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 이래 지저스 크라이스트처럼 인류에게 근본적인 화두를 던진 사람이 있을까? 기독교는 크라이스트를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온 신(神)이자 신의 아들인 존재로 숭배하며 삼위일체 중 제2위인 성자(聖者)로 보고 있다. 크라이스트의 희생은 성금요일, 그의 부활은 부활절로 기린다. 성금요일은 바로 크라이스트가 십자가형을 받은 날이다. 성금요일을 맞아 지저스 크라이스트가 매달린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일까? 김인국 마르꼬 연수성당 주임신부는 '내 불행을 보아라!'라는 제목의 강론을 통해서 크라이스트가 십자가를 짊어진 의미에 대해 쉽게 설명하고 있다. 한번 읽어보자.<林 山>
내 불행을 보아라!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중에서 삼손의 아리아)
1. 메신저와 메시지
예수님의 수난기를 읽다가 희극일까 비극일까 하는 대목을 만난다. “진리가 무엇이오?”(요한 18,38) 하고 묻던 자가 “진리를 증언하러 태어나, 진리를 증언하려 세상에 오신”(요한 18,37) 분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있으라. 그대 부디 살아있으라. 그대 있음에 내가 있으니” 하시던 분을 거슬러 “없애버리시오. 없애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요한 19,15)라고 하기도 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리.
사람들이 사람 하나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 없애려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메시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메신저’를 처치한 사건이 성금요일의 줄거리이다. “메시지를 반박할 수 없으면 메신저를 공격하라”는 말 그대로였다. 힘을 가진 세력은 메시지가 맘에 들지 않을 때 흔히 메신저를 공략한다. 뒤를 캐서 이거 봐라, 이런 사람이 하는 말이 별 수 있겠냐, 하는 식으로.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를 세상은 그렇게 파묻어 버렸다. “성전을 허물어뜨려라. 내가 다시 세우리라”고 하신 말씀을 견디지 못하고 그분의 몸을 무너뜨리고 말다니 오, 하느님! 저희가 무슨 짓을 했습니까?
2. 새롭게 가까이
예수님의 메시지는 아주 단순했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하느님은 새롭게 가까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하늘 높은 데서 먼지 날리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 나실 때 누추한 데서 나셔서 살아생전 부자로는 못 지내시고 죽으실 때의 그 모습은 말도 못하게 가난하셨다.
사방에서 목을 조르려 달려들자, 죽음을 직감하신 예수님은 이 사태를 어떻게 할 것인지 고뇌하셨다.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데 어찌해야 옳으냐. 갑자기 혼자가 됐다. 하느님 아버지는 침묵하셨고 동행하던 제자들은 깊은 잠에 빠졌다. ‘하늘의 침묵’과 ‘땅의 방관’ 사이를 오가며 이 잔을 피하게 해 주소서 하시던 예수님은 피땀을 흘린 끝에 결단을 내리셨다.
3. 강생의 완성, 십자가라는 밑바닥
오냐, 기왕지사 여기까지 내려왔으면 더 내려가기로 한다. 지금까지 아흔아홉을 위해 뛰었다면 마지막 순간은 남은 하나와 함께 지내기로 하자. 그들은 누구였나? 십자가에 달리고 보니 좌우 양옆에 사형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왼편의 죄수가 빈정거렸다.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당신도 살려보고 우리도 살려보시오!”(루카 23,39). 오시려거든 진즉에 오시지 이렇게 늦게 오셨느냐는 원망이 섞인 투정이었다. 이 수간 예수님은 생각했다. 잘 왔구나. 오기를 잘 했구나. 십자가, 거기는 그 누구도 가려하지 않는 무서운 곳. 춥고 습하고 어두운 곳. 그리하여 에서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 패자부활전에서도 제외된 자, 저주 받은 자, 버림받은 자, 이번 생은 망했어 하는 자, 하느님께 파문당한 자,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 바깥의 어둠 속에 내버려진 자, 그런 사람들이 아무 소리 못하고 그냥 죽어가야 하는 자리였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자들이 치를 떨며 죽어가는 자리였다.
예수님이 더 내려갈 곳이 없는 맨 밑바닥에 이른 십자가 죽음을 나는 강생의 완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얼마 전 십자가 프로젝트에 관한 말씀을 듣자마자 베드로가 스승을 붙잡고 강하게 반발했다. “주님, 그래서는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마태 16,22)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이것들은 사람이 아니란 말이니?” 예수님은 사형수들 가운데 하나였다. 좌우의 사형수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이 점을 포착한 오른편의 죄수가 말한다. “보아라. 저분의 불행을! 우리와 같은 신세가 되셨구나.”(루카 23,40) 예수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으신다. “보아라, 나의 불행을!” 너희가 보는 대로 나는 너희와 같이 불행하다. 하지만 이것이 나의 기쁨이며 행복이다. 이렇게 내가 서럽고 서러운 너희와 함께 있으니 나를 보고 “새롭게 가까이” 너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깨닫기 바란다. 내가 이 밑바닥까지 내려온 것은 바로 이 말을 해주기 위해서다. “오늘 너희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루카 23,43)
4. 놀라우셔라, 우리 하느님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19,30)였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강생의 마침표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하느님은 놀랍고 놀라우시다. 당신 백성을 구하시러 투덜거리는 바닷물 속에서도 길을 마련하시니 말이다.
“주님은 당신 백성을 구하시러 나가셨나이다. … 투덜거리는 바닷물 속에서도 주님은 길을 마련하셨나이다.”(하바 3,15)
예수님 홀로 무덤에 묻히신 이 밤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밥이다. 성금요일의 밤!
글쓴이 김인국 마르꼬 연수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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