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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무궁화' 비판(20) '무궁화 삼천리'는 어디서 왔을까? - 조현래

林 山 2020. 9. 9. 07:17

무궁화는 한국의 국화(國花)이며, 나라를 상징하는 국장(國章)이기도 하다. 대통령 휘장부터 국회의원 배지, 법원 휘장, 경찰관과 교도관의 계급장 등 나라의 거의 모든 상징은 무궁화이다. 하지만 강효백은 자신의 저서 ‘두 얼굴의 무궁화’에서 이런 무궁화의 위상을 정면으로 배척한다. 무궁화가 우리 고서(古書)에서 거의 ‘피어본 적이 없는’ 꽃이며 오히려 ‘일본의 꽃’이라는 주장을 제기한다. 이에 대해 조현래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을 통해서 이 주장이 친일파 또는 친일 잔재의 척결이라는 과잉 목적의식이 현실과 실제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비판한다. 박정희 정권이 무궁화를 권위주의와 국가의 상징으로 과도하게 선전한 것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지만, 그것이 사실을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어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조현래는 주장한다. 두 사람의 논쟁이 국민들로 하여금 무궁화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林 山>

 

<사진1> 무궁화(경기도)

​ '두 얼굴의 무궁화' 비판(20) '무궁화 삼천리'는 어디에서 왔을까! 

 

 

[두 얼굴의 무궁화] 무궁화가 한반도에 처음 문자로 등장한 것은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 때 배제학당 학도들이 부른 '무궁화 삼천리' 후렴의 애국가에서부터 등장하였다. 『배재 팔십년사』(培材八十年史)에 따르면 무궁화 삼천리 가사는 윤치호가 작사하였고, 곡조는 벙커(D. H. Bunker)기 편곡한 것이다.(p.65)

 

  

 

《fact check(1) '무궁화'가 한반도에 처음 문자로 등장한 것이 윤치호에 의한 것일까? - 전혀 사실이 아니다.

 

▷ '무궁화'라는 한글 또는 한자 표현은 13세기부터 이미 우리 문헌에 기록된 것이다.

-이미 수차례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어 '槿花'(근화) 또는 '木槿'(목근)에 대한 우리 표현으로 '無窮'(무궁) 또는 '無宮'(무궁)이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중후기의 『동국이상국집』(1241)이었다.

-조선 초기 『향약집성방』(1433)은 약재 식물로 '無窮花木'(무궁화나모)를 기록해 현재 사용하는 명칭의 기본적 형태를 정착시켰다.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 저술된『사성통해』(1517)는 한글로 '무궁화'를 최초로 기록했다.

-그 이후 수많은 우리의 문헌에서 한글 '무궁화'와 그에 대한 다양한 한자 표현에 대한 기록은 차고 넘친다. 

최세진, 『사성통해(四聲通解)』, 1517년 간행, 서울대규장각 한국학연구소 소장본

《fact check(2) :  '무궁화 삼천리'라는 말은 윤치호가 처음 만든 것일까? - 전혀 사실이 아니다.

 

▷『배재80년사』에 윤치호 작사했다는 '애국가'가 실려 있는 것은 사실이다. 

 

-『배재80년사』에 기록된 애국가의 후렴구는 현재와 비슷하지만 그외에는 지금 가사와의 차이가 상당히 존재하며, 애국가의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의 대립이 있다.

-문화운동가 임진택씨는 오래전부터 애국가의 작사에 대해 도산 안창호설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프레시안 2020. 4. 4.자 및 2020.4.25.자 기사 등 참조.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저술된 것으로 알려진 다수의 애국가가 있고, 그곳에도 '무궁화 삼천리' 후렴이 들어간 애국가들이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안춘근, 「15. 애국가원류」,『한국고서평석』, 동화출판사(1986), p.188~p.192 참조.

 

 

        [培材八十年史](배재80년사) 중 '22. 애국가(愛國歌)'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을 거행하던 당시에 그 식순 중의 창가 곧 국가를 배재 학당이 맡아서 하게 되어 갑작이 부를 노래를 만들게 되었다. 그 때에 노래는 만드는 가사는 윤치호 박사가 작사하였고, 곡조는 번터(D.H. Bunker) 교사가 스코트랜드의 "놀렐라이" 곡을 부쳐서 연습하여 가지고 정초식에 부른 것이다.(독립신문 제1권 65호 또는 조선일보에서)…중략…독립문 정초식 때에 배재 학당 학원들이 나아가 부른 노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유병민 교수의 기록에서)

 ① "셩자 신숀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수 고려 동 반도는

     우리 본국일세

  (후렴) 무궁화 삼쳔리 화려 강산

            조션 사람  조션으로

            기리 보죤하세

 ② 이천만 오직 한 마음

     나라 사랑하여

     사, 농, 공 상, 귀천 없이

    직분만 다하세" 3.4절은 약함

*주의 : 옛 표기 아래 아(·)는 '아'로 표기를 변경하여 기록함(푸른솔) 

 

김세한,『배재80년사(培材八十年史)』, 학교법인 배재학당(1965), p.186~p.187 참조.

 

▷1777년에 이미 우리의 옛 문헌에는 '무궁화 삼천리'를 뜻하는 '槿花 三千里'(근화삼천리)가 기록되었다!

-홍양호(1724~1802)는 조선 후기 이조판서, 홍문관, 예문관 양관의 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정유년(1777)에 백두산 부근 경흥지방의 부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임지 경흥에 도착하자 태조 이성계가 왕업의 터전을 일구었던 흙집터을 방문하고 그에 대한 감상을 적은 「토우기(土宇基)」를 「朔方風謠」(삭방풍요)의 연작시 중 하나로 남겼다.

-'朔方風謠'(삭방풍요)는 '북녘에서 부는 바람의 노래'라는 뜻이며, 홍양호는 여러 시와 글에서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을 회복해야 한다는 인식을 자주 드러냈었다.

​-그의 시 「토우기(土宇基)」에 등장하는 '檀木槿花三千里'(단목근화삼천리: 박달나무와 무궁화는 삼천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의 조선이 중국의 청나라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민족적 인식을 나타낸다. '槿花'(근화)는 무궁화의 꽃으로 당시 언급되던 근역(槿域)의 모태가 되는 식물이며 무궁화의 나라인 조선이라는 독자적 존재에 대한 인식을, '檀木'(단목=박달나무)은 단군(檀君)의 명칭에 등장하는 신령스러운 나무로 우리 민족을 뜻한다.   

-그는 노래했다. "박달나무와 무궁화는 삼천리에, 척토라도 가리지 않고 문득 자라고 있구나. 백두산은 높고. 청해는 넓나니 자손들 번창은 무궁하리라"

-시의 구절은 애국가의 후렴구,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와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애국가의 실제 작사자가 누구인지 현재로서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누구든 애국가의 후렴구는 이미 1777년에 기록된 시구가 입을 통해 전해져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구절이 아닌가? 

 

 

        [朔方風謠 ](삭방풍요) 丁酉冬 黜補慶興府使(정유년*1) 겨울에 경흥부사*2)로 보해지다)

 

土宇基   흙집터

​在讀書堂北七里山谷中太祖幼時作陶穴讀書之所   독서당 북쪽 7리 산 계곡에 있다. 태조가 어렸을 때 땅을 파서 움집을 만들어 글 읽는 곳으로 삼았다.

 

土宇基靈且奇   흙집터는 신령하고 기이하다
王業起於斯    왕업이 이곳에서 일어났구나.
皇祖避寇自赤島    황조*3)가 오랑캐를 피해 적도에서
雙騎白馬遵海湄    백마를 같이 타고 바닷가를 달렸다
譬如太王踰梁山率西滸    비유컨데 태왕이 양산을 넘어 서쪽 물가를 따라
聿來胥宇同厥妃    여기에 와서 집터를 잡고 왕비와 함께 산 것과 같구나
歸州之山窈且深    귀주의 산은 고요하고 깊으니
陶復陶穴何勤孜    땅을 파서 움집 만드느라 얼마나 부지런했으랴
象爲耕兮鳥爲耘    깊게 밭 갈고 쉴 새 없이 김 메며
山菑水飮禦渴飢    묵정밭에서 물 마시고 굶주림을 견디었네
積厚流光仍發祥    오랜 세월 두터이 쌓으면 복은 내리나니
天降百祿無不宜    하늘이 내린 온갖 복록, 마땅하지 않음 없어라
篤生神孫受景命    소중하게 낳은 신령스러운 자손이 천명을 받으니
化家爲國終不遲    가문이 나라 될 날도 오래지 않아라
檀木槿花三千里  박달나무와 무궁화는 삼천리에
不階尺土奄有之  척토라도 가리지 않고 문득 자라고 있구나
長白山高靑海濶  백두산은 높고 청해는 넓나니
緜緜瓜瓞無窮期  자손들 번창은 무궁하리라
君不見土宇基     그대는 흙집터를 보지 못했는가
誰知王業艱難時    그 누가 알랴! 왕업이 어렵고 어려웠던 시절을
嗚呼誰知王業艱難時    오호! 그 누가 알랴! 왕업이 어렵고 어려웠던 시절을

 

 * 각주1) 정유년 : 홍양호가 경흥부사로 임명된 정유년으로 1777년을 뜻한다.

 * 각주2) 경흥부사 : 백두산 부근의 함경북도 경흥지방의 수령을 말한다.

 * 각주3) 황조 : 조선 태조 이성계의 증조부인 이행리(李行里)를 말한다.

 

홍양호,「삭방풍요(朔方風謠 )」, 『이계집(耳溪集)』, 1777년 

 

《결론 : 무지 혹은 왜곡 

 

▷옛 문헌들을 수차례 전수 심층분석했다는 그는!

-'열거된 원전들을 포함 옛 문헌들을 수차례 전수 심층분석'(p.399)했다는 그는?

-무지한 것인가? 알면서 없는 것으로 왜곡한 것인가?

▷ '무궁화'와 '무궁화 삼천리'는 우리의 역사이다.

 ​

-1517년에 한글로 뚜렷하게 기록된 '무궁화'는 그리고 수없는 문헌으로 반복되었던 '무궁화'는 우리의 역사이다.

-1777년에 기록된 '槿花三千里'(무궁화 삼천리) 역시 우리의 역사이다.

 

​-그가 무지해서 모르는 것이든 알면서도 왜곡하는 것이든 변하지 않는 사실로서 우리의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