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임씨(長興林氏) 38

삼송정중건기(三松亭重建記) - 임영기(林永祈)

惟我先祖三松先生乃長興君諱世殷之后判書公諱得荑之曾孫也. 克趾先美承襲世訓忠孝之德行義之事爲人所推而早年登科任在鴻山. 聞端宗遜位因卽解緩賦歸于?濱池洞. 池洞卽先生之王考尙州公藏修之地也. 因居數世而復移寓於襄陽現山之西而隱居焉署其里曰栗里. 又作亭數間以爲終老捿息之計而扁其亭曰三松. 蓋取諸陶靖節三逕松猶存之義則彭澤鴻府符合千載也. 先生播芬遺躅在於斯亭而子孫世數春絃夏誦必肆業於斯以爲推遠感慕之所矣. 不意中偶然失火棟宇扁墨遺文舊跡盡入於灰燼之中. 抑有所門祚衰薄而然歟. 抑有子孫無祿而然歟. 文不可復徵也軒不可復輯也噫. 亭之興廢事之顯晦在於後承肯構善述之道而未遑重創者幾乎三百年于玆. 而先生之高標竣節湮沒於三百年之間豈不爲子孫感創之恨乎. 歲乙巳春諸老少咸集于永思齋峻發僉論以圖重建. 隨力出財始克設役而舊址則圮於風雨地甚陜不可復營乃移築於松谷蓮堂之上卽取其密邇乎先齋也. 越明年..

삼송정기(三松亭記) - 박장호(朴章浩)

夫事有顯晦理有屈伸莫不有時與數存焉則不可專諉於天理而亦有責於人事者也. 林氏之先古有三松先生者卽牧使公諱雨所之令孫也. 光陵之世以文章氣節爲人所推而早年釋褐選入藝苑. 人以濟川霖雨之材期之而世與心違未能展布其所蘊沈於下位. 吁可惜哉. 當鴻山賊歸之日卜居於襄陽花嶺之下署其里曰栗里. 所居之傍山川明暟林樾茂美作亭數間以爲終老之計而名之曰三松. 蓋取義於陶靖節三逕之松也. 子孫世守肄業於斯講誦於斯而不幸中遭龍蛇之變隆棟彩甓擧入於兵燹之中所餘邱墟只爲兎葵鷰麥之場者厥惟久矣. 其爲後承之追感當何如哉. 歲丙午本孫老少合席竣議以圖重建而隨力出財相地於東山之上則取其密邇乎先齋也. 始役抄春而僉執事經紀有方. 輸材運瓦不煩民力而工告訖. 可謂肯構善述者也. 日林斯文致佐甫袖其記亭之文而責余以一言. 顧此寡陋惡敢當. 是寄而旋念念祖之誠不以親表有間則忝在外裔惡可以不文終辭已乎. 於乎先生之文雅標節略與..

삼송정상량문(三松亭上樑文) - 권상대(權相大)

先䠱理沒於百年雲仍之寓慕如昨名庄改卜於壑輪奐之制度重新. 非敢將多于前功聊以苟完於今日. 恭惟三松亭林公挺生冠山之華閥遹追平章之遺徽. 早擅英聲視萬里於鵬翮薄試下邑夢三刀於鴻山. 作亭而命名盖取後凋之義韜躬而歛釐爰自中葉之昌. 經歷家門抑亦幹蠱而趾美襄陽山水無愧嘉遯而遺安. 何代譆出之災堂室己煨燼某邱藏修之地池臺便蓁蕪. 公羊流傳只憑秋潭直筆擊牲表述昭載新野遺文. 往蹟述茫徒惹行人之指點高風綿邈頻起慈孫之齎咨. 顯晦其奈天也何廢興惟在人而己. 載營載度尙未遑於幾年肯構肯堂盖勉力於諸族. 就荒墟數弓之外詹營室五車之中. 雨露桑麻不出平地佳境泉石雲月無非別天奇. 觀龜筮協從就南面而審位鳩謨倂力趁東作而輸材. 圭臬四平前堂後牅之井井繩墨一正上棟下宇之持持. 工役待時而成經始不日而作. 三峯蹲蹲而舞背負磅礴之精一水琤琤而流前臨澄澈之面. 于以詹桑梓起敬尙挹杖屨遺芬. 于以樂花樹同春宜享本支綿祿..

영사재상량기(永思齋上樑記) - 홍만적(洪萬績)

齋以思名何居焉. 書曰奉先思孝, 詩曰孝思攸則思之時義遠矣哉. 昔甄氏亭名蓋出於孝而陳后山所命則今之林氏之齋果無讓於甑氏之亭耶. 余嘗聞林氏先祖鴻山公自長興來寓襄陽于今數百年云子孫繁衍比屋連檐孝友之風敦睦之誼雖張公藝九世同居亦不過此. 鴻山公以下丘隴皆在東山村後麓宿草荒原偏起雲仍霜露之感以十月丁日常時祀且於壬寅春諸宗合謨齊聲經始齋舍於先塋之下家廟之後棟樑堅實塗墍完厚不僭不侈有如私室而其制也. 一架四間左右附夾房各二間軒䡿通豁地勢平穩可容百餘人蓬科馬鬛短碣床石皆人於顧眄指點之間. 慕先之心追遠之誠自不覺油然而生矣. 春秋祭祀時蘋藻供於斯罇爵滌於斯上墓焚香情禮俱盡退齋飮福. 老少和同諄諄慻慻勉之以毋忽兢兢業業戒之以毋怠推近及遠而永其思豈不休哉. 時或群賢畢至冠童咸集講誦之音吟咏之聲盈鎰乎席上亦可謂奬進後學也. 不知甄氏之亭又有如是事否也. 是齋也上挹松楸下臨桑梓此仁人孝子之所感處而不佞之所..

영사재상량문(永思齋上樑文) - 신완(申完)

聖人重報本之禮始有守兆之宮來孫殫肯搆之誠聿新飮餕之社. 山川不革棟宇改觀. 恭惟貴宗南土古家東來右族. 簪纓珪笏訖麗代五百歷年忠孝詩書自長興十數傳世. 商園唱紫芝之曲粤自中葉而來栗里採黃菊之英遂爲始遷之蹟. 爰命蓍龜而卜築仍成衣冠之古藏. 良田美疇人皆認仲長統之墟里荒原脩隴也不替韓魏公之牲牷. 念玆庖廚之數間寔在墳塋之一局. 刱始於黑虎之紀非不善於肇基重建在赤兎之年猶未免乎中圮. 無耐風雨之萃棟樑有不合於葺修或詢陰陽之家體勢要自取其平穩. 幸値中熟之歲欲張久遠之圖. 離舊基地步孔邇非敢求多于前也視古制間架稍廣抑有所不容己乎. 伐木鳩財宗黨之經營蓋久. 授能任役工徒之課程不煩. 幾切嗟惋之懷不日見突兀美. 中爲堂而夾爲室序昭穆而猶容澗有藻而溪有蘋修烝嘗而不匮. 松楸冷節環四山蒼翠入簾霜露終天閱百年香火隨序. 是所謂善繼善述孰不曰有子有孫. 甄氏古亭豈但爲苾芬孝思. 韋家遺事亦宜講花樹懽情..

신라팽성백임공팔급(新羅彭城伯林公八及) 제단비(祭壇碑) - 민병승(閔丙承)

昔我檀君撫夷九種箕聖東來有仁賢之化. 是以孔子發欲居之歎而有乘桴之志者也. 學士林公唐末譖言孔張禍機莫測遂與七人色擧蹙下項頷之牡登樂浪之舟永言以歌之曰八人浮海兮桂棹蘭檣次第和之弁六十四字其辭也. 正易之否君子以儉德避難者也. 過句麗越百濟卜新羅之彭城龍珠而居之蓋服其新德羅賢之義而學百里奚之智. 仕至彭城伯子姓保之歷羅麗至聖朝千有餘年綿綿也. 歲在甲子公後孫設大同宗約于漢師譜旣成萬殊一本開卷瞭然. 遂開花樹會酌而樂之旅也咸一辭言曰學士公衣履之藏旣失其傳而香火爲闕帥是以行何异乎. 若敖之餒廟而墠墠而墓禮也旣墓復墠雖曰非經古人多有行之者遂與卜地漢師之弼雲. 築壇建閭以上巳享之又翌日繹而樂之定著爲歲式率爲常奉先敦族之道於斯盡矣. 學士公之遺澤其在百世而不替夫. 嘉義大夫行承政院都承旨兼奎章閣直提學 驪興 閔丙承 撰 崇綠大夫前判敦寧院事 海平 尹用求 書 옛날 우리 단군(檀君)이 구이(九夷..

장흥임씨(長興林氏) 구보(舊譜) 참고문헌(參考文獻) 2

1. 林禧(임희) 高麗壁上三韓三重大匡領三司事或云太師公六代孫. 中和宗人世系以平澤伯書之云. 고려조(高麗朝)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과 영삼사사(領三司事)의 벼슬을 하셨고, 혹은 태사공(太師公) 휘(諱) 임양저(林良貯)의 6대손이라고 한다. 중화종인(中和宗人)의 세계보(世系譜)에는 평택백(平澤伯)이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은 고려 시대 문산계(文散階)의 정일품(正一品) 품계다. 삼중대광(三重大匡)이나 벽상삼한(壁上三韓)이라고 하다가 1362(공민왕 11)년에 둘을 합하여 벽상삼한삼중대광으로 하였다. 영삼사사(領三司事)는 재신(宰臣)이 겸임하는 관직으로 우왕(禑王) 때 처음 설치되었다. 조선 초기 삼사(三司)가 그대로 이어져 영삼사사도 존속되었으나 1405년(태종 5)..

장흥임씨(長興林氏) 구보(舊譜) 참고문헌(參考文獻) 1

1. 임씨득성설(林氏得姓說) 吾林得姓之源有二說. 一說唐堯初神人降于冀州太原縣雙木下容狀甚偉才智過人因以賜姓林氏云. 一殷王子比干之子諱堅隱於長林山故林字爲姓云(但扶安譜學士公上有諱蘊字以西河公文集中仲秋會飮序巧之云). 平澤淸州屬縣一名彭城又河八. 鼻祖八及被讒見逐自上國來泊平澤後封平澤伯伯我林之貫自此焉. 우리가 임씨(林氏) 성(姓)을 갖게 된 근원은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당요(唐堯) 초에 신인(神人)이 기주(冀州) 태원현(太原縣) 두 그루의 나무(雙木, 林) 아래에 내려오셨는데, 용모가 매우 장대하고 준수하시며, 재주와 슬기가 남보다 뛰어나셨음으로 임씨(林氏) 성을 갖게 되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은(殷)나라 왕자 비간(比干)의 아들이신 휘(諱) 견(堅)께서 장림산(長林山)에 은거하셨기에 임자(林字)를 성으로 하셨다..

창린석실(長林石室) 임성발원(林姓發源) 상계보(上系譜)

1. 중국 고대-샹(商) 시대의 임씨(林氏) 계보(系譜) 중국 고대에서 샹(商)에 이르는 임씨(林氏)의 상계보(上系譜)는 다음과 같다. 여우슝궈(有熊國)의 임금 샤오디엔(少典)-화샤족(華夏族)의 시조 황띠(黃帝) 쉬안위안(軒轅)-샤오하오(少昊) 진티엔씨(金天氏)-쟈오지(蟜極)-띠쿠(帝嚳) 까오신씨(高辛氏) 허난성(河南省) 쩡저우시(鄭州市)에는 황띠(黃帝) 쉬안위안(軒轅)의 유적이 있다. 지수이(姬水)는 황띠의 탄생지이다. 지수이는 지금의 샨시성(陕西省) 신쩡시(新郑市) 웨이수이(渭水)로 추정된다. 고대 슝궈(熊国)의 지수이(姬水)일 가능성도 있다. 싀주산(始祖山)은 황띠가 거처하면서 나라를 다스린 곳이다. 싀주산은 지금의 주치산(具茨山)이다. 주치산은 중국의 중악(中岳) 숭산(嵩山)의 지맥에 있다. 황띠..

임씨(林氏) 발원(發源) 샹(商) 역사

샹(商)은 역사적으로 실재한 최초의 중궈(中國) 왕조다. 샹은 여러 차례 도읍을 옮겼다. 샹 20대 왕 판긍(盤庚, 盘庚, BC 1290년~1263년)이 마지막으로 옮긴 수도가 인(殷)이었기 때문에 인나라로 부르기도 한다. 쩌우(周)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인(殷)으로 부른 탓에 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라를 세운 샹(商) 부족과 백성들은 국명을 샹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국명을 샹으로 통일해 부른다. 19세기 말까지 샹은 전설상 왕조로만 다루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 인쉬(殷墟)가 발굴되고, 고고학적 증거가 나타나면서 샹은 실재하는 왕조였음이 증명되었다. 인쉬에서 출토된 청동기와 갑골문자(甲骨文字)를 해독함으로써 샹의 존재가 해명되기에 이르렀다. 1. 시엔샹(先商) 시대 시엔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