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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21.BBC] 중국 선전서 등굣길 일본 아동 흉기 피습 사망, 일본인들 공포

林 山 2024. 9. 21. 05:48

Schoolboy's killing in China sparks Japanese fears. The killing of a Japanese schoolboy in the Chinese city of Shenzhen has sparked worry among Japanese expats living in China, with top firms warning their workers to be vigilant. 

중국 선전서 등굣길 일본 아동 흉기 피습 사망, 일본인들 공포

일본 초등생 살해 사건으로 일본인 학교에 보안을 강화한 중국 당국

 

중국(中國) 선전(深圳, 광둥어 Samzan, 삼잔)에서 일어난 일본인(日本人) 초등학생(初等學生, 10세) 살인사건으로 일본에 공포가 퍼지고 있다. 일본 남학생 살인사건으로 중국에 거주하는 일본계 외국인들 사이에 우려가 커지고 있으며, 주요 기업들은 직원들에게 경계하라고 경고했다. 

도시바(株式会社東芝, 가부시키가이샤 도시바, Toshiba Corporation)와 도요타(トヨタ自動車株式会社, 도요타 지도샤 가부시키가이샤, Toyota Motor Corporation)는 직원들에게 폭력 가능성에 대비해 예방 조치를 취하라고 말했고, 파나소닉(パナソニックホールディングス株式会社, 파나소닉 홀딩스 가부시키가이샤, Panasonic Corporation)은 직원들에게 무료 귀국 항공편을 제공하고 있다. 

일본 당국은 중국 정부에 시민의 안전을 보장할 것을 촉구하면서 살인 사건을 거듭 비난했다. 수요일에 일어난 10살 소년의 칼부림 사건은 최근 몇 달 동안 중국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일어난 세 번째 악명 높은 공격 사건이었다. 

BBC에 발표한 성명에서 전자 제품 대기업 파나소닉은 최근의 공격 이후 중국 본토에서 "직원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할 것"이라고 밝혔다. 파나소닉은 직원과 그 가족이 회사 비용으로 일시적으로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으며, 상담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중국에 직원이 약 100명인 도시바는 직원들에게 "안전에 주의하라"고 촉구했다. 한편 세계 최대의 자동차 제조업체인 도요타는 BBC에 "상황에 대한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일본인 해외 거주자를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베이징(北京) 주재 일본 대사도 중국 정부에 "시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촉구했다. 한편 목요일에 일본 총리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는 이 공격을 "극도로 비열한 사건"이라고 규정하며, 도쿄(東京)가 베이징에 "가능한 한 빨리 사건에 대한 설명을 강력히 촉구했다."고 말했다. 

중국에 있는 일부 일본 학교는 부모에게 연락하여 칼부림 사건 이후 최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광저우(廣州) 일본 학교는 일부 활동을 취소하고 공공장소에서 일본어를 큰 소리로 말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중국에 있는 일부 일본 해외 거주자 커뮤니티 구성원은 BBC에 자녀의 안전이 걱정된다고 말했다. 10년 가까이 선전에 살았던 53세 사업가 한 명은 딸을 평소보다 일찍 해외 대학에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선전이 외국인에게 비교적 개방되어 살기에 안전한 곳이라고 항상 생각했지만, 지금은 우리 모두가 안전에 대해 더 조심하고 있다. 많은 일본인들이 깊이 우려하고 있으며, 많은 친척과 친구들이 내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연락했다."고 말했다.  

금요일 선전 특구 데일리(Shenzhen Special Zone Daily, 深圳新闻网, 선전신원왕)는 선전의 중국 관리들을 인용해 "이 사건에 대해 매우 슬퍼하고 있으며 목요일 아침부터 학교 근처에 보안 카메라를 설치하기 시작했다."라고 보도했다. 

국영 신문은 사설을 통해 용의자를 비난하며 "우리는 외국인을 포함한 선전의 모든 사람의 생명, 재산, 안전 및 법적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계속해서 효과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다. 이 폭력적인 행동은 일반 중국인의 자질을 대표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금요일에 지역 주민들은 선전에 있는 일본 학교 교문에 꽃을 바치기 시작했다. 선전의 한 주민은 싱가포르(Singapore, 新加坡) 뉴스 매체인 스트레이츠 타임스(The Straits Times)에 "정말 슬픈 일이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은퇴한 교사인 또 다른 사람은 "이 아이는 어느 나라 사람이든 가족과 국가의 희망이다."라고 말했다. 

선전이 살인 사건으로 인해 흔들리는 가운데, 다양한 뉴스 보도와 공식 출처에서 더 많은 세부 정보가 나왔다. 이 사건은 수요일 오전 8시(그리니치 표준시 오전 12시)경 소년이 다니는 학교인 선전 일본 학교 밖에서 발생했다. 

중국 경찰이 센(Shen)이라고만 밝힌 소년은 복부를 칼에 찔렸다. 그는 나중에 목요일 이른 아침에 부상으로 사망했다. 44세의 쭝(Zhong)이라는 성을 가진 공격자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선전의 국영 언론에 따르면 그는 2015년에 "공공 인프라를 손상한 혐의", 2019년에 "공공 질서를 방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전과가 있었다. 목격자는 용의자가 공격을 감행할 때 얼굴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목격자는 일본 공영 방송사 NHK에 "그는 도망가지 않고 그냥 서 있었고 학교를 지키던 지역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말했다. 중국 당국은 정확한 동기를 밝히지 않았지만, 올해 두 건의 이전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 칼부림 사건을 "고립된 사건"이라고 거듭해서 주장했다. 

6월에 한 남자가 남동부 도시인 쑤저우(蘇州)에서 일본인 어머니와 아이를 표적으로 삼았다. 이 공격은 또한 일본 학교 근처에서 발생했고 어머니와 아들을 보호하려던 중국인 후여우핑(胡友平)이 사망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사건으로 일본 정부는 중국에서 학교 버스 경비원을 고용하기 위해 약 250만 달러(33억4,000만원)를 요청했다.  

이제 중국 당국이 일본 커뮤니티에 중국에서의 안전을 보장하는 동시에 이것이 주요 외교적 위기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에 주목하고 있다. 두 나라 간의 관계는 오랫동안 험악했다. 수십 년 동안 양측은 역사적 원한에서 영토 분쟁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문제로 충돌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칼부림 사건이 일본이 1931년 만저우(满洲)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폭발을 조작하여 중국과 14년간 전쟁을 일으킨 악명 높은 묵던(Mukden, 옛 奉天, 펑톈, 현 瀋陽, 션양) 사건 기념일에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한 전직 일본 외교관은 "수요일 선전에서 일어난 공격은 중국 학교에서 오랜 세월 동안 반일(反日) 교육이 이루어진 결과다."라고 말했다. BBC와 인터뷰한 일본 외교관에 따르면 외교 관계는 종종 긴장될 수 있지만 경제 협력은 항상 꾸준히 이어져 왔다.

하지만 이 공격이 세계적인 기술 허브인 선전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양측을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 중국에 있는 일본 대표 기업들이 자사 직원들에게 중국에서의 근무와 관련하여 의문을 제기할 수 있으며, 이것이 도쿄와 베이징 간의 경제 관계에 어떤 의미를 가질지 경고했다.

 

*만주사변(중국어 滿洲事變, 만저우싀볜, 일본어 満洲事変, 만슈우지헨) 혹은 9·18사변(九一八事变, 지우이빠싀볜)은 제국주의(帝國主義, Imperialism) 국제깡패 일본이 1931년 9월 18일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을 조작해 관동군(関東軍, かんとうぐん)이 만주를 중국 침공의 병참 기지로 만들고 식민지화하기 위해 벌인 전투를 말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1918년) 이후 일본이 지원하는 중국 군벌 펑톈파(奉天派, 奉系軍閥, 張作霖, 장쭤린)는 장제스(蔣介石)의 국민혁명군(国民革命军)에 밀리기 시작하여 일본 정부는 장쭤린에게 퇴각을 권고했고, 만주에서 그를 보호하려 하였다.(1927년) 이에 반발한 일제의 관동군 일부 참모들이 모의하여 장쭤린을 암살(1928년)했다. 이로써 일제의 관동군과 중국 펑톈파(奉天派)의 협조는 종결되고,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은 국민당 정부에 합류(1929년)하였다. 국민당 정부는 반일 공세를 전개하였고, 세계 경제 대공황(1929년)과 겹쳐 만주에서 일본의 이권이 타격을 받았다. 일본이 이러한 위기를 타파하고자 만주 전체를 침략할 필요성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완바오산 사건(萬寶山事件, 1931년 7월) 등이 터져 나와 양국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이때, 일제의 관동군은 다시 한번 계략을 꾸며 자작극인 류타오후 사건(柳条湖事件, 1931년 9월)을 일으켰다. 일본은 1932년 1월까지 만주 전역을 점령, 3월에는 괴뢰정권 만주국(滿洲國)을 성립시켰다. 이러한 일은 국제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고, 국제연맹(國際聯盟,  League of Nations)은 1933년 2월 리튼 보고서 - 중일 분쟁 조사단 보고서(Report of the Commission of Enquiry into the Sino-Japanese)를 채택하여 일본의 철병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만주사변은 1945년까지 계속된 중국과의 15년 전쟁의 시작이며, 제2차 세계 대전의 서막이었다.

 

*완바오산 사건(萬寶山事件)은 1931년 7월 2일 중국(中國) 지린성(吉林省) 창춘(長春) 교외에 위치한 완바오산(萬寶山)에서 조선인(朝鮮人) 농민 200여명과 중국인(中國人) 농민 500여명이 충돌한 사건이다. 가난이 싫어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 농민들이 완바오산 근처의 미개간지를 중국으로부터 차지한 일본인(日本人)에게서 10년 기한으로 다시 불하받아 관개용 수로공사를 하던 중 중국인 농민들이 이를 중단시키려 한 것이 발단이었다. 수로공사로 인해 땅이 갈리고 수해까지 예상한 중국인 농민들이 공사 중지를 요청한 것은 당연한 권리행사였지만, 순박한 조선인 농민들은 공사 강행을 부추긴 일본인만을 믿다 이 같은 불상사를 맞았다. 그러나 무난히 해결될 수 있었던 이 사건이 한·중·일이 얽힌 복잡한 사건으로 비화한 것은 이 사실을 왜곡 전달한 제국주의 국제깡패 일본의 발표를 믿고 국내 신문들이 "사망자가 나왔다"며 과장 보도하고 일본도 보복을 부채질하면서였다. 인천·평양·경성 등 각지에서 중국인에 대한 집단 보복사건이 일어나 142명의 화교(華僑, overseas Chinese)가 죽고 546명이 부상했다. 결국 이 사건은 교활한 일제(日帝)가 한·중 양 국민 간의 민족감정을 이간질하고 분열시키는 데 이용하는 결과를 낳았다.

 

*류탸오후 사건(柳条湖事件 류탸오후스젠)은 1931년 9월 18일 제국주의 국제깡패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다. 만주 침략을 위한 작전의 시나리오는 관동군 작전 주임참모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관동군 고급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本庄繁) 등 세 명이 만들었다. 이들은  만주와 몽골(滿蒙)를 차지하기(領有) 위한 '만몽영유계획(滿蒙領有計劃)'을 모의했다.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일제의 관동군은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30분경 류탸오후(柳条湖)에서 만철선로(滿鐵線路)를 스스로 폭파하고 이를 중국의 장쉐량(張學良)이 지휘하는 동북군(東北軍, 東北邊防軍) 소행이라고 발표한 후 만주 침략을 개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