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 장군의 사당인 충렬사(忠烈祠)에 갔다가 문득 내 조상의 뿌리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겼던 적이 있다. 지금까지 나는 한국의 족보는 대부분 가짜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 조상에 대해서 사실 무심했었다. 하지만 족보의 진위도 중요하지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동족의식이 아닌가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임씨(林氏)의 조상은 중국 상(商)의 왕자 비간(比干)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들어서 그렇게 알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나는 종종 내 몸 속에 중국 황족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긍지로 여겼던 적도 있다. 비간이 내 진짜 조상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상의 28대 태정제(太丁帝) 문정(文丁)의 아들로 태어난 비간은 그러니까 제신(帝辛) 주(紂)의 숙부(叔父)이다. 이름은 비(比)이고, 간(干)이라는 나라에 봉(封)해져 비간(比干)이라고 불린다. 자(子)성이므로 자비(子比)라고도 한다. 중국 사람들은 그를 글과 재물을 관장하는 문곡성(文曲星)의 화신(化身)으로 숭배하여 문곡성군(文曲星君)으로 부르기도 하고, 중국의 다른 전설적 인물들과 함께 재물을 관장하는 재신(財神)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주왕(紂王)은 자신의 총명과 용맹을 과신하여 신하와 형제들의 충고를 무시했다. 그는 하남성(河南省) 남부의 호족 유소씨(有蘇氏)를 토벌하고, 그 가문의 절세미녀 달기(妲己)를 얻었다. 달기를 총애한 주왕은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점점 광폭해져 갔다. 주왕이 달기를 멀리 하라고 간언하는 신하들을 처형하자 조정의 충신들은 다 떠나고 간신의 무리들만 요직에 임명되었다.
비간의 죽음에 대한 중국의 민간 설화가 전한다. 비간은 산서성(山西省) 임분현(臨汾縣) 서하(西河)에서 조카 주왕에게 달기에게서 헤어나 정사를 제대로 돌볼 것을 간언했다. 이에 주왕은 화를 내면서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고 들었다. 그 말이 진짜인지 확인하겠다.'면서 비간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내게 함으로써 삼촌을 참혹하게 죽였다는 것이다.
BC 1046년 주왕이 주(周)나라의 무왕(武王)과 벌인 목야전투(牧野戰鬪)에서 패하고 자살함으로써 상 왕조는 멸망하고 말았다. 주왕 폭군설은 상 왕조를 멸망시킨 주나라의 무왕이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날조한 것일 수도 있다. 역사는 승리한 자들이 쓰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역사서를 보면 대개 전 왕조의 마지막 왕은 천하의 폭군(暴君) 또는 암군(暗君), 새 왕조를 연 사람은 천하의 성군(聖君) 또는 명군(明君)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 왕조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연 창업주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했던 것이다.
주왕의 아들 무경(武庚)은 주 무왕에 의해 상의 옛 도읍지 위(衛)에 봉해졌다. 무왕 사후 무경은 무왕의 형제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해 주살당했다. 주왕의 서형(庶兄)이자 무경의 백부인 미자계(微子啓)는 송(宋)에 봉해져 상 왕조의 제사를 계속했다.
비간의 묘역은 하남성 북부의 신상시(新乡市) 위휘(衛輝)에 있다. 묘역은 상 후기에 만들어졌고, 주의 무왕이 봉묘(封墓)하고 중건하였다. 공자(孔子)도 비간(比干)의 묘역을 찾아 비석을 세우고, 은(殷)나라의 비간이 이곳에 잠들었다는 '은비간모(殷比干莫)'라는 글을 남겼다. 공자 이후 모두 64개의 비석이 만들어 졌는데, 진(秦), 한(漢), 당(唐), 송(宋) 등 중국의 모든 왕조는 이곳에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는 비간의 사당을 건립하고 '황제조은비간묘문'을 만들었다.
당 태종(太宗)은 비간을 은의 태사로 봉하고, 제사 제문의 내용을 담은 '봉은태사비간소', '제은태사비간문'을 만들어 묘역에 조성하였다. 원(元)나라 인종(仁宗)조 몽골 유민들은 비간의 동상과 '사수비간묘비' 등의 비석을 만들었다. 명(明)나라의 홍치제(弘治帝)는 사당에 건축 양식을 추가로 중건했다. 청(淸)나라의 건륭제(乾隆帝)는 '과은태사묘유작'을 지어 사당의 비석에 해서체로 새겨 넣었다. 위휘시는 1993년부터 매년 비간기념회를 개최하고 있다고 한다.
비간이 죽은 뒤 그의 부인은 하남성 안양(安養)으로 피신하는 가운데 아들을 낳자, 임(林) 성을 주었다고 한다. 비간의 아들 견(堅)은 장림산(長林山)에 은거하면서 성을 임씨(林氏)로 하였다는 설도 있다. 주 문왕(文王)이 비간 묘역을 중건하면서 비간의 아들에게 임성(林姓)을 주었다는 설도 있다. 견이 안양의 지명에서 자신의 성을 땄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지 않나 생각한다.
임견의 후손들은 주(周)의 하남성, 하북성(河北省), 절강성(浙江省), 광동성(廣東省), 낙양(洛陽)의 흉노(匈奴), 중국의 소수민족 야오덩족(姚鐙瘯), 리족(黎族), 쉐족(畲族), 타이완(台湾) 원주민, 한국 등으로 퍼져 나갔다. 이민족까지 포함하면 7~8가지 계통이 더 있다. 중국에서 임씨(林氏)는 10위 안에는 들지 못하지만 그래도 대성(大姓)에 속한다.
임씨(林氏)는 국제적인 성씨다. 임씨로서 명성을 드날린 인물에는 중국 공산당 제2인자였던 임표(林彪), 타이완의 세계적인 석학 임어당(林語堂), 조선시대 풍운의 혁명가 임거정(林巨正) 장군, 인조 때 숭명배청의 명장 임경업 장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씨(林氏)의 도시조(都始祖)는 당나라 문종(文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8학사의 한 사람인 임팔급(林八及)으로 알려져 있다. 임팔급은 정치적인 화를 피해 신라에 망명해서 팽성(彭城) 즉 지금의 경기도 평택(平澤) 용주방(龍珠防)에 자리를 잡고 세거(世居)하였다. 이런 연유로 임팔급의 후손들은 본관을 평택(平澤)으로 삼았다.
임팔급 도시조부터 태사공(太師公) 임양저(林良貯) 경순왕(敬順王) 때 태사(太師) 혹은 상장군(上將軍) 중랑장(中郞將) - 임무(林碔) 상장군(上將軍) 평성백(平城伯) - 임희(林禧) 고려조(高麗朝)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영삼사사(領三司事) - 임면(林冕)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 - 임득우(林得雨) 금시위(禁侍衛) - 임몽주(林夢周) 평찰품사(評察品事) - 임견미(林見美) 문하시중(門下侍中) - 임새(林塞) - 임만옥(林萬玉) - 임희윤(林喜胤)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임희윤은 임세춘(林世春), 임세하(林世夏), 임세추(林世秋), 임세창(林世昌), 임세은(林世殷) 등 다섯 아들을 두었다.
고려 말 세자전객령(世子典客令)을 지낸 임세춘(林世春)은 평택임씨(平澤林氏) 전객령파(典客令派) 중시조(中始祖) 1세조가 되었다. 고려 말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위(太尉) 찬성사(贊成事)와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진 임언수(林彦修)는 평택임씨 충정공파(忠貞公派) 중시조 1세조가 되었다.
한국의 임씨는 나주임씨(羅州林氏)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평택임씨에서 분관했다. 나주임씨는 고려 때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임비(林庇)를 시조로 하고 있다. 평택임씨는 세월이 흐르면서 부안(扶安), 예천(醴泉), 조양(兆陽), 경주(慶州), 익산(益山), 은진(恩津), 진천(縝川), 안동(安東), 순창(淳昌), 장흥(長興), 옥야(沃揶), 안의(安薏), 울진(蔚珍) 등으로 분적(分籍)되어 세계(世係)를 이어왔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모든 임씨(林氏)는 동조동근(同祖同根)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평택임씨는 고려 때 특히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크게 융성하였다. 임세춘의 아들 재(梓)는 예의판서(禮儀判書)와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고, 증손 임정(林整)은 조선 태종 때 예조판서와 서북도병마절도사, 평양부윤을 지냈으며, 성종 때는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임정의 아들 임인산(林仁山)과 임명산(林命山)은 형제가 차례로 이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가문을 중흥시켰다.
임인산의 묘는 풍수에서 종을 엎어 놓은 것 같은 복종형(伏鍾形)이라고 한다. 전형적인 돌혈(突穴) 명당으로 정문백회혈(頂門百會穴) 또는 천풍혈(天風穴)이라고도 불린다. 임세춘의 12세손이자 임명산의 7세손, 임황(林篁)의 4남이 바로 충민공 임경업 장군이다. 그의 형 임형업(林亨業)도 병자호란 때 모친상으로 피난을 가지 못해 청군에게 붙잡혔으나, 그들도 '효자는 해칠 수 없다'고 찬탄할 정도로 효성이 뛰어나 경기도 평택에 충효정문이 세워졌다. 임언수를 1세조로 하는 평택임씨는 그의 아들 임성미(林成味)가 고려 말 우왕(禑王) 때 왜구를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워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이르렀다.
임희윤의 다섯째 아들 임세은(林世殷)은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장흥군(長興君)에 봉해졌다. 임세은은 사후에 묘소 역시 장흥에 자리잡으면서 장흥임씨(長興林氏)의 파시조가 되었다. 임세은 파시조에서 시작된 장흥임씨 세계는 2세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 임분(林蕡) - 3세 조선 대제학(大提學) 임이(林頤) - 4세 공조판서(工曹判書) 임득이(林得荑) - 5세 통정대부(通政大夫) 상주목사(行尙州牧使) 임우소(林雨所) - 6세 통정대부(通政大夫) 부호군(副護軍) 임중경(林重敬) - 7세 통훈대부(通訓大夫) 홍산현감(鴻山縣監) 임귀지(林貴枝)로 전해졌다. 파시조로부터 5세손인 임우소의 일족이 상주로 옮겨간 뒤, 그 후손들은 문경(聞慶)의 영순(永順)이나 예천(醴泉)의 율현(栗峴) 등지에서 대를 이어 살았다. 7세손 임귀지(1375~1508)는 식솔들을 이끌고 예천군 유천면(柳川面) 율현으로 이주하였다. 임귀지의 묘는 예천군 유천면 율현리에 있다.
장흥임씨는 또 7세 임귀지로부터 8세 승사랑(承仕郞) 후릉참봉(厚陵參奉) 임장춘(林長春) - 9세 장사랑(將仕郎)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 임덕원(林德元) - 10세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 임용개(林用漑) - 11세 승훈랑(承訓郞)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임충국(林忠國) - 12세 통정대부 부호군 임식(林植) - 13세 헌릉참봉(獻陵參奉) 임지하(林支厦)로 이어져 내려왔다. 14세부터는 벼슬이 없다. 13세 임지하로부터 14세 임만휴(林萬庥) - 15세 임민흥(林敏興) - 16세 임윤(林潤) - 17세 임국영(林國榮) - 18세 임승운(林承運) - 19세 임치기(林致杞) - 20세 임태호(林泰鎬)로 전해 내려왔다.
21세 고조(高祖) 임영휴(林永休) - 22세 증조(曾祖) 임우상(林友相) - 23세 조(祖) 임병주(林炳周)는 경북 예천에서 세거하였고, 24세 선고(先考) 임원규(林元圭)는 예천에서 충주로 이주하였다. 장흥임씨 임종헌(林鍾憲)은 임세은 파시조로부터 25세, 아들 임정하(林正河)는 26세가 된다. 또 임종헌은 장흥임씨 충주파의 종손(宗孫)이기도 하다. 임종헌의 원시조는 상(商) 왕자 비간의 아들 임견(林堅, 린지엔), 도시조는 당(唐) 한림학사 임팔급(林八及, 린빠지), 장흥임씨 파시조는 장흥군 임세은, 공조판서공파 파조는 임득이이시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임씨(林氏)는 가구수 237,145가구에 인구수 762,767명으로 286성씨 중 10위를 차지했고, 장흥임씨는 2,877가구 총 9,355명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2013년 우리나라 임씨(林氏) 인구별 순위는 1위 나주임씨(羅州林氏) 236,877명, 2위 평택임씨(平澤林氏) 210,089명, 3위 부안임씨(扶安林氏) 63,589명, 4위 예천임씨(醴泉林氏) 58,403명, 5위 조양임씨(兆陽林氏) 31,924명, 6위 경주임씨(慶州林氏) 13,163명이었다.
2021년 4월 20일 최종 수정 임종헌(林鍾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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