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 순례기

한북삼각지맥의 인왕산에 오르다

林 山 2016. 11. 23. 15:42

풍수지리설에서 서울의  진산(鎭山)은 경복궁(景福宮) 북쪽에 솟아 있는 북악산(北岳山, 342m)이다. 북악산과 함께 서울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동쪽의 낙산(駱山, 125m)은 좌청룡(左靑龍),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338m)은 우백호(右白虎), ·남쪽의 남산(南山, 목멱산, 262m)은 안산(安山)에 해당한다. 이씨 조선 초기 궁궐도 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세운 것이다.   


백두산(白頭山, 2,750m)을 떠나 남쪽으로 치달리던 백두대간(白頭大幹)은 강원도와 함경남도의 도계를 이루는 평강군(平康郡) 추가령(楸哥嶺)에 이르러 서쪽으로 한북정맥(漢北正脈)의 가지를 친다. 한북정맥은 백산(1,095m), 백암산(1,072m), 장암산(1,052m), 주라재(476.5m)를 지나 군사분계선을 넘은 다음 삼천봉(815m), 적근산(1,073.1m), 말고개(690m), 대성산(1,174.7m), 수피령(780m), 복주산(1,152m), 광덕산(1,046m), 백운산(904m), 국망봉(1,167m), 청계산(849m), 운악산(945m), 죽엽산(601m), 불곡산(470m), 호명산(632m), 사패산(552m), 도봉산(739m)을 지나 고양시 덕양구와 양주시 장흥면, 서울시 강북구의 경계봉인 삼각산(三角山, 북한산, 837m) 550m봉에서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상장봉, 노고산, 현달산, 고봉산으로 이어지다가 장명산에서 끝을 맺는다.


삼각산 550m봉에서 남서쪽으로 갈라진 지맥이 한북삼각지맥(漢北三角枝脈)이다. 한북삼각지맥은 삼각산 550m봉을 떠나 영봉,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 용암봉, 일출봉, 시단봉, 보현봉, 형제봉, 구진봉, 북악산을 지나 인왕산에 이른 다음 남산, 행당산을 넘어 중랑천과 청계천이 만나는 곳에서 끝난다.


인왕산에는 5개 정도의 등산 코스가 있으며, 두시간 정도면 오를 수 있다. 주로 많이 이용되는 인왕산 나들목은 청운동 창의문이 있는 자하문고개, 홍제동 세검정유원아파트 앞, 무악재역 근처 홍제동 청구3차아파트 앞, 독립문역 근처 무악동주민센터, 사직동 사직공원 입구 등이다. 인왕산 종주에는 3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무악동 한옥냉면


지하철 서울3호선 독립문역에서 내려 2번 출구로 나와 한옥냉면 오른쪽 언덕길을 올라 무악동주민센터 앞으로 올라가면 천암사 직전에서 갈림길이 나온다. 곧바로 올라가면 미타정사와 국사당을 지나 범바위능선에 이르고, 오른쪽 길을 선택하면 성곽해오름빌 뒤로 해서 범바위능선에 이르게 된다.   


안산


부처바위와 모자바위, 범바위, 인왕산


범바위능선을 따라서 한양도성이 축성되어 있다. 성벽은 옛날에 쌓은 상태 그대로인데 여장(女墻, 성가퀴)은 새로 보수한 흔적이 역력하다. 등산로는 도성의 성벽을 따라 나 있다.  한북삼각지맥의 범바위능선 중턱에서는 한양도성의 치성(雉城) 끝에 있는 부처바위와 모자바위, 그 북쪽으로 범바위, 인왕산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통일로가 통과하는 무악재(毋岳峴) 건너편에는 안산(鞍山)이 나즈막하게 솟아 있다. 


안산을 무악산(毋岳山)이라고도 부른다. 안산은 산세가 마소의 등에 짐을 실어 나르는 기구인 길마(鞍)와 같이 생겼다 하여 길마재라고도 하고, 모래재 또는 추모련이라고도 부른다. 또 정상에 봉수대(서울특별시 개념물 제13호)가 있어 봉우재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어머니의 산이라고 해서 모악산(母岳山),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여러 사람을 '모아'서 산을 넘어야 했기에 '모아산->모악산'이라고도 불렀다는 설도 있다.


조선 창업 초 도읍을 정할 때 하륜(河崙)은 안산의 남쪽을 도읍지로 추천하였다. 안산은 1624(인조 2)년 이괄(李适)의 반란군과 관군이 전투를 벌였던 곳이며, 한국전쟁 때는 국군이 수도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조선인민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격전지였다. 


안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다. 평안도에서 내려온 봉화는 안산 봉수대를 거쳐 마지막 종착지인 남산으로 연결되었다. 안산은 특히 수맥이 풍부하여 옥천약수, 백암약수, 맥천약수, 봉화약수 등 27개의 약수터가 있다. 안산의 남쪽에는 태고종 총본산 봉원사(奉元寺)가 있다. 안산의 북서쪽에는 백련산, 북동쪽에는 인왕산이 있어 연계하여 등반할 수 있다.


범바위에서 바라본 한양도성과 남산


범바위에서 바라본 인왕산과 북악산


범바위에서 바라본 인왕산 치마바위(병풍바위)


한양도성 치성에는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어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치성은 좌우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들을 손쉽게 격퇴할 수 있도록 성곽 일부분을 길게 돌출시킨 것이다. 군사시설이 필요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그려 본다. 


범바위는 전망이 매우 좋다. 범바위능선과 인왕산, 종로 일대와 남산이 한눈에 조망된다. 남산 뒤로 남한산과 검단산, 청계산과 관악산도 보인다. 송파에 들어선 제2롯데월드는 바벨탑처럼 하늘 높이 솟아 있다. 한양도성은 사직터널에서 시작되어 범바위능선을 타고 인왕산을 넘어 북악산으로 이어진다. 


한반도의 호랑이는 죽기 전에 한 번쯤 인왕산에 올라 경복궁을 바라보면서 울부짖어야 조선 호랑이 족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는 백수의 제왕 호랑이가 한반도에도 많이 살았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한양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백성들을 놀라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하지만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 조선총독부가 포수들을 총동원하여 맹수들을 소탕하면서 호랑이는 한반도에서 멸종되고 말았다. 1960년 경남 합천의 오도산에서 표범이 사살된 이후 사람을 위협할 만한 맹수를 보았다는 증언은 나오고 있지 않다. 


인왕산 정상 동쪽 바로 아래 널찍한 바위가 치마바위다. 치마바위는 중종(中宗)의 잠저(潛邸) 때의 부인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가 자신의 연분홍 치마를 벗어서 펼쳐 놓았다는 바위다. 1506년 박원종(朴元宗), 강귀손(姜龜孫) 등은 쿠데타를 일으켜 조선의 제10대 왕 연산군을 몰아내고 이복동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 중종)을 왕위에 앉혔다. 단경왕후는 신수근(愼守勤)의 딸이었고, 연산군의 부인은 신수근의 누이동생이었다. 연산군을 지지했던 신수근은 쿠데타 과정에서 박원종이 보낸 자객에게 수각교(水閣橋)에서 쇠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중종은 즉위 후 신씨를 왕비로 책봉했지만, 박원종 등은 후환이 두려워 죄인의 딸이 국모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여 마침내 폐출되고 말았다. 폐비 신씨는 궁을 나가면서 중종이 자신을 생각하도록 인왕산 바위에 치마를 걸어놓았다고 한다. 치마바위의 유래다.  


일제시대 중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39년 서울에서 ‘대일본청년단회의’를 열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치마바위에 '우리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다. 충성으로서 군국(君國)에 보답하련다.'로 시작하는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새겨 놓았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 후 민족의식이 투철한 사람들이 치마바위에 새긴 글자를 쪼아냈는데 아직도 그 흔적이 너저분하게 남아 있다.        


인왕산에서 바라본 범바위능선


인왕산에서 바라본 범바위능선과 서울시가지


인왕산 정상에서 필자

 

인왕산에서 바라본 기차바위와 삼각산 비봉능선, 형제봉능선


인왕산 정상의 삿갓바위는 범바위보다 전망이 훨씬 더 좋다. 북동쪽으로는 북악산에서 형제봉을 거쳐 보현봉으로 이어지는 한북삼각지맥의 형제봉능선, 북쪽으로는 기차바위 뒤로 족두리봉에서 향로봉과 비봉, 사모바위, 승가봉을 지나 문수봉으로 뻗어가는 비봉능선이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형제봉능선 뒤로 칼바위능선, 더 멀리 수락산도 보인다. 북악산 남쪽 기슭에는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푸른 기와집이 있다. 


인왕산은 서울 종로구 옥인동, 누상동, 사직동과 서대문구 현저동, 홍제동에 걸쳐 있다. 조선 개국 초기에는 서산(西山)이라고 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이라 불렀다.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인데,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 이름을 바꾼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인왕산(仁旺山)이라 표기하였으나, 1995년에 인왕산(仁王山)이라는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정선의 진경산수화 '인왕제색도'


조선시대부터 명산으로 이름난 인왕산은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암반이 노출되어 있다. 조선시대 한양도성(漢陽都城)은 인왕산과 북악산, 낙산, 남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다. 산세가 좋고, 경치도 아름다우며, 곳곳에 약수터가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찾았으나 군사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1993년부터 다시 개방되었다.


인왕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린 산수화가 많은데, 특히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국보 제215호)'가 유명하다. 그림에는 범바위, 인왕산은 물론 낙월봉, 벽련봉까지 다 묘사되어 있다. 겸재는 경복고등학교 자리에서 태어나 51세에 옥인동 지금의 수성동공원 인근으로 이사가 84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인왕산에서 살았다.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낙월봉과 인왕산 정상, 안산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북악산과 구진봉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삼각산 비봉능선과 형제봉능선


인왕산에서 바라본 서울시가지와 남산


인왕산 정상에서 낙월봉을 지나 벽련봉에 이르면 기차바위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벽련봉, 기차바위도 전망이 뛰어난 곳이다. 행당산과 남산을 떠난 한북삼각지맥은 인왕산에 이른 다음 북악산과 구진봉(俱盡峰, 구준봉), 형제봉을 지나 보현봉을 향해 치달려간다. 벽련봉에서는 서울의 중심지 종로 빌딩가, 기차바위에서는 종로구 부암동과 구기동, 평창동 일대, 그 뒤로 삼각산(북한산) 비봉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구진봉 뒤로 수락산과 불암산, 그 뒤로 남양주의 천마산까지 보인다. 


정선의 진경산수화 '창의문'


벽련봉 북쪽의 기차바위 위에는 부침바위(附岩, 붙임바위)가 있다. 겸재 정선의 '창의문(彰義門)' 이란 그림 속의 바위봉우리 위에 있는 작은 공기돌 같은 바위가 바로 이 부침바위다. 부침바위는 아기를 낳지 못한 여인들이 잉태를 기원하면서 돌을 부벼댔던 기자석(祈子石)이기도 하다. 종로구의 부암동(付岩洞)이라는 지명도 이 부침바위에서 유래한 것이다. 기차바위 아랫동네가 바로 부암동이다. 부암동에는 세종의 3남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꿈 속에서 보았다는 무릉도원의 무계정사지(武溪精舍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2호)와 안동 김씨 세도가 김흥근()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에게 헌납한 석파정(石坡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호)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겸재의 장동팔경첩( 壯洞八景帖)이란 화첩이 있다. 인왕산과 북악산의 남쪽 기슭에 있던 지역으로 지금의 효자동, 청운동에 속하는 장동(壯洞)은 소위 조선시대 한양의 최고 권문세가들이 거주하던 주거지였다. 장동팔경은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던 명승지이기도 했다. 장동팔경첩에는 각 명승지의 특징을 잘 포착하여 단순한 구도로 그린 '취미대(翠微臺), 대은암(大隱巖), 독락정(獨樂亭), 청송당(聽松堂), 창의문(彰義門), 백운동(白雲洞), 청휘각(晴暉閣 ), 청풍계(淸風溪)' 등의 산수화가 실려 있다.


인왕산에서 바라본 삼각산


벽련봉에서 도성을 따라 내려오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삼각산 비봉능선과 형제봉능선이 마지막으로 다가온다. 삼각산은 언제 봐도 산세가 뛰어난 명산이다. 우뚝 솟은 보현봉이 인상적이다. 


한양도성 성벽



벽련봉과 자하문고개(창의문고개) 사이에는 서로 다른 형태의 돌로 보수한 성벽이 있다. 한양도성은 세 번에 걸쳐 축조했다. 태조 때는 비교적 작은 돌로 불규칙하게 쌓았고, 세종 때는 하부 성벽을 다듬지 않은 큰 돌로 쌓은 다음 그 위에 작은 돌을 쌓았으며, 숙종 때는 큰 돌을 정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으로 다듬어 벽돌 쌓듯이 축조했다. 가운데 성벽은 태조나 세종 때, 그 양쪽 성벽은 숙종 때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윤동주문학관


자하문고개에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시인 윤동주문학관(尹東柱文學館)이 있다. 2012년 7월 25일에 개관한 윤동주문학관은 윤동주 시인의 사진자료와 육필원고, 시집, 당시에 발간된 문학잡지 등을 전시하고 있다. 또, 윤동주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영상실도 있다. 영상실 뒤편은 인왕산 자락의 '윤동주 시인의 언덕'으로 연결된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에 재학 시절 이곳에서 가까운 누상동 9번지(서울 종로구 옥인길 57) 소설가 김송(金松, 1909~1988)의 집에서 후배 시인 정병욱(1922~1982)과 함께 하숙을 했다. 당시 윤동주는 그의 대표작인 '별 헤는 밤', '자화상' 등의 시를 남겼다. 


창의문


윤동주문학관에서 자하문고개 건너편 언덕에는 조선시대 수도 한양의 4소문(小門) 가운데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보물 제1881호)이 있다. 한양도성을 축조하면서 1396년(태조 5) 9월 다른 문과 함께 서북쪽에 세워진 창의문은 양주군을 통해 북쪽 지역과 연결되는 관문이었다. 근처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하고, 북소문(北小門)이라고도 부른다. 


1413년(태종 13년) 창의문을 개방하면 조선왕조에게 재액을 불러온다는 풍수가 최양선(崔揚善)의 건의로 이 문을 폐쇄하였다. 평시에 닫혀 있던 창의문은 사냥하러 나가는 왕과 왕실 종친들, 국가적인 공무 수행을 위해 나가는 관료들, 군사훈련을 위해 나가는 관군들에게만 비밀리에 임시로 개방되었다. 인왕산 산세가 지네를 닮아 그 독기가 창의문을 넘어 궁궐에 이른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홍예문 천장에는 일명 금계(金鷄)라고도 하는 봉황(鳳凰)이 그려져 있다. 닭은 지네의 천적이기 때문이다.  


1623년(광해군 14년) 3월 12일 밤 홍제원에 집결한 이귀(李貴) 등 서인 일파는 세검정과 창의문을 통과하여 광해군과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종(倧)을 왕으로 옹립하는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1741년(영조 17년) 6월 16일 훈련대장 구성임(具聖任)의 청으로 창의문을 개수하면서 문루(門樓)를 설치하였다. 창의문은 현재 4소문 중 유일하게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문이다.


다음에는 북악산을 오르고 싶다. 석양에 황금빛으로 물든 인왕산을 가슴에 안고 귀로에 오르다.


2016. 10.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