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소난지도 대일의병항전의 영웅 최구현 의병장의 묘소를 찾아서

林 山 2013. 6. 12. 10:23

당진 석문호의 일몰


소난지도 항일의병 유적을 둘러본 뒤 오후 5시 반경 도비도행 카페리에 몸을 실었다. 배는 대난지도에 잠깐 들러 승객을 실은 뒤 곧장 도비도로 향했다. 도비도 선착장에서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서쪽 바다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소난지도 대일의병항전의 지도자 유곡(楡谷) 최구현(崔九鉉) 창의영도장(倡義領導將, 의병장)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서는 서둘러야만 했다. 묘소가 당진시 송산면 매곡리에 있다는 것만 알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석문호에는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송산면 매곡리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 땅거미가 밀려오고 있었다. 묘소 위치를 묻기 위해 매곡리 마을회관을 찾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마을회관 바로 옆집에 들러 물어보니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그 옆집도 모른다고 했다. 그 아랫집에서도 돌아온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마을 주민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병장의 묘소를 모르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매곡리 세안아파트 상가를 찾았다. 상가 주인들도 하나같이 모른다는 대답 뿐이었다. 금암리 구슬고개 언덕에 있는 금암리 대상아파트 상가까지 찾아갔다. 대상아파트 상가 주인들도 묘소의 위치를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유곡 선생의 묘소를 찾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는데 누구 한 사람 친절하게 일러주기는 커녕 가는 곳마다 죄다 문전박대였다. 나중에는 이들이 유곡 선생의 묘소를 알면서도 일부러 가리켜주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마지막에는 마을 이장을 찾기로 했다. 그러나 약국 주인도, 통닭집 주인도 이장의 연락처를 알면서도 알려주지 않았다. 낯선 사람에게 이장의 연락처를 알려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항일의병장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불원천리 달려온 사람에게 낯선 사람 취급을 하다니!   


내가 오히려 유곡 선생에게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유곡 선생 같은 분들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위해 싸웠기에 오늘날 우리가 이나마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호국영령들의 은공도 모른체하는 배은망덕하고 후안무치한 사람들을 보고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송산면 매곡리 세안아파트 앞 '항일의병대장 최구현선생묘 800m'라고 쓴 표지판

 

충남 아산에 살고 있는 증손녀가 묘소를 찾지 못하고 마을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전화로 묘소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묘소의 위치는 매곡리 22번지이고, 진입로 입구에 묘소 표지판이 있다는 것이었다. 차량의 GPS를 이용하기로 했다. GPS가 안내하는 대로 세안아파트 바로 앞에서 논둑길로 들어섰다. 몇 백 미터쯤 올라가자 곧 묘소 입구가 나왔다.

 

묘소는 바로 마을 뒤편 야산에 있었다. 묘소를 바로 앞에 두고도 헤맨 생각을 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허탈한 나머지 쓴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묘소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아무도 알려 주는 사람이 없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마을 주민들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구현 의병장에 대한 마을 주민들의 태도에 마음이 몹시 서글퍼졌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내가 늘 주장하는 말이 있다. 역사를 망각한 민족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고 대선 때마다 자기들 손으로 수구보수 매국노 정권을 뽑는 것이다. 또 온갖 그럴듯한 감언이설로 자신들을 속이고 주머니를 털어가는 정치인들을 뽑으면서도 투표를 잘한 줄로 착각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진짜 적이 누군지도 모른 채 그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유곡 최구현 선생 항일독립 대의비

 

묘소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완전히 캄캄해져 있었다. 묘소 입구에는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비문을 읽으려고 했지만 어두워서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전등을 준비해오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충신공파(忠信公派) 경주최씨(慶州崔氏) 세장지원(世葬之原) 전경

 

묘소는 비석이 있는 데서 조금 더 올라간 곳에 있었다. 잘 단장된 묘소에는 여러 기의 무덤이 있었다. 비문이 보이지 않아 유곡 선생의 묘소를 분간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묘소의 앞에 설치된 제단 앞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유곡 선생을 추모하는 합장 묵념을 올렸다. 한밤중에 느닷없이 찾아와 고이 잠들어 있는 혼령들이 놀라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유곡 최구현 선생 묘소

 

유곡 선생의 묘소 참배를 마치고 귀로에 올랐다. 문득 유곡 선생의 증손녀와 증손자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유곡 선생의 장손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선산의 장지로 운구하려면 마을의 집들을 통과해야만 했다. 상여가 어느 집 앞을 지나가려고 할 때였다. 그 집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더니 상여를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집안에 암 환자가 누워 있어 상여가 지나가면 부정을 탄다는 황당한 이유였다. 유족들은 어쩔 수 없이 상여를 되돌려야만 했고, 다른 길로 돌아서 운구하여 가까스로 장례를 치룰 수 있었다.    

 

매곡리는 수 백년 동안 유곡 선생의 선산이 있던 곳이다. 마을 주민들은 유곡 선생의 후손이 고향을 떠났다고 안면을 몰수하고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유곡 선생의 후손들은 수 백년 동안 살아온 정든 고향을 두고 떠나고 싶어서 떠났겠는가? 


의병장으로 대일항전을 하다가 체포된 유곡 선생은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세상을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부친마저 어려서 사망하자 당시 14살이었던 장손자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고향에서는 항일의병대장의 후손이었기에 일제의 감시 대상이었으며 일거리도 찾을 수 없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타지에 나가 품팔이 막노동이라도 해야만 했다. 결국 유곡 선생의 후손들은 먹고 살 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등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대로 된 나라였다면 항일독립 의병대장의 후손을 이렇게 예우했을까? 

  

마을 주민들이 자기들 고장의 자랑일 수도 있는 의병장의 묘소를 모른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묘소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하나같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마을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우리를 위해 목숨 바쳐 일제와 싸운 의병장이지 않은가! 


옛날에는 이러지 않았다. 마지막 가시는 길 편안하게 해드려야 한다며 없는 길도 닦아 드리고, 농작물 수확을 앞두고도 편히 가시라고 내 논밭에 길도 만들어 주는 것이 우리네 인정이었다. 암환자가 있다고 운구를 가로막다니! 언젠가는 너도 가고 나도 가야 할 길이 아니던가? 운구를 가로막으니 암이 낫던가?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은 나라의 출발부터 잘못된 데 기인한다. 해방이 되자 재빨리 친미로 변신한 친일 민족반역자들이 지배세력이 되면서 이 땅에는 양심과 정의가 사라지게 되었다. 지배세력들은 정치 경제는 물론 교육, 군대와 경찰, 매스컴을 장악하고 왜곡된 가치관과 역사를 주입시켰다. 결국 이 모든 것은 교육이 잘못된 탓이 아니랴! 


항일의병장 유곡 최구현 선생의 초상


유곡 최구현 선생은 1866년(고종 3년)에 면천군 매염리(현 당진시 송산면 매곡리)에서 최영환의 장자로 태어났다. 자는 인성, 호는 유곡, 본관은 경주 최씨 충신공파다. 고종 3년은 프랑스군이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구실삼아 강화도를 점령한 사건인 병인양요(丙寅洋擾 )가 일어난 해였다. 1887년(고종 24년) 12월 선생은 22살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888년 훈련원봉사로 벼슬길에 올라 군부에서 근무하였다. 

 

유곡 선생의 12대 조상인 최준립(崔峻立, 일명 崔峻) 장군도 무관 출신이었다. 조선 선조 10년에 무과에 급제한 최준립 장군은 임진왜란 때 오행장으로 평양성 전투에 참전했으며, 1596년(선조 29년)에는 이몽학의 난 평정을 지원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후 조선과의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1597년 왜군이 재차 조선을 침입한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최준립 장군은 오위도총부 도총관 겸 도순무사의 직책을 맡아 조선군을 이끌고 경북 영천 대회전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최준립 장군의 아들 최치화(崔致和) 진사(進士)는 몇 달 후 부친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듣고 영천전투가 벌어졌던 곳에서 보름 동안이나 시신을 수습하려 헤맸다. 그러나 온 들판이 전사한 시신들로 가득찼던 까닭에 부친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의관으로 초혼제를 지내고 초혼단을 세웠다. 조정에서는 최준립 장군에게 '선무원종공신2등'을 추서하는 한편 병조판서를 추증하고 '충신'이란 시호와 정려를 내렸다.


1894년에는 동학농민혁명군이 우금치 전투에서 조선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에 패해 3만여명이 전사했다. 그 이듬해에는 일제의 낭인들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났다. 1904년(고종 41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중립을 주장하는 대한제국을 세력권에 넣기 위해 황성을 공격하여 황궁을 점령한 뒤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일본의 만행에 울분을 참지 못한 유곡 선생은 국정을 탄식하며 39세의 나이로 군부참서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했다. 


1905년(고종 42년) 11월 일제의 협박과 강요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분노한 최익현 선생은 전북 정읍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1906년 봄(음력 3월 경) 유곡 선생도 을사늑약에 비분강개하여 드디어 기지시(현 당진군 송산면)에서 창의도소를 개설하고 거병했다. 


유곡 선생은 성품이 강직해서 불의를 보면 결코 참지 못했다. 일본의 악행이 거듭되자 선생은 마침내 정의의 기치를 들고 항일의병장으로서 구국의 가시밭길로 나섰던 것이다. 무과에 급제할 정도로 수재였던 선생은 군부참서관으로서 상당한 군사 지식을 갖추고 각종 전략과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났기에 의병장으로서 최적임자였다. 


면천읍성


유곡 선생의 창의 소식을 듣고 면천, 당진, 고덕, 천의, 여미 등지에서 370여명의 의병들이 달려왔다. 창의영도장으로 추대된 선생 창과 칼, 화승총 등 구식 무기로 무장한 370여명의 의병군을 이끌고 1906년 4월 17일 초저녁 면천읍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 수비대의 반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면천읍성 공격에 실패하고 너무 많은 피해를 입자 책임을 통감한 유곡 선생은 눈물을 머금고 의병군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한 36명의 의병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선생은 36명의 의병군을 이끌고 밤에만 행군하여 4월 23일 소난지도로 들어갔다. 


당진군 석문면 소난지도


유곡 선생이 소난지도로 들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소난지도는 조선시대 조세미를 수송하던 조운선이 자주 기항하던 섬으로 많은 사람들이 왕래했기 때문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는데 유리한 곳이었다. 또 수로를 이용해서 경인지역 등지로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소난지도는 어업을 하면서 농사도 지을 수 있어 자급자족이 가능하여 식량조달이 용이했다. 또 난지도수가 주둔하고 있을 만큼 이 섬은 전략상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외적 방어의 최전선이었다. 이런 점들로 소난지도는 의병 활동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섬에 먼저 들어와 있던 홍일초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군과 당진 의병군 등 40여명도 최구현 의병군에 합류했다. 윤4월 5일(5월 27일)에는 관군에게 쫓기던 서산 의병군 참모 김태순이 이끄는 28명, 윤4월 16일(6월 7일)에는 홍주성 전투에서 패한 차상길 의병 등 15명의 의병이 소난지도로 들어와 합류했다. 소난지도 의병군은 120여명으로 불어났다. 선생은 항일의병항전을 계속하기 위해 만주의 간도로 근거지를 옮길 계획을 세웠다. 


최구현 의병군이 간도로 떠날 항해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소난지도를 염탐하던 친일 매국노가 의병에 대한 정보를 일본 경찰에 밀고했다. 첩보를 입수한 일본군 수비대와 관군 200~300명은 1906년 음력 7월 5일(7월 24일) 인시(새벽 3~5시)나무를 실은 배로 위장한 세 척의 배를 타고 소난지도 의병군을 기습적으로 공격해왔다. 이것이 이른바 소난지도 1차 항일의병항전이다. 


우세한 화력과 병력을 갖춘 한일 연합군에 의병군은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최구현 의병군은 연합군에 의병군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맞서 싸웠지만 결국 참패했다. 유곡 선생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동족도 서슴지 않고 팔아버린 친일 매국노로 인해 소난지도 1차 의병항전은 비극적인 패배를 맞이하고 말았다. 


음력 11월 선생은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전답 30결을 몰수당한 뒤 수레에 실려 출옥했다. 12월 23일 축시(새벽 1~3시)에 선생은 마침내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겨우 13세의 어린 아들은 선생을 탄우(숱모루, 숯골) 언덕에 초빈하였다가 1907년 10윌 20일 면천 고잔리 선영에 장사지냈다.


항일의병장으로 활동하다가 순국한 선생에 대한 기록은 자칫하면 항간에서 잊혀질 뻔했다. 2003년 9월 17일 새벽 75세의 유곡 선생의 장손자 최충묵 선생은 대궐같이 큰 집으로 이사를 하는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갓과 도포 차림으로 나타난 조부가 장손자의 이름을 부르면서 '문패를 빠트리고 왔으니 찾아오너라.'라고 하는 것이었다. 


놀라서 잠에서 깬 장손자는 아무래도 이상해서 꿈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했다. 날이 밝자마자 장손자는 비가 쏟아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송산면 무수리로 달려갔다. 무수리에는 장손자가 태어나기 몇 년 전까지 유곡 선생이 묻혀 있던 묘자리가 있었다. 선생의 옛 묘자리 앞쪽 부분을 파헤치자 석고로 만든 묘지석(墓誌石)이 나왔다. 장손자는 묘지석을 유리상자에 넣어 고향집 거실에 고이 잘 모셨다. 


유곡 선생의 옛 묘자리에서 발견된 묘지석 탁본 사


최구현 의병장의 묘소에 새로 세운 묘지석

 

묘지석에는 '광무십년면천창의영도장유곡최구현선생묘지(光武十年沔川倡義領導將楡谷崔九鉉先生墓誌)'라는 제하에 유곡 선생의 일대기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덨다. 다음은 묘지(墓誌) 전문이다.  


光武十年沔川倡義領導將楡谷崔九鉉先生墓誌


先生字仁成號楡谷先生同治丙寅生於沔川郡梅塩里光緖丁亥武科及第戊子入仕訓練院奉事至光武八年甲辰倭以韓日議定書壓迫國政難望國運也至於是先生歎淚國政辭任軍部參書官焉然當乙巳勒約不勝義氣丙午倡義都所開設於機池市榜布倡義文沔川唐津古德天宜餘味義兵馳到者三百七十名也於是先生被推戴倡義領導將統率義兵連十五日間宣威行軍於起義兵地州使民興起討倭義憤四月十七日初更攻討沔川城官軍與倭備隊應射熾烈莫强倭新銃砲以義兵之槍劍與火繩銃不可勘當焉遂五更彈雨中收斂死傷義兵飮泣解散時先生將限死義兵三十六名乘夜行軍四月卄三日當到蘭芝島旣到唐津倡義兵與華城倡義將洪一初軍等合爲四十餘名雄據矣繼此閏四月初五日被遂於官軍者瑞山義兵參謀金泰淳一陣卄八名合流閏四月十六日來到洪州城敗走車相吉義兵一陣十五名都合義兵百卄餘名也於是爲欲持續滅倭戰向間島航海豫備時七月初五日寅時官軍與倭守備隊二三百名以僞裝薪木船三隻奇襲先生被捉囚於沔川衙門因倭守備隊之惡鬼拷問先生幾至死境至月私田卅結被奪於沔川衙門後載車出獄不能蘇生遂臘月卄三日丑時殞命嗣子致英十三年乃草殯炭隅而丁未十月卄日葬于沔川高棧里先塋側也 


沔川倡義軍幕下軍士 謹記                                                                                                      

 

항일의병대장 유곡 최구현 선생 묘지문(한글 번역)

 

선생의 자는 인성이요, 호는 유곡이시다.  선생은 동치 병인년(1866년)에 면천군 매염리에서 출생하여 광서 정해년(1887년)에 무과급제하고, 이듬해 무자년(1888년)에 훈련원 봉사로 벼슬길에 들었다. 광무 8년(1904년)에 이르러 왜가 한일의정서를 핑게 삼아 국정을 압박하여 국운이 가망이 없었다.  이에 선생은 국정을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고 군부참서관 벼슬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을사늑약(1905년)을 당하자 의기를 참을 수 없어 병오년(1906년) 봄에 기지시(당진군 송산면)에 창의도소를 열고 창의문을 널리 써 붙였더니 면천, 당진, 고덕, 천의, 여미에서 의병이 370명이 달려왔다.  여기에서 선생은 창의영도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통솔하고 연달아 15일 동안 의병이 나온 고을을 돌며 위세를 드날리며 행군을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왜를 쳐부숴야 한다는 의분을 불러 일으켰다.  선생은 4월17일 초저녁 면천성을 공격하였으나 관군과 왜의 수비대가 맹렬히 되받아 쏠 뿐만 아니라 왜의 신식 총포의 위력이 더 없이 강해서 의병의 창과 칼과 화승총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동이 트는 새벽에 총탄이 비오 듯 하는 속에서 죽고 다친 의병을 들것에 싣고 부축하고 눈물을 삼키며 의병을 해산할 때, 선생은 죽기를 한하고 왜놈과 싸워야한다는 의병 36명을 거느리고 밤에만 행군하여 4월23일 난지도에 당도하니 그곳에는 이미 당진 의병과 화성 의병장 홍일초 창의장 군사 등 40여명이 와서 웅거하고 있었다.  이어 윤 4월5일 관군에게 쫓기는 서산의병 참모 김태순 일진 28명이 합류하고, 윤 4월16일 홍주성에서 패한 차상길의병 등 일진 15명이 도착하니 의병이 모두 120여명이 되었다.  이에 왜를 멸망시킬 싸움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간도로 향한 항해를 준비할 때,  7월5일 새벽 관군과 왜 수비대 200~300명이 나무 실은 배로 위장한 세 척의 배로 기습하여 선생은 잡혀서 면천 감옥에 갇히고, 왜 수비대의 악귀 같은 고문으로 선생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동지달에 선생의 전답 30결을 면천 아문에 몰수 당하고 수레에 실려 출옥하였으나 선생은 소생치 못하시고 결국 섣달(12월)23일 축시(새벽 1~3시)에 운명하시니 13세 된 아들 치영이가 숱모루 언덕에 초빈하였다가 이듬해 정미년(1907년) 10윌20일 면천 고잔리 선영 곁에 장사지냈다.


면천창의군 막하군사 삼가 적음.


건국훈장 애국장 훈장증


건국훈장 애국장 훈장

 

묘지는 유곡 선생이 순국한 뒤에 휘하 의병들이 봉헌하는 형식으로 작성된 글이었다. 2003년 묘지석이 발견된 뒤 충남대학교의 김상기 교수는 묘지를 바탕으로 연구한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묘지석의 내용이 학계의 고증으로 확인되자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8월 15일 유곡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선생의 서거 후 실로 98년만에 그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었다. 


SBS는 2005년 광복 60주년 특집 2부작 다큐 드라마 '소난지도의 영웅들'을 방영하여 최구현 의병장이 이끌었던 의병군의 활약상을 재조명했다. 1부는 1906년 최구현 의병장 중심의 의병 활동, 2부는 1907년 이후 홍일초 의병장 중심의 의병 활동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는 최충묵 선생의 인터뷰도 들어 있다.


KBS 역사스페셜 '잊혀진 전쟁 1907 2부, 발견 일본 보병 14 연대 진중일지'편은 소난지도 항일의병항전을 다루지는 않았지만 조선의 의병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일본군과 얼마나 어려운 전투를 벌였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다. 이 진중일지는 1907년부터 1909년까지 2년간 일본군 보병 14연대가 토벌한 의병장과 의병의 이름, 진압 과정에서의 전략 등이 정확하고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본군에 체포된 의병장들은 단체로 사진을 찍은 뒤 처형을 당했다. 


TV에서 유곡 선생을 재조명하고 훈장도 추서되자 천안의 독립기념관과 당진시 박물관 관계자는 묘지석의 기증을 요청했다. 국가보훈처도 유곡 선생의 유해를 국립묘지로 이장하라는 제의를 해왔다. 그러나 최충묵 선생은 이승만, 박정희가 묻혀 있는 국립묘지에 항일의병장인 조부의 유해를 함께 모실 수 없다고 국가보훈처의 제안을 거부했다. 또 독립기념관도 진정한 독립기념관이 아니라면서 묘지석을 기증하라는 제의도 거부했다. 최충묵 선생은 진정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최충묵 선생은 집에 도둑이 들어 묘지석을 훔쳐 갔다고 선언했다. 도둑이 교지나 사령장 같은 중요한 문서는 손도 안 대고 달랑 묘지석 하나만 갖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정말 이상한 도둑이었다. 그 후 묘지석의 행방은 묘연했다. 시간이 지나고 묘지석의 비밀을 간직한 채 최충묵 선생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후손들은 묘지석이 유곡 선생의 묘소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1주일 뒤 유곡 선생의 묘소를 다시 찾았다. 지난 주말 한밤중에 찾아와 제대로 참배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묘소 사진은 이 때 찍은 것이다.  


2013. 6.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