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표현물’ 출간 논란을 부른 전 북한 주석 김일성의 항일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도서출판 민족사랑방)가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단됐다. 8권 세트로 된 ‘세기와 더불어’는 과거 북한 조선노동당 출판사가 펴낸 원전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알려지면서 사실 왜곡 및 법 위반 등 논란이 일었다.
교보문고는 '대법원이 이적표현물로 판단한 책을 산 독자도 처벌받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고객 보호 차원에서 신규 주문을 받지 않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는 간행물윤리위원회에 이 책의 심의 요청을 해놨다. 2011년 대법원은 이 책을 ‘이적간행물’로 판단했기 때문에 간행물윤리위가 유해간행물로 결정할 가능성도 높다.
간행물윤리위에 따르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면 부정하거나 체제전복 활동을 고무 또는 선동해 국가의 안전이나 공공질서를 뚜렷이 해치는 것’으로 ‘보편타당한 역사적 사실을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민족사적 정통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에 해당하면 유해간행물이 된다. 유해간행물은 해당 시군구청에서 과태료 처분을 하거나, 사법기관에 의한 수거, 폐기된다.
'세기와 더불어' 판매 중단 소동에 대해 자유기고가 홍기표는 '국가보안법 위반은 핀트가 안 맞는다'라며 '책이나 신문에 대해 경계하는 것은 인간이 저지르는 대표적인 바보짓 중 하나다.'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김일성 회고록 판매 중단 소동과 국가보안법'이란 제목의 글에서 '정보는 정보로 대응해야 한다.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글자로 적혀 있다고 그걸 다 믿지는 않는다.'라면서 '김일성 회고록은 내 기억에 거의 공짜로 읽을 수 있었던 옛날에도 지겨워서 중간에 내던졌던 것 같다.'고 말했다. <林 山>
1.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출간을 놓고 '책값이 비싸다', '책의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등의 비판은 정확한 지적이다. 하지만, '국가보안법 위반이다'라는 비판은 좀 핀트가 안 맞는다. 정작 자기는 예전에 다 봐 놓고 요즘 사람들은 못 보게 하는 것도
고질적인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한 형태다. 생각이 바뀌는 것이야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가치 기준점이 수시로 옮겨다니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2. 너무 오래전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과거에 주사파(主思派, 주체사상파)를 양산한 배경 중 하나로 '김일성 가짜설'이 있었다. 자료를 보면 볼수록 '김일성 가짜설'이 '가짜'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후 '김일성 가짜설'은 기존의 제도권 학습이나 언론 전체를 부정하는 뇌관이 되었다.
요즘에 일본 관련 역사 이슈에 대해서는 한 가지 해석만 존재하듯이 1980년대 북한 관련 역사 해석에 대해서도 한 가지 해석만 존재했었다. 그 취약한 지적 기반이 주사파의 등장이라는 오도된 역사를 낳은 셈이다. 만약 그 당시에 '김일성이 독립운동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너무 과도하게 포장되었다'라는 식의 실체적 관점으로 접근할 용기가 있었다면, 1980년대에 그렇게 많은 주사파들이 양산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주사파들이 수십년 뒤에 86정권의 기반이 될 수 있었을까?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3. 북한 정권은 정치 홍보의 마법과 관련이 깊다. 예를 들면 '보천보 전투'(普天堡戰鬪)라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파출소에 화염병 던지고 도망간 사건일 뿐이다. 그것을 당시 식민지 시절 민족언론이던 동아일보에 의해 거대한 민족적 이벤트로 과대 포장되면서 '최초의 국내 진공작전'이라는 그럴싸한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북한 정권은 동아일보에 의해 만들어진 정권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다.
해방 공간에서 김일성의 윗 선배들은 거의 다 죽은 상태였다. 이 때문에 나이는 젊지만 가장 인지도가 높았던 김일성이 소련의 간택을 받을 수 있었다. 결국 이런 인지도가 정치적 기반으로 작용해서 김일성 정권이 수립되는 마법이 작동했다고 할 수 있다.
4. 북한 정권은 '과장'과 '퍼포먼스' 같은 기법에 능숙하다. 예를 들어 김신조와 124군부대의 청와대 습격 사건 같은 것도 그렇다. 정말 김일성은 고도로 훈련받은 특공대 31명을 보내면 박정희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고도의 특수훈련을 받은 특수부대라고 해서 배에 철판을 두른 것은 아니다. 어차피 그런 식으로 내려간 특공대원들은 모두 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너도 알고 나도 알고 김일성도 안다.
하지만, 김일성은 김신조와 124군부대를 남파함으로써 정치적으로 남북 대결구도를 크게 살릴 수가 있었다. 남북한 사이의 적대적 공존관계를 강화해서 결국 자기 권력 기반을 튼튼히 할 목적으로 김일성은 애꿎은 청년 군인 30명의 목숨을 죽음의 '퍼포먼스'에 몰아넣은 것이다.
'서울 불바다' 발언도 그렇다. 전쟁이 터지면 제일 먼저 적의 핵심 군사시설에 화력을 집중하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적의 민간인을 먼저 왕창 죽이고 시작하겠다는 것은 도대체 말도 안된다. 그런데 만약 북한이 '전쟁이 나면 밀리터리 매니아나 알 수 있는 핵심 군사시설을 수십 곳 공격하겠다!'라고 말했다면 무슨 홍보 효과가 있었을까?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했기 때문에 당장 큰 문제가 되고, 이슈가 되었던 것이다. 즉 이것은 군사적 합리성을 갖는 전략이 아니라 여론 형성을 노리고 벌인 워딩이었다.
5. 책이나 신문에 대해 경계하는 것은 인간이 저지르는 대표적인 바보짓 중 하나다. 진보를 망친 주범 중 하나로 안티조선 같은 대언론 자폐증을 꼽을 수 있다.
정보는 정보로 대응해야 한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글자로 적혀 있다고 그걸 다 믿지는 않는다. 믿고 싶은 상황일 때만 억지로 믿을 뿐이다. 책에 대해 경계심을 제기하는 것은 '나는 깨어있는 시민이고, 남들은 자고 있는 잠탱이들이다'라는 변형된 선민의식의 발로일 뿐이다.
6.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내 기억에는 거의 공짜로 읽을 수 있었던 옛날에도 지겨워서 중간에 내던졌던 것 같다. 왜냐하면 위대한(?) 주체사상 총서도 10권 시리즈였기 때문에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제대로 안 한 내가 재미도 없으면서 길기만 한 그 책을 언제 다 보겠는가! '세기와 더불어'는 알고 보면 그냥 선거 때 집에 배달되지만 읽지도 않고 내던져 버리는 정치홍보물과 똑같은 것이다. 김일성 회고록 그냥 판매하게 나둬도 아무 문제없다. 국민 의식 수준을 얕보면 안 된다.
글쓴이 홍기표(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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