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5일, 새벽 4시.경북 문경 팔영리 [유수원향] 산막에서 새벽 아침을 맞다. 아침을 먹고 밖으로 나오니 새벽별들이 아스라하다. 동트기 전의 새벽별은 언제 보아도 찡하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세수를 하려고 두 손을 모아 물을 받으니 그 차가움이 뼈속까지 전해 온다.
6시 반경 이화령에서 산행이 시작되었다. 아직까지도 사위는 어두워서 전등을 밝혀야만 했다. 구름 한점 없는 하늘엔 샛별이 유난히도 반짝거린다.
681M 봉우리에 있는 헬기장을 지나면서 날이 점차 밝아 온다. 갈미봉[770M]에서 일출을 보다. 어둠을 밀어내고 떠오른 태양이 동녘 하늘을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갈미봉 안부에는 수십만 평 규모의 억새밭이 펼쳐져 있다. 얼마전 영남알프스 사자평에서도 이런 장관을 보았었는데.....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오기 시작한다. 산봉우리마다 아침 안개가 걸려 있다.
8시경 황학산 삼거리에 이르렀다. 나뭇가지들에는 안개가 얼어 붙어 설화를 피우고 있다. 불어 오는 바람에 설화조각들이 날린다. 설화가 얼굴을 때릴 때마다 따끔거린다.
8시 반쯤 백화산[1063M]에 오르다. 정상에는 문경의 어느 산악회에서 세운 표지석이 서 있다. 바람도 잠시 약해진 틈을 타 쉬어 가기로 한다. 산이름이 白華山인 것은 속리산 가까이에 靑華山이 있기 때문일까? 나뭇잎을 떨군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을 드러낸 채 하늘을 향해 무언의 손짓을 한다. 무엇을 향한 손짓일까? 벌써 따뜻한 봄날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백두대간 위에 서면 언제나 가슴이 뭉클한 어떤 것을 느낀다.
백화산에서 대간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서쪽을 향해 치달린다. 고사리밭등이라고도 하는 평전치를 지난다. 안개가 걷히면서 산능선과 계곡들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점심때가 다 되어 이만봉[989M]에 오르다. 바람이 불어 오지 않는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고 요기를 하다. 배가 몹시 고파 위장이 아우성을 치던 터라 뭐든지 꿀맛이다. 요기를 한 후 잠시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다.
시루봉[914.5M]을 오른쪽으로 둔 채 대간은 남서쪽으로 방향을 튼다. 한동안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희양산[998M] 안부 성터에 이르렀다. 성의 방향이 북쪽인 것으로 보아 신라때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백두대간은 삼국시대에 바로 국경선의 역할도 했던 것이다.
2시 쯤 희양산에 오르다. 정상은 거대한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 멀리 속리산맥이 한 눈에 들어 온다. 희양산 내려가는 길은 거의 수직암벽이다. 다행히 굵은 밧줄이 매어져 있다. 저번에 왔을 때는 누가 줄을 다 끊어 놓았었는데,그 사이 누군가 다시 매어 놓았다. 줄이 없으면 굉장히 위험한 길이다. 계곡에서 치솟아 오르는 강한 바람에 모래가 휘날린다. 눈과 코로 흙먼지가 마구 들어가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한동안 암벽과 씨름을 한 뒤에 지름티재로 내려 왔다. 이 고개는 은티마을에서 문경 봉암사로 통하게 해 준다. 지름티재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한다. 낙엽이 발목까지 쌓인 양지바른 곳에는 바람이 잔잔하다.
구왕봉[898M] 오르는 길은 경사가 몹시 가파르다. 길이 바로 눈앞에 바짝 대들듯이 나타난다. 그만큼 경사가 급하고 험하다.
한동안 땀을 흘린 뒤에 드디어 구왕봉에 오르다. 뒤에 두고 온 희양산 암봉을 바라보니 바위경치가 장관이다. 어쩌면 바위가 저렇게도 장중하고 장엄할 수가 있을까? 화엄의 세계가 바로 저런 모습이 아닐까? 구왕봉 정상에서 귤과 배로 갈증을 풀었다. 산에서 먹는 과일맛이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구왕봉을 내려 와 900M급 봉우리 두 개를 더 넘고서야 은티재에 닿았다.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은티마을로 내려 왔다. 집집마다 서 있는 감나무에는 잘 익은 감들이 조발조발 달려 있다. 늦가을의 서정이 아늑한 은티마을을 더욱더 평화롭게 보이게 한다.
오늘 산행은 장장 10시간 반이나 걸렸다. 다리도 아프고 무릎관절도 시큰거린다.
산행을 할 때면 늘상 느끼는 것이 있다. 오르막 길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 길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네 인생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2001년 11월 2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