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0일은 내게 있어 매우 의미있는 날이다. 20여년 전인 2000년 1월 30일 이 땅의 진보정치를 부르짖으며 민주노동당이 창당된 날이기 때문이다. 북유럽식의 복지국가를 꿈꾸던 나는 독일이나 스웨덴 사회민주당(사민당) 같은 정당이 출현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그런 비젼을 가진 정당이 창당됐다. 바로 민주노동당이었다.
대변항에서 만난 부산경남 민지네 회원들(2005년)
나는 입당한 지 얼마 안되어 민주노동당 충주시지구당(준) 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 정치 이념을 추구하는 동지들과 함께 민주노동당 공개정파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자율과 연대(자율과 연대)'를 결성하고 초대 대표를 맡았다. 우리는 한국에 북유럽 사민당 같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민주노동당에는 사민주의를 개량주의라고 폄훼하고 매도하는 당원들도 있었다. 사회주의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이 붕괴하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말이다. '자율과 연대'는 사민주의 정당이 보수정당과 당당하게 경쟁하는 날이 곧 한국의 민주주의가 한 단계 더 발전하고 통일이 앞당겨지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그러한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2002년 12월 19일 실시된 제16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권영길 후보가 출마했다. 새천년민주당에서는 노무현 후보, 한나라당에서는 이회창 후보가 출마했다. 민주노동당원들은 한나라당을 딴나라당이라고 불렀다. 나는 권영길 대선후보 충청북도 공동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열심히 뛰어다녔다. 권영길 후보가 당선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당시 나는 세명대학교 한의과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다행히도 방학 중이어서 유세를 다닐 수 있었다.
나는 노무현, 이회창 후보보다 권영길 후보가 백번 훌륭한 후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임대한 구닥다리 용달차 한 대를 유세차로 개조해서 충주시 전역을 구석구석 다니면서 민주노동당과 권영길 대선후보를 알렸다. 손에 마이크를 잡으면 신바람이 났고 행복하고 즐거웠다. 산골 마을까지 찾아가 보수정당, 보수후보들을 마음껏 비판하고, 진보정치와 진보후보 권영길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돌이켜보면 이때처럼 내 인생이 활기찼던 때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지역구 2석, 비례대표 8석(정당 득표율 13.1%)을 획득하여 진보정당 최초로 원내진출을 했을 때는 정말 너무 기쁘고 행복했다. 하지만 이름도 모르던 사람들이 비례대표 앞순위에 당선되고 노회찬 전 의원이 뒤로 밀리는 것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한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자주파가 장악한 당은 평당원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갔다.
결정적인 사건이 일심회 사건이었다. 검찰은 최기영 당시 민주노동당 사무부총장, 이정훈 전 민주노동당 중앙위원이 북한의 지령에 따라 민주노동당 중앙당의 동향, 시도당 및 지역위원회 위원장에 대한 개인정보 등을 북한으로 넘기는 등의 활동을 했다고 발표했다. 당원들은 이 사건을 정보기관과 검찰의 공작이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당시 심상정 민주노동당 대표는 당의 실권을 쥐고 있는 자주파의 친북노선 청산을 주장하며, 2008년 2월 3일 열린 당대회에서 최기영, 이정훈 등 '일심회 관계자 제명 안건' 등을 담은 당 혁신안을 상정했다. 혁신안에는 '자율과 연대'가 주장했던 정파등록제를 도입하여 당내 여러 계파들을 공식적으로 등록하는 안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자주파 대의원들이 이 안건을 삭제하는 수정동의안을 발의해 출석 대의원 862명 중 553명의 찬성으로 가결시켜 제명안은 결국 무산되었다.
'자율과 연대'가 당내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줄기차게 주장한 정파등록제도 채택되지 않았다. 민주주의에 가장 근접한 정파등록제를 채택하지 않은 것은 민주노동당이 이제 더이상 민주적인 정당이 아니라는 반증이었다.
복지국가진보정치연대 김준성, 김명일, 안유택, 박용진 공동대표(2011년)
'일심회 관계자 제명 안건'이 무산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당원들은 민주노동당이 자주파에 의해 장악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주노동당이라는 배가 난파 위기에 처한 것이다. 경기동부연합 등의 반민주적인 패악질을 목격한 '자율과 연대'를 비롯한 당원들은 민주주의가 사라진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기로 결정했다. 나도 탈당을 주도했다. 탈당 러쉬가 이어졌고, 민주노동당에는 자주파만 남았다. 홍기표 동지의 말처럼 '적들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 스스로 배를 침몰시켰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이라는 배를 말이다.
2008년 당의 한 축이었던 평등파와 '자율과 연대' 당원들이 대거 탈당하여 진보신당을 결성하면서 민주노동당은 분당되었다. 2011년 국민참여당과 민주노동당, 새진보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파)가 합당을 선언하고 통합진보당이 출범하면서 민주노동당은 소멸되었다.
한때 한국 진보정치의 희망이었던 민주노동당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경제학적 법칙이 한국 정당사에서도 일어났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을 망하게 한 세력은 한국 정치사에서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질렀는지 깨달아야 한다. 한국의 진보정치를 망친 장본인들이다. 이들은 반드시 역사의 단죄를 받아야 한다.
이후 나는 진보신당에 입당했다가 노선과 활동방향이 맞지 않아 탈당했고, 녹색당에도 잠시 입당했다가 마찬가지 이유로 탈당했다. 2011년 4월 16일 출범한 복지국가진보정치연대에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당시 박용진 공동대표는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 강북을구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유치원 3법은 바로 박용진 의원이 열심히 노력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정말 열심히 의정활동을 하는 국회의원이다.
여의도 LG에클라트오피스텔 1층 흐프집에서 만난 '자율과 연대' 동지들(2016년)
당시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네티즌들의 모임(민지네)'이 있었다. 민지네는 분위기가 매우 화기애애해서 전체 회원들의 정모 외에도 전국각지에서 각종 소모임이 열리곤 했다. 민지네 모임은 언제나 가족 같아서 좋았다. 전국 어느 곳을 가더라도 민지네 회원이 있어서 반갑게 만날 수 있었다. 민지네 회원들은 한국에 진보정치를 실현한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이라는 배가 침몰하면서 민지네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민주노동당의 모습은 바로 민지네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민지네 회원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고 있을까? 옛날 함께 울고 웃던 민지네 식구들을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다. 참꽃, 홍자루, 왼쪽눈, 두목, 새벼리, 찬별, 바람, 이비, 대포한잔, 영도다리, 바다, 율곡 님..... 이젠 닉네임도 가물가물하다.
대한민국의 게시판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다는 평을 듣던 진보누리도 민주노동당, 민지네와 비슷한 이유로 사라졌다. 당시 나는 진중권 교수와 함께 진보누리의 필진으로 '林山의 산으로 가는 길'을 연재했었다. 진보누리 정모나 번개모임도 아주 유쾌하고 풍자와 위트가 있었고, 또 즐겁고 재미있었다. 진중권 교수는 진보누리 이후 잘 나가는 것 같다. 진보누리꾼들도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한때는 총선 전략 공천 제안을 받고 민주당에도 잠시 몸을 담았다가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미련없이 곧바로 탈당했다. 보수정당은 내가 몸담을 곳이 아니었다. 노회찬 의원이 세상을 떠난 뒤 나는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정의당에 입당했다. 지금은 한낱 페이퍼 당원일 뿐이지만 말이다.
이젠 모든 것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혀 새소리, 물소리를 들으면서 살아가고 싶다. 바람따라 구름따라 살아가고 싶다.
2020.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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