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호 월악나루
충주호
충주호 월악나루에서 바라본 월악산
인생은 나그네길이라고 했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편도선 열차를 타고 종착역을 향해 떠나는 여행이 곧 인생길이다. 나 자신에게 허용된 시간이란 태엽이 다 풀릴 때까지 그렇게 가야만 한다.
1월의 주말 늦은 오후 월악산 덕주사로 가는 길을 떠났다. 인적이 끊어진 월악나루에는 정적만이 감돌고, 충주호 푸르른 물결은 가없이 잔잔했다. 눈덮힌 월악산은 충주호를 말없이 굽어보고 있었다. 중봉 하봉은 아득하기만 하고, 영봉은 보이지 않았다.
북정문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동달천에 놓인 송계5교 건너 새터말 도로변에는 덕주산성(德周山城, 월악산성, 충청북도기념물 제35호) 북문인 북정문(北正門)이 있다. 송계의 북쪽을 방어했을 성벽과 수구(水口)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성문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1997년 홍예문(虹霓門)과 초루(譙樓)를 복원했지만, 주변 가까이 민가와 창고 등이 밀집되어 있어 문화재 관리에 좀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실정이다. 홍예문 마룻돌에는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다. 초루의 지붕은 다른 곳의 성문들처럼 우진각지붕이 특징이다.
학소대
덕주루
덕주산성
덕주골 입구 학소대(鶴巢臺)에는 덕주산성 동문인 덕주루(德周樓)가 있다. 문의 형태는 북정루, 남문인 월악루(月岳樓)와 비슷하다. 북정루와 월악루가 문경과 충주를 잇는 교통로를 차단하는 차단성(遮斷城)이라면, 덕주루는 덕주사 일대를 방어하기 위한 외호성(外護城)이라고 할 수 있다.
월악산 서쪽 천혜의 요새지에 자리잡고 있는 덕주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쌓은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 있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맏딸 덕주공주가 월악산에 들어와 머물면서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성을 쌓고 훗날을 기약했다고 해서 덕주산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덕주산성은 북쪽으로 남한강을 끼고, 남쪽으로는 하늘재를 통해서 경상도와 충청도를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러한 지리적 잇점으로 인해 통일신라 말기 송계 일대에는 중앙집권세력의 통제를 받지 않는 강력한 지방호족세력이 존재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덕주산성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1256년 고려를 침략한 몽골군은 파죽지세로 충주까지 밀고 내려왔다. 이에 충주민들은 김윤후 장군이 지키던 충주산성과 월악산 덕주산성으로 들어갔다. 충주산성 함락에 실패한 몽골군은 기수를 돌려 덕주산성으로 향했다. 몽골군이 덕주산성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안개가 자욱하게 끼더니 천둥 번개가 요란하게 치면서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월악산신이 노했다고 생각한 몽골군은 공포에 휩싸여 덕주산성에서 물러나 하늘재를 넘어 문경, 상주쪽으로 내려갔다.
조선조 중종대에는 덕주사 마애불 바로 밑에 내성을 쌓았다. 임진왜란 때에도 충주와 그 주변의 백성들은 왜군을 피해 덕주산성으로 들어와 난을 피했다. 승승장구하던 왜군도 덕주산성 공략에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조선조 말기에는 대원군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할 것을 예상한 명성왕후가 월악산에 은거하기 위해 덕주산성을 보수하고 성문을 축조했다고 한다.
둘레가 9.8km에 달했던 성벽은 거의 다 무너져 사라지고 없으나, 조선시대에 쌓은 북문과 남문, 동문 등 3개의 성문은 남아 있다. 안팎 다섯 겹으로 되어 있는 홍예문 성벽은 그 축조연대가 각각 달라서 시대별 축성법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덕주사 석불입상
덕주사 동자승상
덕주사에 들렀을 때는 해가 이미 서산에 진 뒤였다. 덕주사에 왔다 간 지 몇 년만이던가? 민박집 겸 음식점은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현대식 화장실이 들어서 있었다. 훨씬 더 넓어진 관음전 앞마당에는 못 보던 석불입상과 동자승좌상이 세워져 있었다. 동자승좌상은 혹시 포대화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덕주사 남근석
남근석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안내판에는 남근석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남근석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쭉한 모양 말고는 남근과 닮은 구석이 별로 없다. 사각기둥 형태로 깎은 것도 그렇고 맨앞의 것도 남근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남근석이라고 하니까 그런 줄 알겠지만, 그래도 내 의구심은 여전하다.
안내판에는 음기(陰氣)가 센 월악산의 지기(地氣)를 누르기 위해 이곳에 남근석을 세웠다고 설명하고 있다. 음양오행설에서는 음(陰)은 여성, 양(陽)은 남성을 상징한다고 본다. 남성의 상징은 역시 양물(陽物) 꼬추가 아니던가! 하늘을 향해 바짝 치켜든 양물이야말로 가장 양기가 승한 상태일 것이다.
덕주사 대웅보전
덕주사에서 바라본 용마산, 수리봉
덕주사 범종각
범종각에서 필자
덕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로 587년(신라 진평왕 9)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충주목(忠州牧) 불우조(佛宇條)에는 '德周寺在月岳山下 諺傳德周夫人建此寺 因名之'라고 기록되어 있다. 덕주부인이 이 절을 세웠으므로 덕주사라 이름했다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의 마지막 공주 덕주공주는 마의태자(麻衣太子)와 함께 금강산으로 들어가다가 마애불이 있는 곳에 머물러 절을 세우고, 금강산으로 떠난 오라버니를 그리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덕주사에서 출토된 석탑의 기단(基壇) 석재와 옥개석(屋蓋石), 기와편 등은 고려 초기 이후의 유물들이다. 따라서 덕주사는 고려 건국 이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증지수좌관오묘지명(證智首座觀奧墓誌銘)'에는 '스님은 .... 원당(願堂)인 충주 덕주사에 산승을 소집하여 항상 국왕의 만수무강을 비는 축성도량(祝聖道場)을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덕주사가 고려 숙종대부터 의종대 사람인 관오(觀奧, 1096~1158)의 원당으로 세워진 절임을 알 수 있다.
1206년(고려 희종 2)에 조성된 덕주사 금구(禁口, 쇠북)에는 '泰和六年丙寅八月二十一日造上德周寺禁口一坐重什參斤棟粱道人戒安了閑新主直長宋公侯記結(태화 6년 병인년 8월 21일에 상덕주사 금구 하나를 만든다. 중량은 13근이다. 동량도인은 계안과 료한이다. 직장 송공후가 기록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덕주사의 승려와 불사에 참여했던 인물, 덕주사를 상덕주사와 하덕주사로 구분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보물 제406호)이 있는 위쪽이 상덕주사, 아래쪽의 덕주사가 하덕주사였다.
조선 고종대 사람 정혼(鄭混)의 '진재집(進齋集)' 중 한훤관방방략(寒暄關防方略)을 보면 1800년대 후반까지 덕주사가 매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음이 드러난다. 하덕주사(德周下寺)에는 승통소(僧統所)를 두고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 등 삼남(三南)의 승군(僧軍)들로 하여금 교대로 수비하게 했다. 월악산맥 동쪽에 있는 신륵사(新勒寺)와 보광암(普光菴)의 불상도 하덕주사로 옮겨서 봉안하는 한편 유사시에 대비하여 상덕주사에 다량의 된장과 소금을 저장하도록 했다.
덕주사에는 환적당 부도(幻寂堂浮屠), 부유당 부도(浮遊堂浮屠), 용곡당 부도(龍谷堂浮屠), 홍파당 부도(洪波堂浮屠) 등 조선시대의 부도 4기가 있다. 그중 환적당 의천(義天, 1603~1690)의 행적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선산(善山)에서 태어난 의천의 속성은 문씨(文氏)로 자는 지경(智鏡)이다. 11세에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의 진정(塵靜) 탁린(琢璘) 문하에 들어간 의천은 1618년(광해군 10)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631년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편양(鞭羊) 언기(彦機, 1581~1644)의 법맥을 이어 받았다. 언기는 청허(淸虛) 휴정(休靜, 1520∼1604), 휴정은 태고(太古) 보우(普愚, 1301~1382)로부터 법맥을 계승했다. 풍담(楓潭) 의심(義諶, 1592~1665)도 언기의 법맥을 계승한 승려다. 이처럼 덕주사는 태고법통(太古法統)을 계승한 언기 문하의 승려들이 주석했던 사찰이었다.
원래의 덕주사는 마애여래입상 앞에 있었는데, 6.25 전쟁 당시 월악산에 들어온 국군이 작전상의 이유로 소각했다고 한다. 폐허가 된 덕주사는 1963년과 1970년, 1985년 세 번에 걸쳐 중창 또는 중건하였다. 1985년 중창 당시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는 한수면 역리에 있던 석조약사여래입상(石造藥師如來立像,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6호)을 지금의 약사전(藥師殿)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1998년에는 성일(性一) 주지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에 다포계 팔작지붕의 대웅보전(大雄寶殿)과 범종각(梵鐘閣), 요사채(寮舍寨)를 새로 지었다. 2009년에는 화재로 일부 전각이 불에 탔다.
덕주사의 전각은 지형상 동서방향으로 길게 배치되어 있다.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대불정주범자비(大佛頂呪梵字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1호)와 산신각(山神閣), 앞쪽에는 종무소(宗務所)와 범종각이 있다. 대웅보전의 동쪽으로는 공양실(供養室), 약사전, 관음전(觀音殿), 무우전(無憂殿), 부도전(浮屠田) 등이 있다.
옛 상덕주사는 지금의 덕주사에서 1.7km 떨어진 곳에 있다. 지금의 상덕주사 자리에는 극락보전(極樂寶殿)과 응향각(凝香閣), 삼성각(三聖閣), 마애여래입상, 우공탑(牛公塔) 등이 있다. 옛 극락전 자리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서 1622년(광해군 15)에 상덕주사를 중수했음이 확인되었다.
우공탑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덕주사 승려들이 당우가 좁아서 부속건물을 지으려고 걱정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소가 나타나서 재목을 실어 날랐다. 소는 지금의 마애불 밑에 이르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소의 계시라고 생각한 승려들은 그 자리에 부속건물을 지었다. 재목을 모두 실어다 놓은 다음 소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승려들은 죽은 소를 기리기 위해 극락보전 앞에 우공탑을 세웠다고 한다.
대웅보전에는 가운데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화신불(化身佛)인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왼쪽에는 보신불(報身佛)인 노사나불(盧舍那佛)을 봉안했다. 우진각지붕의 범종각 기둥을 빙 둘러친 줄에는 불자들의 소원을 적은 종이들이 꽂혀 있었다.
대웅보전 마당 한켠에는 석탑의 옥개석 하나가 놓여 있었다. 옥개석의 두께와 너비로 보아 덕주사에는 상당한 규모의 석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의 기단과 탑신, 옥개석, 상륜부 장식, 부장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저 건너편의 용마산과 수리봉은 덕주사 석탑의 운명을 지켜보았으리!
덕주사 대불정주범자비각
덕주사 대불정주범자비
대불정주범자비(大佛頂呪梵字碑)는 대웅보전과 산신각 사이에 있다. 이 비석은 1988년 2월 송계리-덕주골 도로확장공사를 하던 굴삭기 기사가 월광사지(月光寺址) 입구 논둑에서 발견했다. 월광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원랑선사탑비(圓朗禪師塔碑)가 있었던 곳이다. 이 비석은 월악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뒤에 다시 덕주사 경내로 옮겨 보호각을 세우고 안치했다. 발견된 위치로 볼 때 대불정주비는 월광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질이 떨어지는 둥글넓적한 화강암 자연석으로 만든 비석에 새겨진 비문은 글자의 크기도 일정하지 않고 각행의 글자 수도 고르지 않아 육안으로는 알아보기조차 힘들다. 비문의 오른쪽 첫 줄에 ‘大佛頂呪’를 한자로 음각한 다음부터는 모두 11행, 105자를 범자(梵字)로 기록했다. 1~6행까지는 능엄주(楞嚴呪)의 마지막 부분인 419구 '다냐타'로부터 427구 '사바하'까지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능엄주를 대불정만행수능엄다라니(大佛頂萬行首楞嚴陀羅尼), 대불정다라니(大佛頂陀羅尼), 대불정주, 불정주, 수능엄다라니라고도 한다.
대불정주비 범문(梵文)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1행 tadgathā om anale a(다냐타 옴 아나레 아―)
즉설주왈(卽說呪曰): 원합니다. 광명(光明),
2행 nale viśade viśade(―나레 비사데 비사데)
광명(光明), 광취(光聚), 광취(光聚)로서
3행 vera vajrā dhale mandha(베라 바사라 달레에 만다―)
용감한 금강저(金剛杵)로서 타주(他呪)를 주박(呪縛),
4행 ṇi mandhaṇi vajrā pā(―니 만다니 바사라 빠아)
주박케 하소서. 용감한 금강수(金剛手)의 명주(明呪)로
5행 ṇi phatak hum trumphapak(니 파딱 훔 드루움파따악)
파패(破敗)케 하소서. 존경합니다. 타주의 파패를
6행 suāhā om virude suāhā(사바하 옴 비루데 사바하)
성취케 하소서. 대여래(大如來)께 귀명(歸命)합니다.
능엄주는 고려 후기에 성행했던 수능엄경(首楞嚴經) 제7권에 수록된 총 427구의 주(呪)를 말한다. 능엄주는 영험이 많다고 알려져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널리 염송되었다. 수능엄경은 번뇌를 깨뜨려 지혜를 완성하는 용맹견고한 삼매인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를 얻을 수 있는 길을 깨우쳐 주는 경전이다.
덕주사 대불정주비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 사이에 조성된 것이다. 비석에 다라니를 새긴 사례는 국내에서 이 비석이 유일한 예이다. 대불정주비가 월광사와 관련이 있다면 이 절은 고려 후기 이래 선종의 맥을 유지하며 강한 영향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덕주사 산신각
덕주사 산신석탱
산령대신(山靈大神, 산신)을 모신 산신각(山神閣)은 칼로 자른 듯이 갈라진 커다란 바위틈에 있었다. 돌지붕을 씌운 산신각 안에는 화강암에 양각으로 새긴 산신도를 봉안했다. 산신석탱은 1993년에 조성한 것으로 가로 180cm, 세로 210cm이다.
한반도는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기에 민중들은 예로부터 산을 신성한 곳으로 여겨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민중들의 산신에 대한 신앙의 뿌리가 깊다는 것은 여러 사서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중국 남북조시대 송나라의 판예(范曄)가 쓴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는 '그들의 풍속은 산천을 숭배하고, 호랑이에게 제사드리며, 이들을 신으로 섬긴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 승려 일연(一然)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이승휴(李承休)가 쓴 제왕운기(帝王韻紀) 등에는 '환웅(桓雄)은 하늘에서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 신시(神市)를 세웠으며, 그의 아들 단군왕검(檀君王儉)은 아사달(阿斯達)에서 산신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단군신화에서 보듯이 산신신앙은 칠성신앙(七星信仰)과 함께 일찍부터 토착화되었다. 민중들은 산신을 인간의 길흉화복 뿐만 아니라 마을의 안녕과 나라의 흥망을 관장하는 신으로 숭배했다. 상고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나라에서도 전국의 명산에 산신제를 지냈다. 산신은 그만큼 중요한 신이었다. 요즘도 사람이 죽어서 매장을 할 때는 산신에 고하거나 심마니가 산에 들어가기 전 산신에 제사지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산신신앙은 지금도 여전히 민중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는 증거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초기에 산신신앙과 칠성신앙은 국교 수준의 민간신앙이었을 것이다. 불교에 수용된 산신은 사찰의 호법선신(護法善神)과 불자들의 외호신(外護神)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칠성신앙은 불교의 약사여래신앙(藥師如來信仰)에 도교(道敎)의 일월성신신앙(日月星辰信仰)을 융합시켜 민중들의 욕구에 맞게 변용하여 만든 것이다. 이처럼 불교는 산신과 칠성을 수용함으로써 포교의 기틀을 마련하고 민중신앙을 불교화할 수 있었다.
불교가 산신을 수용한 초기에는 사찰에 산신도(山神圖) 같은 것은 없었고, 신패(神牌)를 모시는 산령각(山靈閣)만이 있었다. 불교 사찰에 산신도를 봉안하기 시작한 때는 1700년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산신도는 흔히 백발에 긴 수염 풍모의 산신이 호랑이와 동자를 데리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불교에 원래 있었던 부처나 보살을 모시는 건물에는 '전(殿)', 외부에서 유입된 신을 모시는 건물에는 '각(閣)'을 붙인다.산신은 바깥에서 들어온 신이기 때문에 산신을 모신 건물을 산신각이라고 한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 사찰에는 산신각이 갖추어져 있다. 산신각에서는 주로 자식과 재물을 기원하는 신신기도가 많이 행해지고 있다.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신격화한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모시는 칠성각(七星閣), 석가모니처럼 스승 없이 홀로 깨우친 독각(獨覺)을 모시는 독성각(獨聖閣)도 산신각의 경우와 같다. 산신과 함께 칠성, 독성을 함께 봉안한 건물을 삼성각(三聖閣)이라고 한다. 규모가 큰 사찰에는 대개 삼성각이 있다.
덕주사 약사전, 관음전,무우전
덕주사 약사전
덕주사 석조약사불입상
정면 1칸, 측면 1칸의 약사전에는 석조약사여래입상(石造藥師如來立像)이 봉안되어 있었다. 이 불상은 원래 제천시 한수면 역리 덕상골(德尙谷) 정금사지(淨金寺址)에 묻혀 있었다.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한수면 역리 일대가 수몰 지역이 되자 1983년 약사여래상을 이곳으로 옮겨 와 안치했다.
높이 약 2.3m의 약사여래입상은 하반신과 안면부의 경미한 파손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완전한 형태이다. 별도로 만든 대좌(臺座)에는 두 발을 표현했고, 그 위에 긴 석주 형태의 불신(佛身)을 안치했다. 대좌에는 별다른 문양이 없다. 신체에 비해 두상이 매우 큰 편인 반면에 목은 짧고 어깨가 좁아 움츠린 듯이 보인다. 그리고 두상이 불신보다 앞으로 나와 있어 목을 내밀고 있는 듯한 자세다.
머리털은 나발(螺髮)로 마치 투구를 쓴 것처럼 보이고, 육계(肉髻)는 작고 낮게 표현되어 있다. 이마에는 지름 2cm 정도의 백호공(白毫孔)이 있다. 둥글고 긴 눈썹은 코로 이어져 있으며, 눈 부위는 깨져서 분명하지 않다. 입은 작고 돌출되어 있어 표정이 다소 굳어 보인다. 양쪽 귀는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았으며, 목에는 삼도(三道) 표시가 없다. 수인(手印)의 오른손은 들어올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지은 상태에서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다. 왼손은 가슴에 대고 네모진 약합(藥盒)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오른손과 약합은 가늘고 소략(疏略)하게 표현했다.
불의(佛衣)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대의(大衣)를 몇 개의 선으로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특이한 것은 그물 모양으로 가사의 이어붙인 조각천을 표현한 것이다. 왼쪽 팔을 걸쳐 흘러내린 옷주름은 옆구리까지 새겨져 있다. 뒷면은 상체에 편단우견의 표식만 있다.
석주 형태의 이 불상은 신체의 비례가 맞지 않아 비사실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대좌와 약합, 옷주름도 정교하지 못하고 소략하다. 이런 양식의 석불상은 고려~조선시대 특히 충청도 지방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석불의 특징이다. 덕주사 약사여래입상은 당시의 불상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의 관음전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올렸다. 정면에는 빗살창 문, 측면에는 띠살창 문을 달았다. 관음전에는 관세음보살좌상을 봉안했다. 무우전은 예전에 요사채로 썼던 건물이다.
날은 저물고 가야 할 길은 멀어 덕주사를 떠났다. 다음에는 덕주사 부도전과 상덕주사를 마저 보고, 월악루와 사자빈신사지석탑(獅子頻迅寺址石塔), 월광사지, 미륵세계사(彌勒世界寺)도 돌아볼 생각이다.
2015. 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