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 순례기

은해사를 품에 안은 팔공산 은해봉을 찾아서 1

林 山 2019. 12. 19. 22:29

산을 오를 때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러 갈 때처럼 언제나 즐겁고 행복하다.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자연과 동화되는 즐거움도 크지만 정상에서 사방으로 탁 트인 일망무제의 풍경을 감상하는 기쁨도 그 무엇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은 항상 마음을 설레이게 한다. 



은해사 앞 인공폭포


치일천(治日川)을 따라서 오르다가 천왕문(天王門)을 지나 인공폭포 바로 아래 놓인 다리를 건너면 은해사다. 치일천은 팔공산(八公山, 1,192.3m)의 은해봉(銀海峰, 891m)과 삿갓봉(931m), 신녕봉(新寧峰, 997m)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른다. 치일천은 운부골과 절골, 기기암골을 지나 은해사 계곡에서 합류한 뒤 영천시 청통면 원촌리 월촌마을에서 신녕천(新寧川)으로 흘러든다. 신녕천은 남쪽으로 흘러 금호강(琴湖江)으로 합류하고, 금호강은 다시 남서쪽으로 흘러 낙동강(洛東江)으로 합류한다.  


은해사 보화루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소재 은해사는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제10교구 본사이며, 동화사와 더불어 팔공산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특히 은해사는 본존불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시는 미타도량으로도 유명하다.


1850년(철종 1) 은해사 중수가 완료되자 당대 최고의 서화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평소 가깝게 지내던 주지 혼허 지조(混虛智照)의 부탁을 받고 일주문의 '銀海寺(은해사)' 현판을 비롯해서 금당(金堂)의 '大雄殿(대웅전)', 종루(鐘樓)의 '寶華樓(보화루)', 불광각(佛光閣)의 '佛光(불광)', 노전(爐殿)의 '一爐香閣(일로향각)' 편액 글씨를 써 주었다. 


보화루는 은해사 경내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2층 누각이다. 누각 처마에는 해서체(楷書體)로 쓴 '寶華樓(보화루)' 편액이 걸려 있다. 이 편액은 추사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무심한 마음으로 쓴 듯 졸박미(拙樸美)가 엿보인다. '樓(루)'자 '木(목)'변의 략(掠)획을 짧게 그은 것은 나머지 두 글자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보화(寶華)는 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불보살(佛菩薩)의 세계 즉 불국토(佛國土)를 말한다. 그래서 보화루를 지나는 것은 불국토로 들어간다는 의미가 있다. 


'銀海寺(은해사)'를 비롯해서 '大雄殿(대웅전)', '佛光(불광)', '一爐香閣(일로향각) 현판은 은해사 성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은해사 성보박물관은 내부 수리 중이라 추사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없어서 아쉬웠다. 


신일지


은해사에서 치일천(治日川)을 따라 북서쪽으로 1km쯤 올라가면 신일지(新日池)가 나타난다. 신일지 제방 근처에 운부암(雲浮庵)과 백흥암(百興庵)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가 있다. 여기서 서쪽 골은 백흥암이 있는 절골, 북서쪽 골은 운부암이 있는 운부골이다.  


백흥암


삼거리에서 절골을 따라 서쪽으로 1.5km 정도 올라가면 백흥암에 닿는다. 백흥암 북동쪽에는 태실봉(胎室峰, 466m)이 솟아 있다. 태실봉 동쪽 능선에는 조선 인종(仁宗) 이호(李峼, 1515~1545)의 태실(胎室)이 있다.     


백흥암은 암자로서는 그 규모가 꽤 큰 편이다. 이 암자에서는 한때 수백 명의 승려가 모여들어 수도하였다고 한다. 암자 주변에는 잣나무가 많아서 창건 당시에는 백지사(栢旨寺), 또는 송지사(松旨寺)라 불렀다. 


백흥암 극락전(極樂殿)은 1984년 7월 5일 보물 제790호로 지정되었다. 극락전 안팎에는 여러 가지 비단 무늬를 그린 금단청(錦丹靑)을 올렸다. 조선 중기의 문양 및 색조가 잘 보존된 이 금단청은 벽화와 함께 매우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극락전의 아미타삼존불상(三尊像)을 떠받치고 있는 수미단(須彌壇)은 보물 제486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미단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 천녀(天女), 동자, 봉황, 공작, 학, 용, 코끼리, 사자, 사슴,·물고기, 개구리 등이 입체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불교 미술의 정수로 알려진 이 수미단은 한국 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백흥암 진영각


진영각(眞影閣) 온돌방에 걸려 있는 十笏方丈(시홀방장)’ 판액 글씨는 추사가 쓴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판액 왼쪽 하단에는 '卍波正法(만파정법)'이라는 도서(圖書)가 새겨져 있다. 만파(卍波)는 조선 후기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에서 수행했던 만파 의준(萬波誼俊, 1796~?)이다.


(宋)나라 대문장가인 쑤둥포(蘇東坡)가 유마경(維摩經)의 내용을 인용해 지은 시구를 추사가 쓴 것이다. 이 여섯 폭 주련도 추사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주련의 원본은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我觀維摩方丈室(아관유마방장실) 사방 열 자 유마거사의 방 들여다보니

能受九百萬菩薩(능수구백만보살) 능히 구백만 보살을 모두 들여도 남고

三萬二千獅子座(삼만이천사자좌) 삼만 하고도 이천에 이르는 사자좌를

皆悉容受不迫迮(개실용수불박책) 모두 다 들이고도 전혀 비좁지 않으며

又能分布一鉢飯(우능분포일발반) 또한 능히 한 발우의 밥을 나누어서도

饜飽十方無量衆(염포시방무량중) 한없는 대중 배불리 먹일 수 있겠더라


보화루(樓)에는 추사가 쓴 '山海崇深(산해숭심)' 모각본 편액이 걸려 있다. 원본은 도난을 우려하여 은해사 성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원본의 '海(해)'자는 가로획을 오른쪽으로 기울어지게 썼는데, 모각본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지게 쓴 점이 다르다. 


'山海崇深(산해숭심)' 편액


백흥암 '山海崇深(산해숭심)' 편액은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山崇海深(산숭해심)', '遊天戱海(유천희해)' 예서(隷書) 대련 글씨체와 똑같다. '山海崇深(산해숭심)'은 기괴(奇怪)한 듯하지만 웅혼(雄渾)한 기상(氣像)이 넘치는 글씨다. 예서를 바탕으로 행서풍(行書風)의 운필을 약간 곁들여서 쓴 이 글씨는 뛰어난 필력과 한 자 한 자 한껏 살려낸 조형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무명폭포


백흥암에서 절골을 따라 1km쯤 올라가면 묘봉암(妙峰庵) 갈림길이 나오고, 거기서 산굽이를 돌아들면 은해능선에서 발원하는 무명폭포가 나타난다. 폭포에서 가파른 비탈길을 500m 정도 올라서면 중암암(中巖庵)에 이른다. 


중암암 산신각


요사채를 지나면 약수터가 나오고, 약수터 암벽 위에 산신각(山神閣)이 자리잡고 있다. 산신은 원래 산과 그 주변을 수호하는 한민족 고유 토착신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신이었는데, 불교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호법신중(護法神衆)으로 습합(習合)된 것이다.   


중암암 관음전, 삼성각


산신각과 바위 절벽을 사이에 두고 관음전(觀音殿)과 삼성각(三聖閣)이 자리잡고 있다. 관음전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주불로 모시는 전각이다. 관세음보살이 주원융통(周圓融通)하게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존재라는 뜻에서 원통전(圓通殿)이라고도 한다. 샤카무니(釈迦牟尼)의 입적 이후 미래불인 미륵불(彌勒佛)이 출현할 때까지 중생들을 고통으로부터 지켜준다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보살이다. 한국에서 관음전이 많이 세워진 까닭은 관세음보살이 모든 환란을 구제하는 보살일 뿐만 아니라 그의 서원이 중생의 안락과 이익에 있고, 불가사의한 인연과 신력(神力)으로 중생을 돕는 보살이기 때문이다. 


삼성각은 산신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을 모시는 전각이다.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칠성신은 인간의 수명과 재복(財福), 강우(降雨)를 관장하는 신이다. 칠성에 대한 신앙은 특히 중국의 도교(道敎)에서 발달하여 이후 불교와 민간신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독성은 홀로 인연의 이치를 깨달아서 도를 이룬 독각(獨覺)의 성자이다. 독성은 일반적으로 나반존자(那畔尊者)를 말한다. 나반존자는 천태산에서 스승 없이 홀로 도를 닦아 십이인연(十二因緣)의 이치를 깨달았기에 독성이라고 한다. 독성신앙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 불교 특유의 신앙이다. 중국 불교에는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이 없다. 석가모니의 십대 제자나 오백 나한의 이름 가운데도 나반존자라는 명칭은 찾아볼 수 없다. 불경에도 그 이름이나 독성이 나반존자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불교계 일부에서는 나반존자가 말세의 중생에게 복을 주는 아라한의 한 사람으로 신앙되고 있기에 18나한의 하나인 빈두로존자(賓頭盧尊者)로 보고 있다.


한국에서는 독성신앙에 단군신앙(檀君信仰)이 결합되어 있다는 설도 있다. 독성각이나 삼성각에 모셔지는 나반존자의 모습은 하얀 머리에 매우 긴 눈썹을 하고 있으며, 대개 미소를 띠고 있다. 단군(檀君)은 후에 산으로 들어가서 산신이 되었다고도 하고 신선이 되었다고 하여 단군을 산신으로 모시거나 선황(仙皇)으로 받들었다. 그래서 명산에 신당을 세우고 산신 또는 선황을 신봉하여 왔다. 그런데, 불교가 들어오면서 불전 위 조용한 곳에 전각을 세우고 산신과 선황을 같이 모셨으며, 또 중국에서 들어온 칠성도 함께 모셨다. 나반존자상은 곧 단군상이라는 주장이다. 


돌구멍


중암암 대웅전으로 들어가려면 요새의 석문처럼 생긴 돌구멍을 통과해야 한다. 그래서 중암암을 '돌구멍절'이라고도 부른다.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은 대웅전을 그냥 지나치기 쉽다. 어떻게 이런 절터를 찾아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중암암 대웅전


중암암은 팔공산 은해사의 산내 암자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이 암자는 통일신라 때인 834년(흥덕왕 9)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중암암에서 유명한 것은 바위 벼랑 사이의 깊은 해우소(解憂所)다. 이 해우소에는 재미있는 설화 하나가 전해오고 있다. 


옛날 해인사(海印寺)와 통도사(通度寺), 그리고 돌구멍절에서 수행을 하던 세 승려가 한 자리에 모여 각자 자신이 머물고 있는 절을 자랑했다. 먼저 통도사 승려가 돌구멍절의 협소한 법당문을 바라보면서 '통도사 법당문은 어찌나 큰 지 한번 열고 닫으면, 문지도리에서 쇳가루가 한 말 서 되나 떨어진다'고 자랑했다. 해인사 승려는 '우리 절은 스님들이 어찌나 많은지 동짓날 팥죽을 끓이려면 가마솥이 하도 커서 배를 띄워야 한다'며 절의 규모를 자랑했다. 자랑할 것이 없었던 돌구멍절의 승려는 '우리 절 뒷간은 얼마나 깊은지 정월 초하룻날 볼일을 보면, 섣달 그믐날이 되어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자랑을 했다. 그랬더니 해인사, 통도사 승려가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우스개 소리로 한 말이지만 그만큼 중암암 해우소가 깊다는 말이 되겠다. 


심지에 대해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심지계조조(心地繼祖條)에 기사가 실려 있다. 심지의 속성은 김씨(金氏), 신라 제41대 헌덕왕(憲德王, 재위 809~826)의 아들이며, 15세에 출가하여 팔공산에서 불도에 정진하였다. 심지는 속리산(俗離山) 점찰법회(占察法會)에 참석했다가 영심(永深)이 내린 불골간자(佛骨簡子)를 받들고 팔공산으로 돌아왔다. 마중을 나온 산신과 두 신선을 데리고 산에 올라간 심지는 서쪽을 향해 간자를 던졌다. 산신은 '막혔던 바위 멀리 물러가니/숫돌처럼 평평하고/낙엽이 날아 흩어지니/앞길이 훤해지네/불골간자를 찾아 얻어서/깨끗한 곳 골라 정성드리려네.'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간자는 지금의 동화사(桐華寺) 참당(籤堂) 자리에 날아가 떨어졌다. 심지는 그 자리에 동화사를 짓고 그 개산조(開山祖)가 되었다. 


1732년에 나온 '동화사사적기(桐華寺事蹟記)'에는 493년(소지왕 15)에 극달(極達)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부르다가, 832년(흥덕왕 7)에 심지왕사가 중창했는데, 사찰 주변에 오동나무꽃이 상서롭게 피어 있어 동화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삼국유사'와 '동화사사적기'의 동화사 창건 연대와 창건주에 대한 기록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사찰에서는 종종 신성성(神聖性)과 신비성(神祕性)을 강조하기 위해 창건 연대를 올리거나 고승을 창건주로 삼는 경우가 있다.  


심지가 팔공산의 사찰과 암자를 창건하거나 중창한 연대를 살펴보자. 심지는 804년(애장왕 5)에 파계사(把溪寺)를 창건하고, 832년(흥덕왕 7)에 동화사를 중창했다. 834년(흥덕왕 9)에는 중암암과 묘봉암(妙峰庵)을 창건하고, 835년(흥덕왕 10)에는 환성사(環城寺)를 창건했다. 심지는 파계사의 개산조로서 동화사를 중창한 다음 중암암과 묘봉암, 환성사를 차례로 창건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리고 왕사(王師) 제도는 고려와 조선 초기에 나타난 것이다. 신라시대에 왕사 운운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심지는 동화사를 중심으로 유식(唯識) 법상(法相)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유가(瑜伽)의 초조 태현(太賢)이 기반을 다진 유식 법상은 진표(眞表)가 이어받아 영심에게 전해졌고, 영심의 법은 심지에게 계승되어 고려로 이어졌다. 심지는 진표와 영심을 이어 신라 법상종(法相宗)의 제3조가 되었다. 


중암암은 조선 후기 1823년(순조 23) 태여(太如)가 중수하였고, 1834년(순조 34)에도 우일(宇一)과 유엽(有曄)이 중수하였다. 1958년 중암암을 다시 중건할 때 지금의 대웅전과 산신각을 세웠고, 1980년대에는 요사를 새로 지었다.


돌구멍 바로 앞에는 암벽을 오르는 돌계단길이 있다. 돌계단길을 약 20m 올라가면 거대한 바위로 둘러싸인 좁은 터에 은해사 중암암 삼층석탑(銀海寺中巖庵三層石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2호)이 세워져 있다. 중암암 법당처럼 작고 아담한 석탑이다. 석탑 바로 곁에는 석등(石燈)과 부도(浮屠)의 부재(部材), 건물지로 보이는 석축이 남아 있어 중암암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려준다.  


중암암 삼층석탑


중암암 삼층석탑은 3m 높이에 기단부(基壇部), 탑신부(塔身部), 상륜부(相輪部)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 지대석(地臺石)은 잘 다듬은 장대석(長大石) 4매를 정방형으로 결합시켜 깔았다. 


지대석 위 하층기단(下層基壇)은 4매의 면석(面石)을 결구한 하대석(下臺石)을 놓고, 그 위에 3매석으로 결구한 하대갑석(下臺甲石)을 올렸다. 하대석의 면석 중앙에는 탱주(撑柱) 1개, 모서리에는 우주(隅柱)가 모각(模刻)되어 있다. 하대갑석 상면에는 상층기단(上層基壇) 상대석(上臺石)의 면석을 받기 위한 1단의 괴임이 각출되어 있다. 상층기단의 상대석은 4매의 면석으로 결구했고, 그 위에 상대갑석(上臺甲石)을 얹었다. 상대갑석 상면에는 탑신부 탑신석(塔身石, 몸돌)을 받기 위한 1단의 괴임이 각출되어 있다. 상대석의 면석 중앙에는 탱주 1개, 모서리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삼층의 탑신부 각층은 몸돌과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으로 구성되었다. 입방체의 몸돌은 층위가 올라갈수록 높이와 크기가 작아지는 것 외에는 동일한 양식이다. 몸돌 모서리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모두 낙수면의 경사가 다소 심한 편이다. 우동(隅棟)과 전각(轉角)은 살짝 반전되어 있어 날씬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지붕돌 아래에는 모두 옥개받침을 두고 상면에는 괴임을 각출했다. 1층 지붕돌은 옥개받침 4단에 괴임 1단, 2층과 3층 지붕돌은 옥개받침 3단에 괴임 1단을 각출했다. 3층 지붕돌 상면은 괴임에 이어 방형의 노반(露盤)까지를 한 돌로 만들었다.  


상륜부는 노반과 보륜(寶輪) 하나만 남아 있다. 보륜은 노반 위에 얹혀 있으며, 반구형으로 4엽의 복련(覆蓮)을 새긴 듯하지만, 마모가 심해 확인이 어렵다. 보륜은 보통 9개로 구성된다. 가운데에는 찰주공(擦柱孔)이 노반까지 관통하고 있다. 상륜부를 구성하는 나머지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8개, 보개(寶蓋), 수연(水煙), 용차(龍車), 보주(寶珠), 찰주(擦柱)는 사라지고 없다. 


상륜부 부재 하나하나는 다 그 의미가 있다. 노반은 승로반(承露盤)의 준말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불로장생의 감로수(甘露水)를 받아먹기 위하여 만들었다는 쟁반이다. 감로수는 도리천(忉利天)에 있는 것으로 달콤하고 신령스런 액체이다. 한 방울만 마셔도 온갖 번뇌와 괴로움이 사라지며, 살아 있는 사람은 장수하고 죽은 이는 부활한다고 한다. 그래서 불사주(不死酒)로도 일컬어진다. 도리천은 불교의 상징 세계인 욕계(欲界) 6천(六天) 가운데 둘째 하늘이다. 도리천을 33천(三十三天)이라고도 한다.


복발은 탑의 노반 위에 놓는 엎은 주발 모양의 장식이다. 천상(天上)의 돔(Dome) 또는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상징한다. 극락정토는 불교에서 서쪽으로 10만억 불국토(佛國土)를 가면 있다고 하는 이상향이다. 참된 마음으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믿고 염불하면 죽어서 극락에 태어난다는 믿음이 있다. 


앙화는 탑의 복발 위에 놓고 활짝 핀 연꽃모양을 새긴 장식이다. 33천을 형상화한 것이다. 귀하고 깨끗한 곳임을 상징한다. 보륜은 탑의 꼭대기에 있는 9층의 둥근 원반형(圓盤形) 장식으로 구륜(九輪)이라고도 한다. 천계(天界)를 상징한다. 바퀴 형태로 불법을 전파한다는 의미도 있다. 보개는 천개(天蓋)라고도 한다. 석탑이 귀한 신분임을 상징한다. 


수연은 물안개라는 의미다. 보개 윗부분의 불꽃 모양으로 만든 장식이다. 화재 같은 재난의 예방을 기원하며 조성한 장식이다. 불법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물안개처럼  퍼진다는 의미가 있다. 용차는 용의 수레라는 뜻이다. 수연 위의 철로 만든 둥근 장식물이다. 만물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자리를 상징한다. 


보주는 부처의 진리가 빛처럼 사방으로 고루 비치는 것을 상징한다. 중생을 정신적인 번뇌와 세속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공덕과 신통력을 가진 상징체이다. 부처나 보살의 지물로 표현되기도 한다. 찰주는 상륜의 중심 기둥으로 상륜부를 지탱한다.  


중암암 삼층석탑은 언뜻 보아도 신라시대 양식의 석탑임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 석탑 양식의 기준은 경주 불국사(佛國寺)에 있는 석가탑(釋迦塔, 국보 제21호)이다. 기단부가 다소 약화되고 상륜부가 사라지기는 했지만, 중암암 삼층석탑은 석가탑을 1/3 정도로 축소한 것과 그 형태나 양식이 거의 같다. 따라서 이 석탑은 중암암이 세워진 연대와 비슷한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암암 삼층석탑


석가탑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법화경)에 나오는 샤카무니 붓다(Sakyamuni Buddha, 釋迦牟尼佛)를 탑의 양식으로 상징해서 세운 것이다. 법화경(法華經)은 불탑신앙을 하는 승단에 의해 성립된 대표적 대승경전이다. 법화경의 핵심은 전반부에서 회삼귀일(會三歸一), 후반부에서 샤카무니의 수명이 무량함을 밝힌 것이다. 회삼귀일이란 3승(三乘)은 결국 1승(一乘)으로 돌아간다는 가르침이다. 샤카무니가 이 세상에 출현하여 1승 성문승(聲聞乘), 2승 연각승(緣覺乘), 3승 보살승(菩薩乘)에 대한 가르침을 설했지만, 그것은 결국 1승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1승은 법화경의 가르침을 체득하는 것이다. 샤카무니의 수명이 무량함이란 샤카무니를 영원한 부처라고 함으로써 불교 신앙의 대상을 확립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