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늦으막이 일어나 신대욱씨와 함께 '예림옥'이라는 식당에서 콩나물 해장국으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콩나물 해장국이 참 얼큰하고 시원하다. 콩나물 해장국은 술꾼들이 쓰린 속을 푸는 데 더할나위없이 좋은 음식이다.
식사를 마치고 민주노동당 군산시 지구당 사무실을 방문하였다. 마침 자리에 있던 김홍중 위원장이 반갑게 맞아준다. 그의 부친은 서예대전에서 대상까지 받은 적이 있다는 서예가라고 한다.
오후 1시경 신대욱씨의 배웅을 받으며 군산을 떠났다. 군산에서 김제를 지나면서 사방을 둘러보니 들이 참 넓다. 바로 김제평야를 지나고 있는 것이다. 타지에서 김제로 갓 시집온 새색시가 들이 얼마나 넓은지 자기 논도 못 알아보고 남의 논에서 김을 매고 있더라는 우스개 이야기도 있다. 김제는 그만큼 드넓은 곡창지대다.
▲ 변산반도 새만금 방조제 공사현장 앞바다
갯벌보전을 기원하는 장승 앞에서 필자.
ⓒ2003 임종헌
김제를 지나 부안의 변산반도 해안도로를 따라서 달린다. 해안도로는 잔설이 희끗희끗한 변산을 한바퀴 빙 돌아서 나 있다. 해안도로 초입의 바람머리라는 언덕배기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전망이 기가 막힌 곳이다. 변산 앞바다가 수평선까지 끝없이 펼쳐진다. 이 곳에는 간이화장실과 벤치도 설치해 놓아서 오가는 길손들이 편히 쉬어갈 수 있도록 해놓았다.
바람머리에서 조금 더 가자 변산반도에서 시작되는 새만금 방조제 공사현장이 나타난다. 여기에 와서야 새만금 방조제의 규모를 비로소 실감할 수 있겠다. 바다를 메우는 차량들이 연달아 방조제를 드나들고 있다. 자연을 파괴하는 범죄현장을 눈앞에 보고도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에 마음이 무겁다. 언젠가는 갯벌을 없앤 댓가를 톡톡히 치루리라.
방조제 공사현장에서 가까운 바닷가 백사장에는, 이 땅에서 사라질 운명에 처한 새만금과 그리고 멸종위기에 놓여 있는 각종 동물들 이름을 하나씩 새긴 장승들이 물에 잠긴 채 서 있다. 새만금 갯벌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기원을 담아 세워놓은 것이었다.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들에 대한 무언의 항의와 절규가 귀에 들리는 듯 하다. 나도 그 앞에서 장승이 되어 갯벌을 파괴하는 자들에 대한 무언의 항의를 해본다. 백사장 언덕에는 새만금 방조제 건설을 반대하는 각 종교단체의 임시사무실인 가건물들이 세워져 있다.
사라질 운명에 처한 새만금 갯벌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시를 한 수 적어본다.
새만금아!
새만금아!
너는 죽어서 다시는 이 땅에 오지 말아라.
너를 죽인 이 땅에 다시는 오지 말아라.
새만금아!
너는 죽어서 좋은 세상에 다시 태어나거라.
너를 아끼고 보듬어 줄 그런 세상에 태어나거라.
새만금아!
탐욕스런 인간들의 손에 너는 그렇게 죽어가는구나.
깨어 있는 사람들의 절규에도 속절없이 죽어가고 있구나.
새만금아!
너는 너를 죽인 우리들 가슴에 시퍼런 한으로 남아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생명들의 어머니인 너를 영원히 기억하게 해야한다.
새만금아!
너를 묻는 자리에 우뚝 선 장승의 부릅뜬 눈으로 지켜 보아라.
너에게 깃들어 사는 모든 생명들이 죽어가고 있음을
새만금아!
새만금아!
너는 죽어서 다시는 이 땅에 오지 말아라.
너를 아끼고 보듬어 줄 그런 세상에 다시 태어나거라.
새만금아!
안타까운 가슴을 안고 새만금 방조제 건설현장을 떠난다. 해안도로를 따라서 가다가 보니 적벽강이 나타난다. 마침 밀물이 들어와 있는지라 적벽강은 볼 수가 없었다. 밀물이 들어오면 관람객들을 입장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벽강은 조조가 이끄는 위나라 대군과 주유가 이끄는 오나라 대군간의 적벽대전으로 유명한 중국의 적벽강과 비슷한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여기까지 와서 적벽강을 볼 수 없다니...
매표소 직원이 1시간 정도나 기다려야 물이 빠진다고 하기에 할 수 없이 격포에 있는 채석강으로 갔다. 격포는 자그마한 항구로 해수욕장도 있다.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다. 채석강은 방파제 입구 바로 옆에 있었다. 바닷물의 침식작용으로 단애를 이룬 채석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공중화장실 앞에서는 약장수가 직접 실험을 해가면서 피를 맑게 해준다는 약을 선전하고 있다.
▲ 채석강에서 필자.
ⓒ2003 임종헌
격포항에는 작은 어선들이 여기저기 떠 있다. 먹이를 찾는 갈매기들이 해안을 따라서 날아다닌다. 갈매기를 볼 때마다 리처드 버크의 '갈매기의 꿈'이 생각난다. '멀리 나는 새가 멀리 본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들어 있는 소설이다. 채석강을 나오다가 포장마차에 들러 어묵으로 출출한 배를 채운다. 다시마와 멸치, 그리고 무우를 넣고 끓여서 우려낸 국물이 구수하다.
격포를 떠나 고창으로 향한다. 선운사가 있는 선운산 기슭을 지난다. 선운사는 전국적으로 이름난 사찰인데,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어느 가을에 딱 한 번 와본 적이 있다. 꽤 오래전 일이다. 그 때 선운사 주변의 감나무에 바알갛게 익은 감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선운사는 가을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고창은 또 풍천장어와 복분자술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그런지 길가에는 장어양식장이 흔하게 눈에 띈다.
선운산을 벗어나 작은 마을입구에 있는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었다. 주유소 주인에게 물으니 바로 여기가 전북의 끝동네라고 한다. 동네가 끝나면서 작은 다리를 건너자 전라남도 영광군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영광 법성포로 들어선다. 저녁무렵이라 땅거미가 어둑어둑 밀려오고 있다. 법성포는 굴비로 유명한 곳이다. 내 네째 동생의 처남댁 친정이 이 곳 영광이라고 하던데... 덕분에 명절이면 가끔 품질좋은 굴비를 맛보곤 했다. 여기가 바로 굴비의 고장 영광하고도 법성포란 곳이다.
함평을 지난다. 함평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고구마사건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정부의 낮은 고구마 수매정책에 항의해 일어난 함평농민들의 시위가 연일 신문과 방송에 보도되었던 적이 있다. 그 때 농민들의 시위를 이끌었던 사람이 평민당 출신 전 국회의원 서경원씨다. 그는 후에 밀입북 사건에 연루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징역을 살아야만 했다.
함평을 지나 무안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캄캄한 밤이다. 지리도 모르는데다가 어두운 밤중이라 목포라는 표지판을 길라잡이로 삼고 무작정 달리는 수밖에 없다. 퇴근시간이 넘어서 그런지 4차선 도로 양쪽을 가득 메운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멀리 목포시가지의 야경이 눈에 들어온다.
▲목포 북항 전대윤씨네 집에서.
왼쪽부터 필자,오옥현씨,전대윤씨.
ⓒ2003 임종헌
저녁 7시경 목포에 도착했다. 목포역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유달산장'에 들러 황정원씨와 목포 한솔산악회원인 오옥현씨, 김인웅씨를 만났다. '유달산장'은 지난해 겨울 폭설이 내린 지리산에서 눈과의 사투를 벌이고 목포에 들렀을 때 한 번 와본 적이 있기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오옥현씨는 지지난해 백두대간을 종주하다가 한계령에서 만난 인연이다. 나는 백두대간 종주를 일주일정도 남겨두고 있었고 오옥현씨는 종주를 시작한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 우리는 얼마나 반가웠던지 함께 오색에 있는 민박집에서 하루밤을 묵었었다.
오옥현씨의 안내로 '유달산장' 옆 '한보식당'에서 아구탕에 오곡밥으로 저녁을 먹었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정월 대보름날이다. 자리돔찜, 톳무침같은 내륙지방에서 맛보기 어려운 음식도 여러가지 나온다. 얼마뒤 직장에서 퇴근한 한솔산악회장 전대윤씨도 합석을 했다. 그는 암벽등반에 일가견이 있는 산악인이다. 김인웅씨는 목포과학대 산악부 출신이라고 한다.
저녁을 먹은 뒤 '인동주 막걸리'로 유명한 '인동주마을'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목포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박상복씨와 박우진씨도 달려왔다. 이들은 작년에 내가 속해 있는 충주의 '산을 찾는 사람들' 산악회 초청으로 월악산을 함께 올랐었다. 잘 삭힌 홍어회와 삶은 삼겹살, 묵은 김치 등 이른바 삼합을 안주로 인동주 막걸리를 마시면서 반가움을 나눈다. 인동주는 술맛이 뛰어난 최고의 막걸리다.
내일 한솔산악회 정기산행이 있어 아쉽게도 11시가 조금 지나 자리를 파해야만 했다. 충남 홍성에 있는 오서산을 오를 계획이기에 새벽 5시 반에 떠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박상복, 박우진 씨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전대윤 회장의 집인 신안비치아파트에서 하루 묵어가기로 한다. 바닷가에 위치해 있는지라 아파트 복도에서 바다를 내다볼 수가 있다.
전회장의 집에서 오옥현씨가 사온 맥주를 또 마시느라 새벽 1시가 다 되었다. 긴 여정으로 피곤한데다 술까지 마신 탓으로 잠자리에 들자마자 금방 잠이 든다.
2003.2.15. 목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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