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에게는 늘 ‘20세기의 눈’, ‘현대 사진영상의 아버지’, ‘사진미학의 교과서’, ‘사진의 톨스토이’, ‘전설적인 사진작가’, ‘근대 사진미학의 최고봉’이라는 이름이 따라다닌다. 그의 사진에 있어서 예술성의 근본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찰나’이다. 그것은 단순한 시공간의 순간(moment)이 아니라 개념적으로 지속되는 찰나(instant)인 것으로 단순히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사진 기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찰나'는 대상 자체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이며, 작가의 의도나 피사체, 그리고 그 주변 상황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고, 구도와 형태의 예술적 감각이 완벽하게 구성되는 아주 짧은 순간을 의미한다. 그러한 찰나와 대면하기 위해서 작가는 엄청난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기다려야만 할 뿐만 아니라 부지런히 찾아다녀야 한다. 브레송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스리나가르(Srinagar), Kashmir, 1948
인도 카슈미르 주 스리나가르의 한 회교도 여인이 장엄한 히말라야 산맥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양손을 들어올린 채 경건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 장면이다. 신발도 신지않은 맨발에 남루한 옷을 걸친 여인들이지만, 신앙심이 넘쳐 보이는 모습이 성스러워 보인다. 마치 광야에 서있는 예수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카슈미르는 인도와 파키스탄, 중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인 K2봉(8,611m)이 있는 지방이다. 이 지역은 힌두왕조와 이슬람왕조의 지배를 번갈아가며 받은 역사적 배경 탓으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가 섞여 있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될 때 카슈미르 지역 주민 다수는 이슬람교도였으나 이 지역을 지배하던 왕은 힌두교도였기 때문에 인도귀속을 추진했고 이로 인해 이슬람 교도가 주를 이루는 파키스탄과 힌두교도가 주를 이루는 인도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동부지방은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점령하고 있다. 1950~60년대에는 이 세 나라 사이에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기까지 했던 곳이다. 인도가 점령하고 있는 카슈미르는 잠무카슈미르 주로, 파키스탄이 점령하고 있는 카슈미르는 아자드카슈미르 주로 분리되었다. 한때는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간 충돌로 많은 인명피해를 내기도 하였다. 현재 카슈미르의 남부지방은 인도, 북서부 지방은 파키스탄, 북동부지방은 중국의 통치를 받고 있다. 스리나가르는 젤룸강이 도시의 중앙을 흐르는 북서부 카슈미르 계곡의 중심도시로, 도처에 운하와 수로가 있으며 선박이 주요 수송수단이다. 시내에는 무굴제국시대 때 만들어진 정원들이 많이 있으며, 주민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이다.
크리스 춤의 신들린 상태, 바투불란, 발리, 인도네시아, 1949
신들린 상태로 크리스 춤을 추는 사람들..... 힘줄과 핏줄이 울뚝불뚝 솟은 한 남자가 날카로운 도구로 자신의 가슴팍을 찌르는 모습이 섬뜩하기조차 하다. 집단 무의식의 무아지경에 빠지면 이처럼 고통조차도 잊을 수 있는 것이다. 종교적 믿음이라는 것도 어쩌면 신들린 상태에서나 가능한 것이 아닐까? 오랜 옛날부터 전해져 오는 종교적 춤을 추는 사람들은 심장의 고동소리와도 같은 리듬에 맞춘 단순한 동작의 끝없는 반복에 의해서 서서히 신들린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 그들은 영혼의 정화라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돌조각 마을로 유명한 바투불란은 인도네시아 발리의 수도인 덴파사에서 북동쪽에 위치해 있다. 그 곳으로 가는 길가에 있는 바위그림이 바투불란 마을임을 알려준다. 마을의 집과 사원마다 선과 악을 상징하는 그림이 장식되어 있으며, 민속품을 파는 상점에서는 돌조각가들이 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본 교토 대덕사(大德寺), 1965
일본 교토에 있는 대덕사 대선원 안의 정원을 찍은 사진이다. 대덕사의 지붕들 사이로 보이는 정원이 너무나 단정하고 깔끔하다. 마루 아래 놓인 신발들도 가지런하고..... 지붕의 짙은 암흑색은 이 절이 매우 오래된 사찰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일본의 정원은 자연을 함축해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대덕사 정원도 섬이 있는 연못의 풍경을 재현해 놓았다. 바로 오른쪽 앞에 보이는 넓고 평평한 바위는 섬을, 작은 돌멩이를 깔고 파도문양을 그어 놓은 것은 연못의 물을 각각 상징한다. 때로는 서로 색깔이 다른 자갈을 문양에 따라 깔기도 한다. 또 이 작은 돌멩이들은 바다를 상징하기도 한다. 나무는 바위에 심어서 자라는 것을 억제한다. 왜냐하면 일본의 정원들은 대개 규모가 작아서 나무가 너무 커버리면 다른 정원 구성요소와 조화를 잘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돌멩이를 어떤 색깔 어떤 방법으로 배치하고, 나무를 어떤 종류 어떤 방향으로 심느냐에 따라서 음양오행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일본의 정원은 자연미보다는 인공미가 훨씬 더 두드러진다.
대덕사 고봉암(孤蓬庵)에는 일본국 국보로 지정된 막사발이 하나 있다. 이 막사발은 일본에서 4백여년 전부터 이도다완(井戶茶碗)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왔는데, 그 당시 조선인 도공에 의해 만들어진 42개의 막사발 중 하나라고 한다.
일본 혼슈 미야코, 1965
바위섬이 바로 앞에 보이는 바닷가에서 어디론가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는 노인..... 노인은 어디를 가려고 저리도 바쁜 걸음을 옮기는 것일까? 아마도 지나온 삶들을 정리하면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노인의 마지막 여행일지도..... 지팡이에 의지해서 홀로 길을 가는 노인이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바위섬 꼭대기에 홀로 서있는 소나무와 노인의 모습이 어딘가 닮아 있는 듯 하다.
미야코는 일본 혼슈(本州) 이와테현(岩手縣)에 있는 도시로 미야코 만에 면해 있으며, 헤이강(閉伊川)의 어귀에 있다.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 : 1603~1867)부터 주요 어항으로서 연어·송어·고등어가 많이 났으며, 지금은 목재를 수입하는 주요 항구다. 인근의 조도가하마(淨土ヶ浜)는 리쿠주(陸中) 해안국립공원의 일부로서 고래의 분수공(噴水孔)으로 유명한 곳이다.
프로방스(Provence, self-portrait), 1999
왼쪽으로는 죽 늘어선 나무들과 그 나무들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고.....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 서있다. 그림자의 주인공은 브레송 자신이다. 그는 나무와 자신의 그림자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브레송은 일생동안 선불교에 그의 정신적 바탕을 두고 사진을 찍었다. 그는 바로 이 사진을 통해서 형태와 개념, 외부와 내부, 실물과 그림자, 색(色)과 공(空) 사이의 관계를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림자.....
프로방스(Provence)는 프랑스 남동부의 옛 지방이름으로 현재의 부슈 뒤 론 ·바르 ·바스잘프 ·보클뤼즈 ·알프 마리팀 등 5현(縣)에 해당하며, 주도(主都)는 에크스 앙 프로방스이다. 론강(江) 좌안(콩타브네상을 포함)과 하구(河口)의 카마르그 지방을 제외하고는 산이 많다. 동부 이탈리아 국경에는 해안(海岸) 알프스가 솟아 있고, 지중해 연안에는 모르 ·에스테렐 등 오래된 산맥이 있으며, 내륙에는 방투산(山) ·생트 빅투아르산과 같은 석회암의 작은 산이 있다.
프랑스 파리, 팔레 왕립공원(Le Palais Royale), 1960
팔레 왕립공원의 풍경이다. 땅에는 눈이라도 내린 듯 온통 하얀색이다.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움직임이 있다. 靜中動이다. 줄을 지어 늘어선 키 큰 나무들에 비해 아주 작게 보이는 사람들.....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되는 편안한 사진이다. 브레송은 현실에 어떠한 인위적인 조작도 하지 않고 자연광만으로 사진을 찍은 사람이다. 그는 대상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을 가장 적절한 시기에 포착했다.
프랑스 브리(Brie), 흑백인화, 1968
대평원의 한가운데로 비포정도로가 지나가고..... 두 줄로 늘어선 가로수들은 끝없는 터널을 만들고 있다. 화면 가득히 펼쳐진 장대한 스케일은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한 폭의 랜드스케이프같은 사진..... 브레송의 가슴속에는 대평원과도 같은 한없는 여유로움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사진을 찍을 수 있었겠는가! 이 사진을 바라보는 나 자신도 한가로움과 여유, 그리고 평화를 마음껏 느낄 수 있었다.
브레송은 이렇게 말했다. ' 나에게 있어서 사진의 내용은 형식과 분리될 수가 없다. 형태에 의한 표면, 선, 명암의 상호작용의 엄격한 구성을 의미한다. 우리들의 내면과 정서가 굳어지고 전달될 수 있는 것은 이런 구성내에서만이다. 사진에 있어서 시각적인 구성은 오직 훌륭한 직관으로부터 생겨날 수 있다.'고.....
쮜리히(Zurich), Switzerland, 1953
스위스 쮜리히의 잔잔한 호수에 떠 있는 두 사람..... 얼마나 한가로운 정경인가! 그들 바로 곁에는 물오리 한 쌍이 떠 있고..... 대지연의 품에 안긴 채 편안한 휴식에 들어가 있는 두사람의 모습이 평화로우면서도 아름답다.
시테 섬(Isle de la Cite), 1952
세느강변을 찍은 사진이라는데..... 정중앙의 섬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아취형 다릿발의 곡선미와 좌우대칭을 이루는 다리의 균형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프랑스 파리, 흑백인화, 1985
오른쪽으로는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이 보이고..... 공장의 굴뚝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마치 한 장의 환경운동 포스터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다. 역광을 이용한 사진이라 하늘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검은 실루엣으로 나타나 있다. 그래서 느낌이 더 암울하고 을씨년스럽다.
이 작품은 20세기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의 굴뚝산업이 멀지 않은 미래에 도래할 공해의 심각성을 경고하고 있는 듯 하다. 에펠탑과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공장은 바로 현대문명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브레송은 에펠탑 위에 떠 있는 먹구름을 통해서 파리의 미래, 나아가 전세계 인류의 미래가 어둡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사진은 브레송의 리얼리즘이 잘 구현된 작품이다.
베를린 장벽 설치 이후, 서독, 흑백인화, 1962
베를린을 동서로 가르는 철조망이 쳐진 장벽에서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다. 1961년 이래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질 때까지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을 28년간이나 갈라놓았던 철의 장막..... 철없이 놀고 있는 저 어린이들은 이 장벽이 왜 세워지게 되었으며,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이 장벽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다 줄 것인지 알고나 있었을까?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저 베를린 장벽..... 브레송은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어린 아이들과 장벽의 대비를 통해서 이념대립의 비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베를린 장벽(The Berlin Wall), 1963
베를린 장벽에서 목을 빼고 동베를린쪽을 바라보고 있는 세 남자..... 친지나 친척을 지척에 두고도 오고가지 못하는 비극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다. 어른들은 베를린 장벽이 왜 생기게 되었는지를 알고 있다. 그것은 패전 독일에 대한 강대국들의 강제분할로 인한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바로 위의 사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든다.
그리스 에피루스, 1961
생애의 대부분을 주로 사진촬영을 위해 전세계를 여행을 하는 것으로 보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그는 그리스에도 갔다. 거기서 그는 이 장면과 조우한다. 한 소년이 산길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는 장면을.....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사진이다. 브레송은 어느 나라에서 찍은 사진이든 민족적 특징이나 국가마다의 고유한 지역적 색채를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거의 똑같이 일상적 상황만을 공통되게 처리하였다. 그래서 그의 사진에는 피사체들의 개별적 특징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오로지 일상적 상황만이 나타나 있을 뿐이다. 그의 주제는 언제나 일상적인 상황이었다. 일상성의 미학 이것은 브레송의 사진 미학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에피루스는 '그리스의 스위스'라고 일컬어지는 산악지대이다. 그리스에서 가장 강우량이 많은 지역으로 삼림이 풍부하여 주요 하천의 수원지가 되고 있다.
잠든 여성(Woman Asleep), Juahitan, Mexico,1934
어린 아이의 어머니인 듯 한 멕시코 여성이 벽에 기댄 채 잠들어 있는 모습이다. 깊은 잠에 빠져있는 듯 한 그녀의 얼굴이 매우 평화로와 보인다. 이 사진에서도 브레송의 일상성의 미학을 발견할 수 있다.
칼레 카우테모친(Calle Cuauhtemocztin), Mexiko, 1934
대문의 네모진 틀 밖으로 상체를 내밀고 있는 멕시코 성매매 여성들..... 짙은 화장을 하고 순박한 웃음을 짓고 있는 여성과 쏘아보는 듯 한 눈빛을 한 여성이 대조적이다. 작가는 이 여성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 사진에 가득 담겨있는 것은 인간애다. 인간애는 바로 브레송의 사진철학인 것이다.
브레송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애의 뜨거운 관심이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한다'고.....
미국 뉴욕시 호보켄의 화재, 1947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한 뉴욕시 호보켄의 화재현장이다. 건물의 잔해만 남은 화재현장이 처참하다. 뭉게구름이 한가로이 흘러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뒤로 보이는 고층빌딩 숲과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화재현장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탈리아 로마, 1959
한 남자가 라이카 카메라를 들고 공터를 둘러싼 건물들의 지붕이 만들어낸 네모진 공간을 통해서 형성된 햇빛의 스포트라이트 속으로 누군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때마침 한 어린 소녀가 스포트라이트 속으로 들어온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는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그는 바로 브레송이다. 이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서 브레송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을까? 햇빛이 비치는 네모진 공간이 생길 때까지, 또 그 공간으로 누군가 들어올 때까지.....
시프노스 섬( Island of Siphnos, The Cyclades, Greece), 1961
좁은 골목의 계단길을 올라가고 있는 한 어린이..... 하얀 벽과 계단, 그리고 계단을 올라가는 한 어린이와 건물의 그림자는 사실적이면서도 초현실주의적인 느낌을 준다. 이 사진에서는 보통의 다큐멘타리 사진이 가지는 공적, 도덕적 메시지는 보이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평범하고 가능한 한 단순하게 촬영했다. 이처럼 브레송은 특이한 미의 추구나 심오한 이데올로기로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다만 살아 숨쉬는 삶의 리얼리티를 표현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이 사진은 시공간을 포괄해서 의식의 흐름이 하나로 맞아떨어진 바로 그 순간을 기가 막히게 포착하고 있다. 브레송은 이 순간을 '결정적 순간'이라고 명명한다.
브레송은 이렇게 말한다. '촬영 대상의 움직임에 의해 만들어지는 순간적인 윤곽의 생성이 있다. 우리는 마치 삶의 전개에 있어서 예감적인 방법이 있듯이 움직임의 조화 속에서 작업한다. 그러나 하나의 움직임 속에는 그 동작의 과정에서 각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는 한 순간이 있다. 사진 촬영은 이 순간을 포착해야만 하고 그것의 평형상태에서 고정된 때를 잡아야 한다.'고...........
마른 강변에서, 프랑스, 1938
강변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두 쌍의 남녀..... 강에는 빈 배에 낚시대만 드리워져 있고.....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가하고도 여유롭다. 이 사진에서도 일상성의 미학이 발견된다.
라 빌레트, 파리, 1929
거리 모퉁이에 쓰러져 있는 한 남자..... 길가는 여성이 그를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무슨 사연으로 저 남자는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것일까? 브레송의 인간애는 이런 장면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한다. 자기 한 몸조차도 가눌 수 없는 한 남자에 대한 그의 연민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독일, 1945
강제 수용소에서 풀려난 여인이 그녀를 고발했던 게슈타포 밀고자를 지목하고 있다. 밀고자를 둘러싼 사람들의 눈빛에는 분노로 가득 차 있고..... 밀고자는 두려운 표정으로 얼굴을 떨어뜨리고 있다. 역사상 인류에 대한 가장 큰 범죄로 알려진 나찌 독일에 의한 유태인 학살을 증언하는 한 장의 사진이다. 브레송이 '20세기의 증인'이라고 일컬어지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마르세이유, 프랑스, 1932
낡은 옷차림의 남자는 술취한 듯 잔디밭에 누워 잠들어 있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자는 비스듬한 자세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누워 있는 사나이는 따스한 햇빛을 받으며 오수를 즐기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희망을 잃어버린 채 낮술에 취해 잠이 든 것일까?
이탈리아, 1933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바다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는 두 연인..... 탐스런 유방을 가진 여인은 두 다리로 남자의 허리를 낀 채 물장구를 치고 있다. 활짝 편 두 팔에서 자유와 해방감이 느껴진다. 상당히 에로틱한 장면이다. 낭만적인 바다 지중해의 러브스토리가 이 한 장의 사진에 담겨 있다.
이탈리아, 1933
젊은 여성이 나체로 바다 한가운데 떠 있다. 마치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한 마리 나비처럼..... 드넓은 바다에 온몸을 내맡긴 채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모습이다. 인체의 아름다움이 잔잔한 바다를 배경으로 잘 드러나 보인다. 나신 위에 드리워진 물결이 만든 그림자가 여체의 곡선미와 함께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이 사진을 보고 그 누가 외설스럽다고 할 것인가!
운동회, 모스코바, 1954
소련의 젊은이들이 웃통을 벗은 채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절도있게 팔을 흔드는 동작이 매우 힘차다. 공산주의 혁명을 완수하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브레송은 스탈린이 죽은 뒤 공식적으로 소련을 방문한 최초의 서방측 사진작가이다. 이 사진은 20세기를 증거한 장면 중의 하나다.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연방, 1972
아르메니아의 한 남자가 자신의 아이를 손위에 올려놓고 행복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부자간의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같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다가올 미래는 바로 네가 주인공이야.'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아르메니아는 북쪽과 동쪽으로 그루지야와 아제르바이잔, 서쪽으로 터키, 남쪽으로 이란과 접해 있다. 자카프카지예 지역 남쪽 부분에 위치하며 평균고도가 해발 1,800m에 이르는 산악지대이다. 북부를 소(小)카프카스 산맥이 가로지르고 중동부에 세반 호가 있다. 소련을 구성했던 공화국 가운데 하나이며 서남아시아의 유서깊은 지역에 위치한 국가이다.
역사적으로 국경선의 변화가 상당히 심했던 지역으로 고대 아르메니아가 지금의 아르메니아와 터키 북동부 지방에 걸쳐 있었던 반면 오늘날의 아르메니아는 자카프카지예 지역의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등 3개 국가 가운데 가장 좁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터키령(領) 아르메니아는 아르메니아와 달리 정치적으로 독립하지 못했고 대부분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메니아에 거주하는데 터키령 아르메니아에는 소수만이 살고 있다. 아르메니아의 수도는 예레반이다.
출발을 앞둔 국민당 관리, 상하이, 중국, 1948
중국 공산당에 패하여 대륙을 버리고 대만으로 쫓겨난 국민당..... 출발을 앞둔 국민당 관리의 모습이 초라하다. 장개석의 국민당군은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 인민해방군에 패배하여 대만으로 쫓겨나게 된다. 당시 국민당은 부패가 만연했다. 부패로 인해 국민당은 인민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고 결국 공산당에 중국대륙을 내줄 수 밖에 없었다.
인민해방군의 난징(南京) 입성, 중국, 1949
국민당군을 몰아낸 중국 인민해방군이 남경에 입성하고 있다. 대장정을 마친 뒤 일본군, 국민당군과의 끊임없는 전투로 인민해방군 병사들이 지칠 대로 지쳐 보인다. 중국인들이 그들을 호기심 반 불안감 반으로 바라보고 있다.
'대장정(大長征)' 또는 '대서천(大西遷)'으로 불리는 장정은 1934년부터 36년까지 중국 인민해방군이 국민당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2만5000리를 걸어서 이동했던, 전설적인 전투를 가리킨다. 애초 장정에는 10만 명이 참여했으나 하루 한번 꼴로 전투를 치르고 18개의 산맥, 24개의 강을 건너면서 불과 7000여 명 정도만 살아 남았다. 전투와 질병, 굶주림으로 죽어간 이들 중에는 마오쩌둥의 두 자녀와 동생도 포함돼 있다.
인민해방군은 장정의 목적지인 연안에 도착한 뒤 전열을 정비해 중일전쟁을 치렀고, 1945년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마침내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 전역을 장악하는 공산혁명에 성공했다.
예금 인출, 국민당 최후의 날, 상하이, 중국, 1949
국민당 정부가 무너지자 예금을 서로 먼저 인출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국민당 정부가 발행한 화폐가 일순간에 휴지조각이 되는 순간이다. 브레송은 지금 중국 국민당 정부가 몰락하는 순간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증인답게.....
베이징(Peking), China, 1949
중국의 어린이들이 표을 한 장씩 고사리같은 손에 들고 줄을 지어 길게 늘어서 있다.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키작은 남자 어린이가 잔뜩 겁먹은 표정이다. 저 아이의 장래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이처럼 세계 여러 지역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역사의 현장에는 어김없이 소형 카메라를 든 브레송이 있었다.
할렘(Harlem), 1947
조화로 장식한 모자를 쓴 젊은 흑인 여성이 할렘가를 걷고 있다. 상당히 매력적인 여성이다. 미국땅을 한번도 밟아보지 못한 나에게 할렘하면 언뜻 흑인과 빈민굴이 떠오른다. 아마도 미국영화를 많이 본 탓이 아닌가 생각된다.
할렘은 미국 뉴욕 시 맨해튼 섬과 맨해튼 구(區) 북부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구역으로 행정구역과는 달리 뚜렷한 경계가 없다. 대략 북쪽으로 155번가, 동쪽으로 이스트 강과 할렘 강, 남쪽으로 96번가(센트럴 공원의 동쪽)와 110번가, 커시드럴 공원도로(센트럴 공원의 북쪽과 서쪽으로 이어져 있음), 서쪽으로는 앰스터댐 애버뉴 등이 할렘의 경계로 간주된다.
할렘이란 용어는 자주 뉴욕 시의 흑인 거주지역과 동의어로 사용되는데 이것은 정확한 사용이 아니다. 실제로 흑인 인구는 확대되어 이 지역을 넘어서 맨해튼이나 브롱크스, 브루클린 등 다른 지역까지 널리 퍼져 살고 있다. 게다가 뉴욕 시의 대규모 지역사회인 푸에르토리코인들의 주거 중심지가 96번가로부터 북쪽으로 파크가에 이르는 동부 할렘 지역까지 뻗어 있다. '스패니시 할렘'이라는 경멸적인 어조의 지명을 가진 이 지역은 블랙할렘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다. 116번가를 축으로 해서 동쪽의 렉싱턴가에서부터 이스트 강까지는 아직까지 '이탤리언 할렘'이 남아 있다. 그동안 할렘의 인구를 구성하는 인종집단간의 심각한 마찰이 계속되어왔다.
와싱톤(Washington DC), 미국
한 흑인 청년이 호수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 또 한 사람의 흑인 청년이 호수를 바라보면서 지나가는 순간 거의 서로 대칭을 이룬다. 브레송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셔터를 누른다. 건너편에는 하얀색의 건물이 고풍스럽게 서있고 호수는 더없이 잔잔하다. '할렘, 1947'이나 이 사진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광경이다.
Cell in a Model Prison in the U.S.A., 1975
감옥에 갇힌 죄수가 쇠창살 사이로 불끈 쥔 주먹을 발과 함께 내밀고 있다. 교도소 당국에 무언가 시위를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는 무슨 죄목으로 감옥에 온 것일까? 또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쇠창살에 갇힌 자유..... 자유는 그것을 잃었을 때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다.
2005년 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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