제합병을 통해 무궁화 문양이 사라지고 이왕가의 문양으로 오얏꽃이 잔존하여 사용되었던 역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한제국을 강제병합으로써 조선인들이 인식한 나라꽃으로서의 무궁화 상징을 자신들이 강제적으로 제거했다는 것을 은폐하기 위해 마치 조선시대에 자연스럽게 오얏꽃으로 바뀐 것처럼 역사적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으로 추론된다.​

▶ 일제는『고등경찰용어사전』에 무궁화를 왜 기록했을까?

-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고등경찰용어사전』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고등경찰의 업무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으로 무궁화, 무궁화강산, 무궁화동산, 근화, 근역삼천리(무궁화삼천리) 그리고 근역을 불온한 뜻 즉, 민족의식 및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고등경찰 업무시 유의사항으로 기록한 것이다.

- 일제가 무궁화에 불온한 뜻이 있다고 본 1933년 12월 즈음인 1933년 11월에 강원도 홍천에서 무궁화 재배와 무궁화 창가 등을 통해 자라는 세대에게 민족의식 고취와 함양에 헌신하던 한서 남궁억(1863~1939) 선생의 모곡학교가 압수수색 당하고 70세가 넘은 노인을 구속시킨 것이 단순히 우연이었겠는가?   

▶ 차도살인(借刀殺人)의 책략?

 

<사진4>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등경찰용어사전』, 조선총독부 경무국(1935. 6.) 중 표지

-『두 얼굴의 무궁화』주장에 따르자면, 무궁화를 탄압하는 듯한 시늉을 하여 오히려 나라꽃(국화)로 인식시키고 심게 하는 차도살인의 책략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 그러나『고등경찰용어사전』은 그 표지에 '部外秘'(부외비)라고 기록하여 고등경찰 업무를 다루는 부서 외에는 보지 못하는 비밀문서로 표시하고 관리했는데, 고등경찰 업무를 담당하는 경찰들만 이 내용을 숙지하여 탄압 및 수사에 활용한 것이었다.

- 차도살인의 책략이었다면 왜 이를 부외비로 관리할 것이 아니라 당연히 널리 알려 탄압당한다는 인식을 갖도록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 일제가『고등경찰용어사전』을 부외비로 취급한 것은 무궁화가 민족의식으로 직결되고 있었으므로 탄압을 하기는 하되 이를 공식화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i) 당시 한반도에 이주한 일본인 거주자가 50만명이 넘었고 무궁화는 상당한 일본인들에게도 원예용 재배식물이나 약용식물로 알려져 있었으므로 꽃을 직접적으로 탄압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자국민을 설득하기도 어려웠으며, (ii) 조선총독부는 1932년에 발의되어 1936년까지 조선 농민의 민심을 달래기 위한 목적으로 대대적인 '약초재배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무궁화가 주요한 약재 중의 하나였으므로 민심 악화를 우려하여 무궁화를 불온하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어려웠다고 보는 것이 차라리 합리적 설명이 아닌가?[일제강점기 약초재배운동에 대해서는 이정, 「관료들의 천국: 일제강점기 약초재배운동의 조화로운 동상이몽」,『역사학보 제238집』(2018.6.), p.299 이하 참조].

 

 《fact check(2)》 일제는『고등경찰용어사전』작성 이전에는 무궁화를 어떻게 취급했을까?

▶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는?

<사진5>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무궁화에 대한) 불허가 출판물 및 삭제기사 개요' 등 문서」

- 국사편찬위원회가 보관하고 있는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의 문서 중「'(무궁화에 대한) 불허가 출판물 및 삭제기사 개요'등 문서」에 따르면 일제는 1920년대 중반부터 패망하기 직전까지 각종 출판물과 신문기사에 대해 무궁화가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으로 연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 계속하여 검열, 압수, 삭제 및 불허가 처분으로 대응했다.

- 1919년 3·1운동 이후 무단통치가 문화통치로 바뀌자 그동안 억눌려 왔던 조선인들의 무궁화에 대한 인식이 각종 출판물과 신문기사 등을 통해 봇물처럼 터졌고, 이에 일제는 검열, 압수, 삭제 및 불허가 처분으로 대응한 것이다.

- 일제가 이와 같이 각종 출판물과 신문기사 등을 검열, 압수, 삭제 및 불허가 처분으로 대응한 것을 무궁화(無窮花)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근화(槿花)와 槿域(근역)에 대해서도 동일하였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중「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참조].

 

 《fact check(3)》 그 많았던 모곡학교의 무궁화는 어디로 다 사라졌을까?

 

▶ 무궁화 재배와 무궁화 창가 등을 통해 민족의식의 함양에 헌신하던 한서 남궁억 선생은?

 

​- 1933년 11월 4일 강원도 홍천 모곡학교에는 일단의 경찰이 들이닥쳐 '무궁화 선전삐라'(무궁화 판매 광고문안), '무궁화 도안', '무궁화 시' 그리고 '무궁화가 든 액자'를 압수하고 칠십이 넘은 노인을 체포 구속하였다.

- 남궁억 선생이 체포 구속된 것으로 일제가 소위 '무궁화 재배사건'으로 명명한 사건이다.

- 일제가『고등경찰용어사사전』을 작성하여 배포하기 직전이고,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제를 향해 폭탄을 투척한 윤봉길 의사의 유촉서에 '무궁화 삼천리 우리 강산'이 언급된 때로부터 1여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 그 많던 모곡학교의 무궁화는 어디로 다 사라졌을까?

 

- 한서 남궁억 선생이 모곡학교에서 키우던 7만여 그루의 무궁화에 대해 일제는 모두 없애라는 명령을 내리고 일제 당국이 서로 역할을 나누어 주문과 분배라는 유상거래의 형식으로 무궁화 재식재하는 것처럼 꾸몄으나, 실제로는 강제로 뽑히고 불태워 사라졌다는 사실은 바로잡기(37) '그 많던 모곡학교의 무궁화는 어디로 다 사라졌을까?'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fact check(4)》 모곡학교의 무궁화가 뽑히고 불태워졌던 그 후 무궁화의 운명은?

 

▶ 모곡학교의 무궁화가 뽑히고 불태워졌던 그 후 무궁화의 운명은?

- 일제는『일본경찰용어사전』에서 이미 무궁화(無窮花), 무궁화동산(無窮花東山), 무궁화강산(無窮花江山), 근화(槿花), 槿花三千里(근화삼천리) 그리고 근역(槿域)이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불온한 뜻'이 있다는 것을 책자로 만들어 고등경찰 업무를 행하는 전국 경찰서에 하달했다.

- 한서 남궁억 선생에 대한 소위 '무궁화 재배사건'은 언론과 전국적 관심이 집중되었던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문과 분배라는 형식을 거쳤지만 실제로 무궁화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뽑히고 불태워졌다.

- 그렇다면 전국에 식재되어 재배되던 무궁화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 일제가 전국의 모든 무궁화를 강제적으로 제거하라는 식의 지시나 명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남아있거나 발견되지는 않는다.

- 그러나 전국의 고등경찰이 조선 민중의 건강을 우려하여 고육책이자 계도차원의 교육을 했겠는가? 아니면 공공연하게 또는 암암리게 무궁화를 제거했겠는가?

-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을 거짓으로 가린다고 하여 가려질 수 있는가? 역사적 사실을 가리고자 하는 이들은 과연 누구이고 무엇을 옹호하는 것인가?

 

 모곡학교의 무궁화가 뽑히고 불태워졌던 그 후 무궁화에 대한 신문기사는?


-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일제가 문화통치로 지배 형식을 바꾼 후 1920년 3월 6일에 조선일보를 필두로 1920년 4월 1일에 동아일보가 창간되는 등 조선인이 운영하는 신문사들이 속속 창간되었다.

- 이와 더불어 무궁화를 나라꽃(국화)으로 인식하는 것부터 단순한 소설의 등장인물의 이름에 이르기까지 무궁화는 곳곳에 등장하고 사용되었다.

-1920년 3월 6일에 조선일보가 창간된 날부터 1940년 8월 10일에 일제에 의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강제폐간되는 시점까지 '무궁화'를 검색어로 하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검색하면 전체 464개의 기사를 찾을 수 있다[네이버가 제공하는 '뉴스라이브러리'에서 키워드검색으로 '무궁화'를 검색함]

- 문화통치에 의해 약간의 숨통이 트이자 폭발하듯이 분출된 무궁화에 대한 재논의가 일제에 의해 어떻게 관리·통제되다가 사라졌는지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기사를 시기별로 살피면 그 개략을 알 수 있다.

 

○ 1920.3.6.~1940.8.10.까지 기간 동안 '무궁화'가 언급된 전체 기사 : 464개

○ 1920.3.6.~1929.12.31.까지 기간 동안 '무궁화'가 언급된 기사 : 316개

○ 1930.1.1.~1940.8.10.까지 기간 동안 '무궁화'가 언급된 기사 : 148개

○ 1930.1.1.~1935.2.1.(남궁억 선생에 대한 유죄판결이 기사화된 때)까지 기간 동안 '무궁화'가 언급된 기사 : 93개

○ 1935.2.2.~1940.8.10.까지 기간 동안 '무궁화'가 언급된 기사 : 55개

 

- 형식적이나마 문화통치의 틀이 유지되었던 1920년대의 무궁화에 관한 기사가 전체 464개 중 316개였던 반면에 1931년 만주사변 그리고 1937년 중일전쟁 등을 거치며 일제의 폭압정치가 다시 맹위를 떨쳤던 1930년대에는 무궁화에 관한 기사가 그 절반에도 되지 않는 148개로 격감되었다.

- 1930년대 전체 기사 중 한서 남궁억 선생에 대한 '무궁화 재배사건'이 1935년1월 31일에 유죄로 선고되고, 그 내용이 기사화된 1935년 2월 1일까지 무궁화 관련 기사는 93개였지만, 그 이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되던 1940년 8월 10일까지 무궁화 관련 기사는 55개로 대폭 축소되었다.

- 일제는 이 과정에서 끊임없이 무궁화에 대한 기사와 언급을 검열, 압수, 삭제 및 불허가 처분으로 대응하였다는 것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으며, 폭압정치가 강화될수록 자율적인(?) 검열도 수반되었음을 어렵지않게 추론할 수 있다.  

- 무궁화가 일제에 의해 암암리에 식재되고, 내한성을 견디는 품종이 개발되었으며(pp.182~183), 고육책으로 계도되었고, 차도살인으로 권유되었다면 왜 무궁화에 대한 기사를 일제의 폭압정치가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더 융성하고 풍성하게 꽃 피우기는 커녕 제거되고 사라져가야 했을까? 

 

▶ 일제의 폭압정치와 무궁화

 

- 일제는 1937년 7월 7일 노구교(마르코폴로 브릿지) 사건을 구실로 중국과 전쟁을 개시하면서, 그 전후에 문화통치의 껍질을 완전히 벗고 수양동우회 사건 등을 일으켜 검속을 시작하는 등 전시 폭압정치로 전환하였다.

- 일제는 폭압정치를 강화하면서 독립운동가 차미리사(車美理士, 1879 ~ 1955) 여사가 민족의식 함양과 여성교육을 위해 설립한 근화여학교(槿花女學校)에 대해 무궁화를 뜻하는 '槿'(근)자가 불온하다 하고 운동장에 무궁화를 심은 것에 대해서 시비를 걸어 학교 폐쇄를 압박하였고, 결국 1938년10월 1일에 학교명을 '덕성여자실업학교'(현 덕성여자대학교)로, 1938년 10월 15일에 재단법인의 명칭도 '근화학원'(槿花學院)에서 '덕성학원'으로 바꾸어야 했다.[이에 대해서는 최은희,『씨뿌리는 여인 차미리사의 생애』, 청구문화사(1957), p.71 참조] 

- 1938년에 이르러 동아일보 제호(題號)에 있던 무궁화 도안이 일제의 검열에 걸렸고, 1938년 2월 10일자 신문부터 한반도와 무궁화 그림이 삭제되었으며 동아일보는 그 자리를 가로줄로 메운 제호를 실어야 했다.

- 1941년 9월에 이러서는 임용태(1917~2008)라는 젋은 청년이 "백두산과 황해의 물이 마르고 달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한 강산 대한인은 대한으로 영구히 보존하세"라는 문구를 복사하여 퍼뜨렸다는 이유로 체포·구속하고 갖은 고문을 가한 다음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실형 2년을 선고하여 투옥했다[이에 대해서는 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豐川龍泰」,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참조.==>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ia_4539_3519 ].

 

 

 

 《결론》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차마 하지 못한 일을 『두 얼굴의 무궁화』가 행하다. 

 

▶ 일제가 조선 민중의 건강을 우려하여 계도하였다고?

 

-『고등경찰용어사전』을 작성하여 무궁화와 그 관련 용어들을 모두 불온한 것으로 취급하고, 일본 관헌이 무궁화를 보면 눈병이 난다고 경고한 것이 조선 민중을 위한 계도 차원이었다면, 남궁억 선생과 임용태 선생을 투옥한 것 역시 조선 민중을 위한 계도였는가?

- 일제가 차도살인의 책략으로 무궁화의 식재와 보급을 권유하였다면 왜 조선인 스스로 무궁화을 우대하였는데 근화여학교의 명칭을 강제로 변경하도록 하고, 동아일보 제호를 검열하여 삭제하였으며, 각종 출판물과 신문기사의 내용을 검열, 압수, 삭제 및 불허가 처분을 했다는 말인가?

- 우리가 일제의 고육책에 대해 공감하고 일제의 행동에 대하여 감사라도 표해야 한다는 말인가?

 

▶ 일제도 차마 하지 못한 일을『두 얼굴의 무궁화』가 행하다,

- 가장 잔악한 형태로 식민지를 유지·통치한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무궁화를 불온하다며 탄압하고자 할 때에도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부외비'로 취급했으며, 모곡학교의 그 많던 무궁화를 제거할 때에도 주문과 분배라는 형식을 유지했고, 차마 조선 민중이 보는 앞에서 무궁화를 뽑아야 한다는 것을 공공연히 주장하지는 못하였다.

- 그런데 『두 얼굴의 무궁화』는 하루빨리 무궁화를 뽑아 버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그것도 거짓과 왜곡에 근거하여, 출판물을 통해 공공연히 선동한다.

- 도대체 무궁화를 일본에서 별칭으로 '旭日花'(욱일화)라고 한다는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혹시라도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두 얼굴의 무궁화』의 주관적 바램은 아닌가?

- 차마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하지 못한 일을 식민지가 종식된 지 70년도 더 지난 시점에서 그것도 한국인의 글에서 나오는 이 현실이야말로 일제의 차도살인이 아닌가?

- 아! 무궁화여!!  순국선열들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