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10시,건국대 의대 정두용 교수 부부, 영애 연진이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서 대전을 향해 출발했다.중학교 1학년인 연진이가 한문공부를 한다기에 대전에 있는 서당에 데려다 주려는 것이다.서당의 훈장이 내 국민학교 그러니까 지금의 초등학교 후배이기에 나의 소개로 가는 것이다.나의 딸 선하,아들 정하도 지난 여름 방학때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한 적이 있다.선하는 그해 겨울 방학때도 서당에 가서 한문공부를 하였다.
정교수가 운전하는 차는 충주를 떠나 청주-충주간 4차선 도로를 달리다가 증평 톨게이트에서 중부고속도로로 접어 들었다.길가의 산과 들에는 엊그제 내린 눈들로 희끗희끗하다.양지바른 곳은 벌써 눈이 다 녹았다.
중부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다가 경부고속도로로 접어 들었다.회덕에서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서대전 톨게이트로 나왔다.대전에서 논산으로 가는 4차선 도로를 따라가다 계룡대 입구 조금 못미쳐 양지바른 마을에 서당은 있었다.충주에서 대전의 서당까지는 대략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나는 전에 몇번 와본 적이 있어 오늘 길라잡이를 자청하였다.
서당에 도착하니 훈장인 이상규선생이 반갑게 맞는다.그는 옛날의 공주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의 대가인 스승으로부터 한학의 맥을 이어받았다.현대식 교육과 전통교육을 받아서인지 고전을 현대적 의미로 해석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훈장실에서 정교수 부부를 소개하고 연진이를 인사시켰다.큰절을 하라고 하니 쑥스러워서 그런지 그냥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만다.서당에는 벌써 방학을 맞이해 한문을 배우러 온 학동들로 시끌벅적하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댕기동자가 점심상을 차려 내온다.유기농법으로 지었다는 쌀로 밥을 지어서 그런지 밥맛이 그만이다.냉이를 넣어 끓인 된장국은 왜 또 그렇게 구수하던지.............이상규선생이 반주로 마시라고 복분자술을 한잔 따라준다.
覆盆子는 거무딸기라 해서 陽氣를 북돋아 주는데 쓰는 한약재다.옛날에 어떤 할아버지가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배가 고파서 산딸기를 실컷 따먹고 집에 돌아와 오줌을 누는데, 오줌발이 어찌나 세던지 그만 요강이 뒤집어져 버리고 말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복분자는 엎어질 복[覆], 항아리 분[盆], 아들 자[子]를 쓴다.한약재 중에서 열매를 쓰는 것은 子자를 붙인다.
점심을 먹은 뒤 연진이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이르고는 이상규선생과 작별을 고했다.정교수 부부와 나는 왔던 길을 되짚어 길을 나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연진이의 생각이 기특하다.중학교 1학년짜리 아이가 한문공부를 자청해서 하겠다니..............그또래 아이들은 대개 한문공부를 무척이나 싫어하는데...............
나는 지금의 초등학교인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웃마을에 있는 서당에 다녔다.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대신 서당엘 다니게 된 것이다.경기고,서울 법대에 가서 법관이 되겠다던 소년의 꿈이 여지없이 깨져버리는 순간이었다.
천자문책을 옆구리에 끼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서당문을 들어서던 때를 3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훈장선생님은 한복차림에 긴 장죽을 입에 물고 계셨다.아버지가 시키는대로 나는 훈장선생님에게 큰절을 올렸다.내 옆으로는 대여섯명의 학동들이 한문의 뜻을 새기거나 배운 것을 암송하고 있었다.나는 주눅이 잔뜩 들어 눈만 멀뚱멀뚱 뜬 채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의 서당생활은 시작되었다.나는 천자문부터 시작했는데,배운데부터 배운데까지 암송을 해야만 했다.내 차례가 되면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처음부터 전날까지 배운 것을 끝까지 암송을 해야만 했는데,날이 갈수록 양도 많아지고 결국에는 천자문 한권을 통채로 외워야만 했으니 이만저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중간에 틀리는 곳이 있거나 하면 머리통을 향해 곰방대의 놋쇠머리가 여지없이 날아드는 것이었다.
"딱-----"
그러면 순식간에 별이 일곱개쯤 쪼로록 튀어나가고 동시에 눈물이 찔끔 나오는 것이었다.우리는 선생님의 곰방대 놋쇠머리가 무서워서라도 어떻게든 배운 것을 외우지 않을 수 없었다.이렇게 해서 나는 천자문을 완전히 암송하게 되었다.
이듬해 집안 형편이 조금 나아지자 아버지는 나를 중학교에 집어 넣었다.그때부터 나의 한문 실력은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때까지 거의 독보적이었다.四書三經도 나는 독학으로 마스터했다.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때 한문공부의 기초를 튼튼하게 닦은 덕분이다.30년도 더 지난 지금 한의학을 공부하는데 있어서도 그때의 한문공부가 든든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이 세상에 안 계신 송인섭 선생님! 내가 사범대학을 졸업한 뒤 교사가 되었을 때 영원한 스승상으로 삼은 선생님! 내가 교육민주화운동에 뛰어들어 전교조 활동을 하는데도 길잡이가 되셨던 선생님! 해직교사가 되어서도 세상에 아부하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한점의 부끄럼도 없게 살아갈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어 주신 선생님! 내가 돈이나 권력의 유혹을 받을 때마다 그것을 뿌리칠 수 있도록 지켜보시는 선생님! 내가 현직에 있을 때 그토록 닮고자 했던 선생님!
대전의 서당훈장인 이상규선생에게서 나는 송인섭 선생님의 그림자를 보았다.그래서 나는 나의 아이들을 서슴없이 그의 밑에서 훈도를 받게 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정두용교수에게 했더니 자기 딸도 한번 보내고 싶다고 해서 오늘 데리고 온 것이다.
2시간 정도 걸려서 충주로 돌아왔다. 오늘은 아주 기분이 좋은 날이다.
2001년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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