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생활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직업'職業을 갖게 마련이다. 고전적 또는 전통적 의미에서 '직'職은 하늘이 사람에게 맡긴 일이다. 그래서, '천직'天職이라고 한다. '업'業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이다. 그래서 '생업'生業이라고 한다. 연수성당 김인국 마르꼬 신부는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을 맞아 '직職인가 업業인가?'라는 제목의 강론을 통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천직으로 삼느냐 아니면 생업으로 삼느냐 하는 것은 그 자신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고 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김 신부는 가장 이상적인 천직은 '목자'牧者, 목자의 표상은 유다의 왕 다윗이라고 했다. 목자는 양을 돌보듯 사람을 돌보고 기르는 사람이다. 가장 바람직한 목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답이 김 신부의 성소주일(聖召主日) 강론에 들어 있다. 꼭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깊이 돌이켜보게 하는 글이다. <林 山>
직職인가 업業인가?
당신의 직업은 무엇인가? 무슨 일을 하시든 자부심과 보람, 기쁨을 누리시기를 빈다. 지금은 ‘직업’職業을 한 단어로 묶어 쓰지만 본래 ‘직’과 ‘업’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직은 하늘이 사람에게 맡긴 일이다. 그래서 천직天職이다. 반면 업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이다. 그래서 생업生業이다. 당신의 일은 천직인가? 생업인가? 그렇다. 천직에 속하는 직종, 생업에 속하는 업종이 따로 정해져 있을 리 없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맡은 일을 수행하느냐에 달려 있다. 천직을 생업으로 알고 사욕을 채우는 사람도 있을 테고, 생업이지만 천직으로 알고 성심을 다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되었든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하는 일이면서 궁극적으로 하느님이 맡겨주신 일로 알고 헌신하면 우리도 천직에 매달리다 십자가에서 순직하는 예수님처럼 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요한복음은 같은 일을 해도 ‘목자’로 일하는 사람, ‘삯꾼’으로 일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한다. 목자도 삯꾼도 그 분야에서는 남다른 식견과 경험을 가진 전문가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그런데 무엇을 중심에 두느냐에 따라 갈라진다. 양을 중심에 놓고 일하면 목자요, 자신의 이해관계를 앞세우면 그저 삯꾼에 지나지 않는다.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지만, 삯꾼은 자기 옷을 짜려고 털을 깎으며 자기 배를 위해 양들을 잡는다.
시와 노래를 좋아했던 임금 다윗은 양치기 소년이었다. 그는 사자나 곰이 와서 양을 물어 가면 끝까지 쫓아가 그 입에서 건져내는 착한 목자의 표상이었다. 하지만 다윗이 생각하는 참 목자는 하느님이셨다. “야훼는 나의 목자시로다. 목자께서 나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래서 나는 아쉬운 것을 알지 못한다.”고 시편 23편에서 노래하였다. 그런데 하느님의 몫이었던 이 신성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오늘의 그리스도인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우리는 서로 목자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목자다. 부모는 어린 자식에게 목자요, 장성한 우리는 연로하신 부모님들의 목자다. 이웃에게 우리는 목자요, 길에서 만나는 어린 아이들에게 우리는 모두 목자다.
1. 목자가 되는 첫째 단계_ “진정 난 몰랐었네”
사도행전은 제자였던 사람들이 목자로 일하는 눈부신 변모를 보여준다. 목자로 거듭나는 첫째 단계는 자신들의 무지를 깨닫는 대목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상봉 연후, 제자들은 스승의 진면목을 알아드리지 못한 무정함을 이렇게 뉘우쳤다. “집 짓는 자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시편 118,22) 내버린 돌이었는데, 쓸모도 없고 볼품도 없다 여겨서 내버린 돌이었는데 나중에 보니 ‘모퉁이의 머릿돌’, 첫돌, 머릿돌, 건물의 바탕이며 기초이며 중심이셨더라. 그런 줄도 모르고 등을 돌렸으니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이와 같은 회한을 베드로 사도는 설교를 하면서 입으로도 말하고(사도 4,11), 편지를 쓰면서 손으로도 말했다(1베드 2,7). 나는 나에게 맡겨진 양들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가?
2. 목자가 되는 둘째 단계_ 지금은 안다
목자로 우뚝 서는 다음 단계는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이다. 오늘 세 가지 성경 본문마다 ‘안다’라는 말이 나온다. 1독서에서는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게 하나 있습니다”(사도 4,10)하였고, 2독서에서는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1요한 3,1) 하였고, 이어 “(하지만) 우리는 … 알고 있습니다.”하고 나온다. 복음에도 안다는 단어가 많이 나왔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10,14) 그리고 “아버지는 나를 아신다. 나는 아버지를 안다.”(15절)고 했다. 그리고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나는 그들 목소리를 안다”(16절)고도 했다.
1독서에서는 스승을 버리고 도망쳤던 제자들이, 우리는 그를 모르오 하던 제자들이, “예수는 사람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라며 가르치고 있다. 2독서에서는 나는 나를 모르오.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 모르오 하며 방황하던 사람들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요, 라고 정확하게 신원과 정체를 고백하고 있으며 “장차 예수님과 같아질 존엄한 존재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나는 내 아버지를 알고 나는 내 사람들의 이름과 목소리를 속속들이 알아주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들도 하느님을 알아드리고,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사람들을 알아주고 있는 것이다.
3. 목자가 되는 셋째 단계_ 나는 듣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오랜 세월 교구청에 매여서 지내던 신부가 드디어 본당 발령을 받고 신나서 가보았더니 실로 모든 것이 흡족하였다. 단 하나 고양이들이 골치였다. 낮에는 가만히 있다가 밤 열시만 되면 활동개시. 야옹야옹, 어느 때는 거칠게 싸우고 어느 때는 이상야릇한 소리로 서로 불러대는 통에 심란해서 잠을 이룰 수 없더란다. 거기다가 아침에 일어나보면 종량제 쓰레기봉투 이곳저곳에 구멍을 내서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저놈들만 없으면 진짜 행복할 텐데 고민이 깊었다. 참을 만큼 참았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마침내 결심을 했다. 아는 교우에게 공기총을 가져오라 해놓았다. 그러다 거사를 하루 앞둔 날, 신부는 뉴스를 보다가 동물을 학대하는 장면이 공개되는 바람에 개망신을 당하는 어떤 사람의 사연을 접하고는 마음을 접었다. “아이고 큰일 날 뻔했다. 만일 내가 총을 들고 고양이 가족을, 탕탕 쏴서 이렇게 저렇게 하는 장면이 방송에 나가기라도 했다면 어찌 됐을 것인가. 아 끔찍하다.” 포기! 어쩔 수 없이 악동들과 함께 지내기로 작정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작정하던 날 밤이었다. 밤 열시가 되었는데 거짓말같이 쥐 죽은 듯 조용하였고, 아침에 나가보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쓰레기봉투도 아무 이상이 없이 깨끗… 했을까? 아니었다. 모든 게 어제와 똑같았다. 놈들은 변함없이 시끄러웠고 일거리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한낱 우스갯소리이겠는가. 목자로 살아가야 하는 인생의 곤란이며 번뇌다. 어쨌든 목자의 마음으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공감하고 사유해야지 욕망대로 감정대로 하다가는 삯꾼이 되고 만다.
4. 목자여, 듣고 또 들어라
목자는 말하는 사람이라기보다 듣는 사람이다. 현대의 예언직은 말하기가 아니라 오래 들어주고 깊이 공감하는 일이다. 교종께서는 현대인의 치명적인 약점으로서 도무지 경청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꼽았다. “한 자리에 앉아서 다른 이들에게 귀 기울이는 일은 인간 만남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상은 대개 귀먹은 세상입니다. 뭐든지 빠르게 돌아가는 생활의 속도는 다른 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듣지 못하게 우리를 방해합니다. 우리는 다른 이의 발언 도중에 이미 끼어들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답하려 합니다. 우리는 경청의 능력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느님의 소리에 귀 기울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소리에 귀 기울였습니다. 아픈 이의 소리에 귀 기울였습니다.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였습니다.”(모든 형제들 48항)
고요한 침묵, 그리고 깊은 경청으로 우리는 성숙한 목자가 된다. 듣고 또 들어주자. 아픈 데가 없는지, 슬픈 데가 어딘지, 목마르고 허기진 자리는 없는지. “나는 내 양들을 안다.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얼마나 영예로운가. 얼마나 떳떳한가. 여러분, 하느님 앞에서는 한없는 사랑과 보호가 필요하지만 세상에서는 어엿하신 목자님들 고맙습니다.
“외로워도 힘차게/ 괴로워도 기쁘게/ 우리가 교회다/ 세상의 사목자다.”
글쓴이 김인국 마르꼬 연수성당 주임신부
'시사 이슈 화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융위원회의 가상화폐거래소 감독은 코메디다 - 홍기표 (0) | 2021.05.18 |
---|---|
할당제(割當制) 단상(斷想) - 홍기표 (0) | 2021.05.12 |
김일성 회고록 판매 중단 소동과 국가보안법 - 홍기표 (0) | 2021.04.25 |
컨벤션 효과와 박수홍 갈비탕 - 홍기표 (0) | 2021.04.19 |
세월호 침몰 참사 7주기를 맞아 (0) | 2021.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