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암암 삼층석탑 바로 옆에는 큰 바위들이 얼기설기 엉켜서 한 사람 정도 빠져나갈 수 있는 크기로 형성된 극락굴(極樂窟)이 있다. 극락굴을 화엄굴(華嚴窟), 환선굴(幻仙窟)이라고도 한다. 극락굴에는 신라시대 원효대사(元曉大師)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원효대사가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저술할 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어 이곳 바위 절벽에서 '화엄경약찬게(華嚴經略纂偈)'를 암송했다. 게송을 외던 원효대사가 홀연히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어 온몸이 불타오르며 불빛을 발산하자 바위 절벽이 갈라지면서 천지가 진동했다. 그 소리에 일순간 의문이 풀리면서 '화엄경소'를 완성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화엄굴이라는 이름의 유래다.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전설을 역사적 사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원효대사는 경주 분황사(芬皇寺)에 주석하면서 '화엄경소' 등을 집필했다. 원효대사는 '화엄경소'를 완성하지 못하고 입적했다.
한편, 극락굴은 신라 장군 김유신(金庾信)의 수도처로 알려진 중악석굴(中嶽石窟)이라는 주장도 있다. 중악석굴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김유신전(金庾信傳)에 나온다. 진평왕(眞平王) 33년 17살의 김유신은 고구려와 백제 병합의 뜻을 품고 혼자 중악석굴에 들어갔다. 그는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고하여 도와주기를 청하였다. 4일이 지나자 갑자기 갈옷을 입은 선인(仙人) 난승(難勝)이 나타나 김유신에게 석굴에 들어온 까닭을 물었다. 난승이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절을 올린 김유신은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할 수 있는 방술을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김유신이 눈물을 흘리며 간절하게 청하자 선인은 비법을 알려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난승이 사라진 산 위에는 오색찬란한 빛이 서려 있었다. 환선굴이라는 이름의 유래다.
극락굴
극락굴에는 조선 후기 화엄학(華嚴學)의 대강백 영파 성규(影波聖奎, 1728~1812)의 일화도 전해 온다. 영파대사가 어느 여름날 극락굴에서 정진하다가 삼매(三昧)에 들었다. 학인들 강의 시간도 놓치고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은해사 큰절 대중들이 모두 찾으려고 나섰다. 이때 극락굴에서 나오는 영파대사를 본 대중들은 그가 법력이 높은 고승임을 알았다. 강원의 승려들도 영파대사를 본받아 불법 공부에 정진했다고 한다.
경남 합천 해인사(海印寺) 근처에서 태어난 영파대사는 화엄학과 선(禪), 염불(念佛) 등에 모두 밝았던 대흥사(大興寺) 13대강사(十三大講師) 중 한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학문과 글씨에 뛰어났던 그는 동국진체의 완성자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 문하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15세되던 해인 1742년(영조 18) 영파대사는 청량암(淸凉庵)에서 승려들이 불공드리는 모습을 보고 출가할 결심을 하였고, 1747년(영조 23) 청도 용천사(湧泉寺) 환응(喚應) 장로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해봉(海峯), 연암(燕巖), 용파(龍坡), 영허(影虛) 등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다.
하루는 돈오(頓悟)를 결심하고 금강대(金剛臺)에 머물면서 이포성공척결도량(伊蒲盛供滌潔道場)을 설하여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법력을 구하였다. 이포성공척결도량은 간단한 삿자리만 깔고 4분 정근 하는 기도장을 말한다. 4분 정근은 새벽, 사시, 2시, 저녁 등 하루에 4번 정성을 다해서 예불을 하는 것을 말한다. 9년 뒤 황산(黃山)의 퇴은(退隱)으로부터 '화엄경(華嚴經)' 전질(全帙)을 받아 30년 동안 연구하여 깊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영파대사는 선을 공부할 때도 '화엄경'을 탐독했고, 보현보살(普賢菩薩)과 관세음보살을 '화엄경'에 입각하여 원불(願佛)로 삼았다. 상언(尙彦)과 해원(海源)을 찾아가 화엄의 종지(宗旨)와 선의 진수를 체득한 뒤, 해원으로부터 법맥(法脈)을 이어받았다. 그 뒤 등단(登壇)하여 대흥사, 은해사 등에서 많은 제자들을 지도하였다.
영파대사는 대비주(大悲呪)를 하루 일과로 삼았다. 대비주는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경(千手千眼觀自在 菩薩廣大圓滿無崖大悲心大陀羅尼經), 줄여서 천수경(千手經)의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陀羅尼)를 말한다. 천수다라니(千手陀羅尼)라고도 한다. 영파대사는 1777년(정조 1)부터 1781년까지 5년 동안 대비주를 무려 10만 번이나 염송하였다고 한다.
연담(蓮潭) 이후 다문(多聞)과 덕망(德望)이 가장 뛰어난 승려로 평가를 받았던 영파대사는 결코 희로(喜怒)를 얼굴에 나타내는 일이 없었고, 뜻을 일찍부터 정토(淨土)에 두어 세속에 물드는 일이 없었다. 항상 자비로써 병든 자를 보면 지극히 간호하였고, 재력에 따라 가난한 자를 보살폈다. 자신에게는 게으름을 용서하지 않았고, 몸단속을 단정히 하여 가부좌를 흩뜨리는 일이 없었다.
평생토록 남의 시비를 말하지 않고 의가 아니면 티끌 하나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았으며, 불경 천 상자를 배에 싣고 동해와 남해의 명찰들을 편력하면서 대중을 교화하였다. 저술이나 제자들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영파대사는 1812년(순조 12) 7월 27일 입적하였다. 속세의 나이 85세, 법랍 66세였다. 1816년(순조 16)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 남공철(南公轍)이 글을 짓고 심의경(沈宜慶)이 글씨를 쓴 '유명조선국영파대사비(有明朝鮮國影波大師碑)'가 은해사에 세워졌다. 영파대사의 글씨는 은해사 백흥암(百興庵) '華嚴室(화엄실)' 판액에 남아 있다. 그의 글씨가 동화사 비로암(毘盧庵) 대적광전(大寂光殿) 편액에도 남아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확인하지는 못했다.
만년송
중암암 삼층석탑에서 암릉으로 올라서면 아름드리 만년송(萬年松)이 바위 사이에 뿌리를 박고 꿋꿋이 서 있다. 나무가 제대로 자라지 못해 둥치에서 가지가 벋어나왔다. 높이 자라면 바람에 쓰러지기 쉽기에 키를 키우지 않으려는 소나무 나름대로의 지혜다. 만년송은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세찬 비바람과 눈보라를 견디며 인고의 세월을 보냈으리라. 만년송에서 세상의 모진 풍파를 이겨내고 세상을 달관한 도인의 풍모가 엿보인다.
'三印岩(삼인암)' 암각서
만년송 남쪽 바위벼랑 끝에는 '三印岩(삼인암)'이라는 글씨가 예서체(隸書體)로 오목새김(음각)되어 있다. 중암암 뒤 암릉을 삼인암이라 명명한 것이다. 삼인암 바로 뒤쪽 바위에는 영천군수(永川郡守) 조재득(趙載得) 삼형제의 제명(題名)이 새겨져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명을 받고 경기도와 황해도, 평안도 세 관찰사가 관인(官印)을 소나무에 걸어놓고 평상복 차림으로 무학대사(無學大師)를 찾으러 갔다는 삼인봉(三印峰) 고사가 있다. 영천군수로 내려온 조재득은 삼인봉 고사에 비겨 자신과 원주판관(原州判官) 조재한(趙載翰), 고산현감(高山縣監) 조재리(趙載履) 삼형제의 관인을 상징하여 '三印岩(삼인암)’이라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조재득이 1759년(영조 35) 9월 3일부터 1762년(영조 38) 7월 3일까지 영천군수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三印岩(삼인암)’ 암각서는 이 무렵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일설도 있다. 옛날 어느 처녀가 자식이 귀한 집에 시집을 갔으나 아이를 가질 수 없어 걱정이 태산같았다. 이때 한 승려가 이 장소를 일러주며 정성을 드리면 소원을 이룰 것이라고 했다. 승려의 말대로 정성을 드리니 마침내 3형제를 낳았다. 그래서 삼인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또 세 친구가 뜻한 바가 있어 이 곳에 와서 정성을 드리고 열심히 노력해서 모두 소원 성취해서 삼인암이라 이름 지었다고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삼인(三印)'이 불교의 세 가지 진리인 삼법인(三法印)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삼법인은 모든 현실 존재가 변화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사물은 실체가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 모든 번뇌가 사라져 평온한 상태인 열반적정(涅槃寂靜)이다. 삼법인에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는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더하면 사법인(四法印)이 된다.
천부삼인(天符三印)이란 것도 있다. 천부삼인은 대종교(大倧敎, 檀君敎)에서 단군왕검(檀君王儉)이 한웅천왕(桓雄天王)으로부터 받아서 세상을 통치하였다는 세 개의 인(印)을 가리킨다. 대종교의 '한단고사(桓檀古史)'에는 천부삼인(天符三印)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하지만 그 형태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로 고찰할 때 천부삼인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와 원방각(圓方角, ○□△) 삼묘(三妙), 성명정(性命精) 삼진(三眞), 인지용(仁智勇) 삼달(三達)의 표상(表象)으로 추정된다.
암중송(岩中松)
삼인암에서 얼마 안 되는 지점에서 암중송(岩中松)을 만났다. 제대로 자라지 못해 말라 비틀어진 모습이다. 이런 나무들을 보면 왜 마음이 짠해지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운명이니 팔자라는 게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떤 솔씨는 옥토에 떨어져 아름드리 낙락장송으로 자라는가 하면, 어떤 솔씨는 그 좋은 땅 다 놔두고 생명이 도저히 깃들어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이런 바위틈에 떨어져 목숨을 부지하기에도 급급한 소나무가 되기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떤 사람은 재벌 상속자, 왕가의 왕세자 신분으로 태어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부모의 빚을 대물림 받아 빚쟁이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추모비
능선을 타고 얼마쯤 올랐을까? 바위 옆에 세워진 산악인 추모비(追慕碑)를 만났다. 추모비에는 '고 장승남 당신 영원한 친구로 기억하겠습니다. 2010年 10月 2日 한올림 일동'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산을 좋아해서 산을 오르다가 산에서 대지의 어머니 품으로 돌아갔으니 이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속세의 이별은 또한 슬프지 않을 수 없다. 인연법 때문이다. 내가 본 가장 인상적이고 감명 깊었던 묘비명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을 순례할 때 점봉산(點鳳山, 1,424m) 정상에서 보았다. 묘비명에는 '너는 점봉에서 산이 되는구나'라고 쓰여 있었다. 묘비명의 주인공은 정말 산을 사랑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은해봉에서 바라본 팔공산
삼인암을 떠난 지 1시간쯤 되었을까? 마침내 은해봉 정상에 올라섰다. 은해봉은 전망이 매우 뛰어나 팔공산맥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구의 진산(鎭山)인 팔공산은 옛날에는 중악(中岳), 부악(父岳), 공산(公山), 동수산(桐藪山)이라고도 불렀다. 팔공산 비로봉(毘盧峰, 1,192m)을 중심으로 양쪽에 동봉(東峰, 1,167m)과 서봉(西峰, 1,150m)이 있으며, 대구광역시를 품에 안은 팔공산맥은 경산시, 영천시, 군위군, 칠곡군을 거느리며 멀리 구미시까지 뻗어간다.
팔공산의 유래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관련이 있다. 후삼국시대 견훤(甄萱)이 서라벌을 공략할 때 왕건이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후백제군을 정벌하러 나섰다가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만나 포위를 당하였다. 그때 신숭겸(申崇謙)이 왕건으로 가장하여 수레를 타고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함으로써 왕건은 겨우 목숨을 구했다. 당시 신숭겸과 김락(金樂) 등 8명의 장수가 모두 전사하여 팔공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팔공산은 160.1km에 이르는 팔공기맥(八公岐脈)의 주산이기도 하다. 태백의 피재라고도 하는 삼수령(三水嶺, 935m)에서 백두대간(白頭大幹)과 이별한 낙동정맥(洛東正脈)은 남쪽을 향해 치달려 내려오다가 통점령(通店嶺, 794m)과 가사령(佳士嶺, 509m) 사이의 가사봉(733.9m)에서 서쪽으로 팔공기맥의 가지를 친다. 가사봉을 떠난 팔공기맥은 고라산(高羅山, 744.6m), 베틀봉(934m), 면봉산(眠峰山, 1,121m), 보현산(普賢山, 1,126m)을 지나 석심산(石心山, 750.6m)에서 북쪽으로 보현지맥(普賢枝脈)의 가지를 친다. 팔공기맥은 다시 남쪽으로 방가산(方可山, 755.8m), 화산(華山, 828.1m)을 지나 팔공산 주봉인 비로봉에 이른다.
팔공기맥은 비로봉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서봉, 가마바위봉(1,054 m), 상여바위봉(1,018 m), 파계봉(把溪峰, 991m), 삼갈래봉(834m)으로 이어진다. 삼갈래봉에서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꾼 팔공기맥은 치키봉(757m), 가산(架山, 901.6m), 좌베틀산(369.2m), 청화산(靑華山, 700.7m)을 거쳐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새띠마을에 이른 다음 낙동강에 그 맥을 담근다.
팔공산의 북쪽에는 위천(渭川)의 상류인 남천(南川)과 여러 계류(溪流)가 흐르고, 동쪽에는 신녕천(新寧川)이 흐른다. 위천은 흘러서 낙동강으로 합류하고, 치일천과 신녕천은 흘러서 금호강으로 합류한다.
은해봉에서 바라본 관봉
팔공기맥의 한 지맥은 비로봉에서 남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동봉, 염불봉(念佛峰, 1,085m), 신녕봉(新寧峰, 997m), 삿갓봉(930m)을 지나 은해봉에 이른다. 은해봉에서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꾼 산줄기는 노적봉(露積峰, 891m), 관봉(冠峰, 780m)을 지나 환성산(環城山, 807.2m), 낙타봉(駱駝峰, 656m), 초례산(醮禮山648m), 조로봉(196.6m)으로 이른 다음 금호강에 그 맥을 담근다.
팔공산은 산세가 웅장해서 예로부터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의 본사인 은해사(銀海寺)를 비롯해서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의 본사인 동화사(桐華寺), 파계사(把溪寺), 선본사(禪本寺), 수도사(修道寺), 북지장사(北地藏寺), 관암사(冠巖寺), 송림사(松林寺), 부인사(符印寺) 등 유서 깊은 사찰과 거조암(居祖庵), 백흥암(百興庵), 묘봉암(妙峰庵), 중암암(中巖庵), 운부암(雲浮庵), 기기암(奇奇庵), 서운암(瑞雲庵), 백련암(白蓮庵), 원효암(元曉庵), 염불암(念佛庵), 내원암(內院庵), 양진암(養眞庵), 부도암(浮屠庵), 비로암(毘盧庵), 성전암(聖殿庵) 등의 암자가 들어서 있다. 동화사는 조일전쟁(朝日戰爭,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泗溟大師) 유정(惟政)이 승군(僧軍)을 지휘하였던 곳이다.
은해봉에서 바라본 팔공CC
은해봉 서쪽 계곡에는 팔공 컨트리클럽(CC)이 들어서 있다. 팔공산 남쪽에는 도덕산(660m), 거저산(520m), 서응해산(518.2m), 응해산(526m), 삼마산(345m), 왕산(191m), 화담산(204.4m), 문암산(431m) 등 구릉성 산지가 솟아 있고, 그 사이사이로 하천이 남류하여 동화천(桐華川)에 모인 후 금호강으로 흘러든다. 금호강은 다시 흘러 낙동강으로 합류한다.
은해봉에서 바라본 은해능선
은해봉 동쪽으로는 은해능선이 뻗어간다. 은해능선은 삼거리봉에서 동쪽의 태실봉능선과 갈라진 다음 남동쪽으로 뻗어내려 은해사에 이른다. 태실봉능선은 삼인암, 태실봉을 지나 신일지로 뻗어간다.
은해봉 정상에서
은해봉 정상에 서서 팔공산맥의 산봉우리들을 하나하나 바라다본다. 이것도 하나의 인연법이다. 이제 저 산이 나를 보고 내려가라고 한다. 산을 올랐으니 이제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팔공산맥을 가슴에 한껏 담은 뒤 하신길에 오르다.
2019.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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