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베트남 전쟁 안케 패스 전투 참전 노병의 소원

林 山 2023. 8. 4. 19:06

1972년 4월 11일부터 4월 26일까지 맹호부대猛虎部隊의 베트남 안케 패스(An Khe Pass) 작전에 참전했던 노병老兵이 내원했다. 노병은 어언 80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안케 패스 작전은 1972년 4월 11일~26일 간 수도사단 맹호부대 기갑연대가 베트남 중남부 지역 꾸이년城舖歸仁 인근에서 치른 전투로 주요 전투는 638고지 전투이다. 안케 패스는 베트남 중남부 빈딩성省平定 성도 꾸이년城舖歸仁에서 캄보디아 국경을 잇는 19번 도로 중간에 있는 고갯마루를 일컫는다. 안케 패스에서 가장 높은 산이 바로 638고지다. 

안케 패스 전투에서 아군은 75명의 전사자戰死者와 222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북베트남군은 680여 명이 전사하였다고 한국군 측에서 주장한다. 하지만 한국군 전사자는 축소되고, 북베트남군 전사자는 부풀려졌을 것으로 추정하는 의견들이 많다.

한국군은 안케패스 전투가 19번 도로 개통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여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승전勝戰으로 홍보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서 가장 많은 한국군 사상자가 나왔기 때문에 전술적으로는 패전敗戰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베트남 전쟁에 직접 참전했던 박경석 예비역 준장은 안케 패스 전투에 대해 "모든 전투에서 지휘의 통일(Unity of Command)은 기본원칙인데, 지휘의 혼선으로 참사를 맞았다. 전투 시 건제建制를 유지한다는 것은 지휘의 혼선을 막는 기본책이다. 먼저 건제가 뒤죽박죽이었다. 중대 전술기지를 638고지에 설치하지 않은 것은 최대의 실책이었다. 이것은 분명한 직무유기이다. 실패한 축선軸線에의 축차逐次 투입으로 계속 공격을 시도한 것은 실패를 자초한 결정적인 하책下策이었다. 638고지에 1개월 전 월맹군越盟軍(북베트남군)의 진지 구축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정보 수집, 수색 정찰을 포기한 증거다. 주월 한국군 사령관 이세호 장군을 비롯한 지휘선상의 모든 지휘관의 리더십에 결정적인 허점이 있었다.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 참전 전 기간을 통하여 가장 치욕스런 패전으로 기록된다. 패전을 승전으로 미화한 것은 주월 한국군의 최대의 굴욕이었다."라고 증언했다. 

 

나무위키에는 안케 패스 전투에 대해 '인터넷을 뒤져보면 안케 패스 작전 당시에 한국군의 수많은 삽질과 군 수뇌부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한 참전용사들의 글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전투이다. 가장 최악의 지휘로는 1대대가 하도 고지에서 총알이 쏟아져서 진격이 힘들자 드럼통에 흙을 채워 굴리면서 밀고 올라가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었다. 군대는 까라면 까는 것이어서 흙으로 채운 드럼통이 현장에 투입되긴 했는데, 밀고 올라가기는 커녕 도로 굴러 내려오는 상황이 발생하자 현장 지휘관이 곧장 그만 두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안케 패스 전투는 약 15일 동안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노병의 기억으로는 2개월 가까이 잠도 제대로 못자고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고 한다.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기억의 오차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전쟁의 상흔傷痕은 아직도 여전히 노병의 가슴 속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노병의 뇌리에는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북베트남군의 총알에 맞아 단말마斷末魔 비명에 장렬하게 죽어간 전우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노병에게는 자기 혼자서만 살아서 돌아왔다는 죄책감도 크다고 했다. 그래서, 노병은 소원이 하나 있다. 죽기 전에 638 고지 전투 현장을 한번 꼭 가보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몸이 많이 불편하여 이승에서는 소원을 이루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노병은 지금도 안케 패스 전투의 악몽惡夢을 꾼다고 한다. 노병의 악몽은 안케 패스 전투 현장에서 전사한 전우들과 해원상생解冤相生을 해야 비로소 끝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노병과 약속 한 가지를 했다. 다음에 베트남 빈딩성에 가게 되면 안케 패스와 638 고지를 사진으로 담아와서 보여주기로.....   

 

2023. 8. 4. 林 山

#638 #안케패스전투 #맹호부대 #베트남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