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의대를 졸업하고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한 딸 선하가 수원에 있는 동수원한방병원에서 수련한의사로 인턴 과정을 밟게 되었다. 한의사 국가고시 합격자 발표가 있은 뒤 병원측으로부터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바로 근무를 시작하라는 연락이 왔다. 6년간 한의학을 공부하느라고 지친 심신을 단 한달만이라도 휴식을 취할 수 있기를 바랬는데..... 딸이 좀 안쓰럽다.
선하를 데려다 주기 위해 수원으로 향한다. 이제 막 사회로 나가는 딸을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바로 엊그제까지만 하더라도 재롱을 떨던 어린아이가 언제 저렇게 자라서 다 큰 처녀가 되었는지 참 세월이 빠르기도 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때 선하가 한의과대학을 선택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이제는 어엿한 한의사가 되어 내가 가는 길을 이어 받았으니..... 한편으로는 대견하기도 하다.
인류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직업 중에서 스승 사(師)자가 들어가는 직업은 단 세 가지 밖에 없다. 지식과 문명을 전수하는 사(교사, 교수 등)와 사람의 몸과 마음의 병을 다스리는 사(한의사, 의사, 치과의사, 약사 등) 그리고 영혼을 인도하는 사(무당, 신부, 목사, 스님 등)가 그들이다. 스승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의 등불이 되어야만 하는 존재다.또한 사회의 불균형을 바로잡아 주는 균형추 역할도 해야 한다. 그래서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은 사명감이 없고서는 제대로 잘 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선하도 인류의 앞날에 빛이 될 수 있는 그런 한의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의사나 한의사에는 하의, 중의, 대의 세 가지 부류가 있다. 하의란 환자를 볼모로 돈벌이에만 급급한 의사를 말한다. 이런 의사한테 걸리면 건강과 돈도 모두 잃게 된다. 중의는 환자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또 그 고통을 잘 치료해 주는 의사다. 대의란 환자의 고통도 함께 할 뿐만 아니라 병든 사회까지도 고치는 의사를 말한다. 물신에 사로잡힌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의사는 어쩔 수 없이 대의에서 중의로, 중의에서 하의로 점점 더 내몰릴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나는 선하가 대의의 길을 가기 바란다. 그 길이 비록 힘들고 어렵다고 하더라도.....
선하는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자라 주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잔소리를 한 기억이 별로 없다. 선하는 또 속이 깊은 아이였다. 선하가 대학에 들어와서 들려 준 이야기가 아직도 가슴 한켠에 남아 있다. 선하는 초등학교 시절 음악학원에 다닐 때 피아노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피아노를 공부하려면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선하는 여의치 못한 집안형편을 생각해서 피아노 공부를 스스로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나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당시 교육민주화운동이니 뭐니 해서 밖으로만 나다니느라고 가정을 거의 돌보지 못 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에게 좋은 아버지 노릇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돌이켜 보면 아이들에게 참 미안하다.
동수원한방병원에 도착해서 선하의 짐을 옮겨 주고 돌아서려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고 힘든 한방병원 인턴생활을 해야 하는 딸아이를 남겨두고 떠나려니..... 그러나 이 길은 선하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선하도 이젠 독립된 인생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이번에도 잘 해내리라 믿는다.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딸아이에게 '열심히 잘 배워라'는 말 한 마디를 남기고 충주로 돌아오는 길에 오른다.
2006년 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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