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이슈 화제

'두 얼굴의 무궁화' 비판(39)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는 어떻게 군국주의자가 되었는가? -조현래

林 山 2020. 11. 24. 13:48

때아닌 무궁화(無窮花)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무궁화는 현재 대한민국의 국화(國花)이며, 나라를 상징하는 국장(國章)이기도 하다. 대통령 휘장(徽章)부터 국회의원 배지, 법원 휘장, 경찰관과 교도관의 계급장 등 나라의 거의 모든 상징은 무궁화이다. 

 

하지만 강효백은 자신의 저서 ‘두 얼굴의 무궁화’에서 이런 무궁화의 위상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배척한다. 무궁화가 우리 고서(古書)에서 거의 ‘피어본 적이 없는’ 꽃이며 오히려 ‘일본의 꽃’이라고 주장한다. 강효백의 주장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상식을 뒤집어엎는 것이어서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조현래(필명)는 강효백의 주장에 대해 친일파 또는 친일 잔재의 척결이라는 과잉 목적의식이 현실과 실제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비판한다. 그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무궁화를 권위주의와 국가의 상징으로 과도하게 선전한 것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지만, 그것이 사실을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어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비판한다. 

 

강효백만 나라꽃으로서 무궁화의 부적격성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1956년 당시 일간지에 화훼연구가 조동화와 식물학자 이민재가 나라꽃으로서 무궁화의 부적격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요즘도 사회 일각에서 애국가와 국화를 다시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애국가는 작곡자가 친일파이고, 가사도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국화도 무궁화가 국민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조현래-강효백 두 사람의 논쟁이 국민들로 하여금 무궁화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林 山>

 

<사진1> 무궁화(경기도 안산)

​ '두 얼굴의 무궁화' 비판(39)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는 어떻게 군국주의자가 되었는가?

 

 

[두 얼굴의 무궁화] 일본 군국주의 대부, 야카다타 아리토모의 천양무궁 무궁화

청일전쟁 개전 즈음에 일본 전역에서는 '천양무궁' 구호와 함께 '천양무궁'의 상징꽃 무궁화 관련 문학예술 활동이 폭증하였다. 하이쿠의 개혁 시대를 불러온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 1867~1902)는 청일전쟁시 종군기자로서 수많은 무궁화 하이쿠들을 발표했다.

 

고지대와 아침 해가 이렇다 하네 무궁화 울타리*미주178)-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의 대표 하이쿠 - 청일전쟁 참전시 1894년 10월 작                                                               

마사오카는 35세의 짧은 생애에 무궁화를 주제로 한 하이쿠만 58수나 발표했는데 그 중 두 수는 비석에 새기어 사람의 무덤보다 높은 목근총(木槿塚)으로 숭배받고 있다.*미주179).(p.224)

*미주178) 山の手や朝日さしざる木槿垣(p.409)

*미주179) https://ja.wikipedia.org/wiki/%E6%AD%A3%E5%B2%A1%E5%AD%90%E8%A6%8F (p.409)

 

 

 

《fact check(1)》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와 하이쿠(俳句) 그리고 청일전쟁은?

 

▶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는?

-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1867~1902)는 하이쿠(俳句), 단가, 신체시, 한시, 소설, 평론, 수필 등 다방면에 걸쳐 창작활동을 하여 일본의 근대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인 문학가 중 한 사람이다.

- 1884년에 동경대학 예비문(제일고등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하이쿠(俳句)를 짓기 시작했다.

- 1889년에 결핵으로 인한 각혈이 시작되었으며 자신을 두견새에 빗대어 '시키(子規)'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890년에 제국대학(帝國大學) 철학과에 진학했지만, 후에 문학에 흥미를 가져 1891년 국문과로 전과하여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 1892년에 일본신문사(一本新聞社)에 입사하여 생계를 삼았다.

- 1895년 4월에 랴오둥반도(遼東半島)로 건너가 청일전쟁에 기자로서 종군했으나 상륙 이틀 후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어 5월 귀국길에 올랐다가 각혈이 시작되어 병석에 눕게 되었다.

- 1895~1902년까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였으며, 생의 마지막까지 하이쿠, 단가 등 다방면에 걸친 창작활동을 하다가 3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 형식과 수사기교에 얽매인 옛 전통을 부정하고 하이쿠·단가 개혁운동을 일궈냈고, 단시형 근현대 문학의 방향을 자리매김한 개혁자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20,000수가 넘는 하이쿠(俳句) 작품을 남겼다.
- 그의 작품세계는 19세기 유럽 자연주의의 영향을 받아 사생(寫生)과 사실(實實)을 통한 현실 밀착형 문학세계를 일구어 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또한 병석에서 죽음을 앞두고도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객관화하고 사생한 뛰어난 인생기록으로도 유명하다.
 

▶ 하이쿠(俳句)는?

 

- 하이쿠(はいく, 俳句)는 일본 고유의 짧은 시 형태로 5·7·5의 17음()으로 이루어지며, 계절을 나타내는 단어인 키고(語, 계절어)와 구의 매듭을 짓는 말인 키레지()를 가진다.

- 특정한 달이나 계절의 자연에 대한 시인의 인상을 묘사하는 서정시의 한 장르로 분류된다.

- 일본 고대의 전통 문학에 뿌리를 둔 하이쿠는 형식과 수사기교에 지우쳐 진부해졌으나 마사오카 시키 등의 개혁운동에 힘입어 사생과 사실을 통한 현실 밀착형 문학으로 변화하였다.

- 일본의 하이쿠에서 木槿(목근, 무궁화)이 시어로 종종 등장하는 이유는 여름과 초가을에 꽃을 피우므로 계절을 나타낼 수 있는 중요 키고()이기 때문이며, 木槿(목근)이 시어로 등장하는 경우 그 시는  여름 또는 초가을의 서정을 나타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 청일전쟁은?

 

- 청일전쟁(淸日戰爭)은 1894년 7월.~1895년 4월까지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 1894년 6월에 조선에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에 한반도에 동시 출병함으로써 양국간의 군사충돌이 발생하였다.

- 1894년 7월 23일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고, 본격적인 전투는 7월 25일. 일본 해군이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나라 함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 일본은 연전연승으로 1894년 9월 17일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1895년 2월 중국 본토인 산둥반도(山東半島)를 공격하여 승리하였으며, 1895년 3월 랴오동반도(遼東半島)를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 1895.4.17.에 일본과 청나라는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청일강화조약(시모노세키조약, 下關條約)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결하였으며, 청국은 2억냥의 배상금을 랴오둥반도·대만·펑후(澎湖)열도 등을 일본에 할양하였고. 일본은 조선에 대한 정치, 군사, 경제적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fact check(2)》 무엇이 왜곡되었을까?

 

 마사오카 시키가 발표한 하이쿠에서 木槿(목근)이 天壤無窮(천양무궁)을 상징한다고?-전혀 사실이 아니다.

- 마사오카 시키의 하이쿠에서 木槿(목근)은 키고(語, 계절어)로서 여름 또는 초가을의 계절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된 것이다.

- 소개된 "山の手や朝日さしざる木槿垣"이라는 하이쿠(俳句)도 여름 또는 초가을에 무궁화 울타리에 아침 햇살이 비치는 풍경을 노래한 것이다.

-『두 얼굴의 무궁화』, p.368 이하에 소개된 마사오카 시키의 하이쿠도 모두 여름 또는 초가을의 풍경과 생활 그리고 서정을 노래한 것이다.

- 그의 하이쿠(俳句) 어디에서도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天壤無窮(천양무궁)의 뜻으로 木槿(목근)을 사용한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 마사오카 시키의 하이쿠에서 木槿(목근)이 天壤無窮(천양무궁)의 뜻으로 사용된 것이 있다면 그 사례를 밝혀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두 얼굴의 무궁화』는 마사오카 시키를 소개하면서  "'천양무궁' 구호와 함께 '천양무궁'의 상징꽃 무궁화 관련 문학예술 활동이 폭증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마사오카 시키가 청일전쟁 당시 종군기자로서 수많은 무궁화 하이쿠를 발표했다고? -전혀 사실이 아니다.

​- 마사오카 시키가 생계를 위하여 일본신문사 기자로 생활하였고, 1895년 4월에 종군기자로서 랴오둥반도에 취재 목적으로 간 것은 맞다.

- 그러나 마사오카 시키는 1895년 4월 10일에 취재를 위해 랴오둥반도로 향하는 배에 승선하였다. 하지만, 종군기자로 랴오둥반도에 도착한 직후인 1895년 4월 17일에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더 이상 전쟁에 대해 취재할 내용이 없었고, 그는 5월에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도중에 그는 결핵으로 다시 각혈을 했고, 이후 병석에 누워 지내야 했다[이에 대해서는 久保田正文 編, 正岡子規 著,『正岡子規集』, 筑摩書房(1965), p.430 참조].

- 마사오카 시키가 청일전쟁 종군기자로서 취재한 내용은 당시 신문에「진중일기」(陣中日記)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으며, 그 내용은 正岡子規, 『從軍紀事』, 靑空文庫(2015)에서 재출간되었는데, 이 책 어디에도 무궁화 관련 하이쿠는 존재하지 않는다.

- 앞서 살핀 바와 같이 하이쿠에서 木槿(목근)은 여름 또는 초가을의 서정을 나타내는 계절인데 마사오카 시키가 종군기자로 취재를 한 것은 1895년 4월~1895년 5월 사이의 기간이므로 木槿(목근)이 그의 하이쿠에 등장할 이유가 없었다.

 

 마사오카 시키의 "山の手や朝日さしざる木槿垣"이라는 하이쿠가 1894년 10월에 창작된 것이라고?-전혀 사실이 아니다.

​- 마사오카 시키의 "山の手や朝日さしざる木槿垣"라는 하이쿠가 쓰여진 것은 명치 30년(1897)이다[이에 대해서는 正岡子規,『子規全集 第3卷』講談社(1975), p.86 참조].

​- 마사오카 시키가 청일전쟁 종군기자로 취재한 기간은 1895년 4월~1894년 5월이므로 1894년 10월에 그는 청일전쟁과 직접적 관련이 없었다.

 마사오카 시키의 무궁화 구비(句碑)가 목근총(木槿塚)으로 불리운다고?-전혀 사실이 아니다.

​- 마사오카 시키가 생전에 창작한 하이쿠는 20,000수가 넘는다.

- 그의 하이쿠에서 木槿(목근)이 계절어로 나타난 것이 58수라고 하더라도 그가 저술한 전체 아이쿠의 수에 비하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 미주179)로 소개된 인터넷사이트는 마사오카 시키를 소개하는 일본 위키피디아(ウィキペディア, Wikipedia)의 페이지로 그 어디에도 목근총(木槿塚)에 대한 내용은 없다.

- 일본에서 목근총(木槿塚)은 17세기 하이쿠 시인으로 유명한 마쓰오 바쇼(​蕉, 1644 ~1694년)의 "道のべの木槿は馬にくはれけり"(길가에 핀 무궁화는 말에게 먹혀버렸네)라는 하이쿠를 새긴 구비(句碑)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 마사오카 시키가 청일전쟁 당시 기자로서 종군한 짧은 기간을 근거로 그를 군국주의자로 만들고, 그것에 무궁화를 연결하기 위해 관련없는 내용을 서로 연결시켜 놓은 것으로 이해된다(정말로 정교하게도 일본의 군국주의자 야카다타 아리토모를 기술하는 내용에 살짝 마사오카 시키를 끼워 넣어 기술하고 있기도 하다).

 

 

《결론》 다시 한번 왜곡에 대해서 묻다.

 

 

 

▶ 중국에서 전래된 무궁화는?

 

- 중국 남서부(또는 남중부)가 원산지인 무궁화는 우리에게 전래되어 槿花鄕(근화향), 槿域(근역) 그리고 槿花世界(근화세계) 등 우리나라를 일컫는 인식과 문화가 생겨났으며, 無窮花(무궁화)라는 명칭에서 순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피는 특징을 살피는 중국과는 다른 문화가 생겨났다.

- 일본도 중국에서 전래되어 17세기경부터 차를 마실 때 꽃을 꺾어 꽂꽂이(茶花)로 사용하거나 단가 형태의 하이쿠를 지을 때 계절어로서 여름 또는 초가을을 상징하는 문화가 생겨났다.

- 우리는 근대화의 시기에 독립국가를 유지하지 못하고 식민지를 경험했으나, 일본처럼 무궁화 꽃을 꺾어 차를 마실 때 꽂꽂이(茶花)로 사용하지도 않았으며, 일본의 독특한 하이쿠 형식의 시가가 우리에게 이식되지도 않았고 일본처럼 특정한 계절을 대표하는 시어로 사용하는 문화를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 한중일은 각자의 인식과 문화로 무궁화와 관계를 맺어 왔으며 각자의 역사를 형성해 왔다. 일본도 일본의 무궁화 문화가 있을 뿐이며, 우리도 우리의 역사에서 형성한 우리 문화의 한 부분으로서 무궁화가 있을 뿐이다.

- 칼 폰 린네(Carl von Linne, 1707~1778)가 무궁화에 대한 학명을 Hibiscus syriacus Linne(1753)로 명명할 때 그가 무궁화를 본 장소는 유럽이었으며, 무궁화는 오래전에 세계로 퍼져나가 각국에서 화훼식물로 키워 왔고 그에 따라 각 나라가 형성한 각자의 문화가 있다.

▶ 다시 한번 왜곡에 대하여

 

- 마사오카 시키가 어떤 형식으로 어떤 내용의 시를 지었던 그것은 일본 문화의 영역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이식되거나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 마사오카 시키가 하지 않은 일을 마치 군국주의와 연관하여 무궁화를 노래한 것처럼 세세한 사실을 꼼꼼하게 왜곡하여 무궁화에 대한 군국주의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행위가 왜 필요한가?

-두 얼굴의 무궁화저자에게 다시 묻노니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 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